정말 아름다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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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름다운 것은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08.01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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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혜-3

어느 날 밤 한 나이든 은수자의 암자에 도둑들이 들어와서 말했다: “우리는 당신 방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기 위해 왔소.” 그러자 그 은수자는 말했다, “당신들이 보는 것들을 다 가져가시오, 형제들이여.” 도둑들은 다 싸가지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은촛대가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러자 은수자는 촛대들을 들고 도둑들을 따라가며 소리쳤다. “이것들을 가져가요. 당신들은 이것을 잊어버렸네요. 가장 아름다운 것들인데요.”

고도로 기계화된 세상 속에서 가장 많이 상실된 것은 아름다움이다. 대신 우리는 효율성을 가치로 생각한다. 우리는 예술보다 기능을 더 원한다. 우리는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저질의 작품 속에 안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 모든 것들의 적절한 비율, 우리 삶의 우주가 지닌 조화, 외모 속의 진실은 우리를 피하고 있다.

우리는 아름다운 나무에 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야생 꽃보다 플라스틱 꽃을 선호한다. 우리는 플라스틱으로 피에타를 자꾸 생산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고 실제적인 것보다 번지르르하고 겉치레적인 것에 마음이 기운다. 하나의 사람인 우리들은 한결같이 평범하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의 상실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가장 선명한 징표일 수 있다.

아름다움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의 빛나는 얼굴을 놓치게 된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약속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호소하며 이끌어간다.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그것에 의해 자라나며 희망을 키운다.

사진출처=pixabay.com

관상가를 매혹시키는 것은 아름다움이며, 이 아름다움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관상가의 의무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나머지 세계가 더러움, 추함, 그리고 고통 가운데에서도 아름다움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관상에 양분을 주고, 아름다움은 관상의 목표이다. 아름다움은 우리 안에서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에 대한 의식을 자극시킨다. 이 영원에 대한 의식은 우리에게 현재와 과거를 넘어 아름다움이 영원 속에 머무는 늘 계속되고 있는 지금으로 초대한다.

아름다움은 다시 말하자면 일상을 마비시키는 진부함으로부터 삶을 들어올린다. 아름다운 것과의 만남은 우리의 눈을 일상사로부터 들어올리게 하며 우리에게 더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주고 현세적인 것 이상을 향하도록 해주며 현재의 우리 모습 그 이상이 되도록 항상 노력하게 만든다. 투쟁하는 가운데, 심연의 암흑 속에서, 추함의 진통 바로 그 속에서, 아름다움은 그것 자체와 함께 대가가 어떻든지 간에 삶에서 최상이 아름다움이 참으로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가져온다.

아름다움은 보여지는 것을 넘어 우리의 의식을 정상으로 이끌어가며, 일상을 넘어 신비로, 피상적인 것으로부터 끝없이 진실한 것으로 이끌어간다. 아름다움은 고통과 절망 가운데에서 인간의 마음을 지탱시켜 준다. 세계의 둔감함이 평범한 것들에 의해 아무리 마비된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아름다움은 우리의 영혼을 꿰뚫음으로써 값싸고 천박하며 모방적이고 과도하며 잔인한 것에 빠져있는 세계의 추함을 예리하게 파악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이 그 속으로부터 나오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조금이라도 본다는 것은 매우 깊은 영적 체험이다. 그 체험은 늘 우리에게 외친다, “조금 더. 아직도 더 있다”고.

아름다움은 보이는 어떤 것을 사기 위하여 돈을 충분히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그 대상의 질, 깊이, 진실, 조화를 인지하는 충분한 맛을 지니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아름다움은 진실이며 진실은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다” 라고 시인 존 키츠는 쓰고 있다. 어떤 사물은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대로 실제 그렇게 존재할 때 아름답다. 물론 영의 황폐함에 대해서는 치료법들이 있다. 우리는 풍경을 낡은 아이디어들의 고물상으로 만드는 광고판에서 떼어놓을 수 있다. 색깔과 물건들로 장악되고 있는 공간을 깨끗이 치우고 불가능한 것의 영혼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꽃의 질서, 조화, 균형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노동자의 손에서 보여지는 보기 흉한 관절, 나이 든 사람들의 주름살이 보여주는 것 그 밑에 있는 의미를 찾기 위하여 우리 눈을 크게 뜰 수 있다. 또한 모든 순간의 의미, 모든 가능성 속에서 궁극적인 것, 모든 만남 속의 정수를 보기 위하여 노력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 안에서 형성시키지 못하는 것은 우리주변의 세계에도 존재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 아름다운 것을 심지 않으면서 세계의 질적인 상실에 대해 슬퍼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들이 저속한 차원에서 행동하면서 영적인 것의 상실을 비난할 수 없다.

영혼의 충만함을 키우지 않고서 삶의 충만함을 희망할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공부하며 우리주변을 아름다움으로 채워야 한다. 세계의 영혼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우리자신이 반드시 아름다움이 되어야한다.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가 오기 전보다 더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우리가 있었기 때문에.

관상적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혼잡스러움을 밀어내고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에워싸야 하며 그리고 의식적으로, 쉬지 않고 끈질기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작은 세계가 하느님이신 본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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