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단진복] 의로움에 굶주린 사람들 "나에게 주는 빵은 육체적 문제, 이웃에게 주는 빵은 영적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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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단진복] 의로움에 굶주린 사람들 "나에게 주는 빵은 육체적 문제, 이웃에게 주는 빵은 영적인 문제"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7.3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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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14] 옳은 것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되도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예수 그리스도, 마태오 13.43)

"나 자신에게 빵을 주는 것은 육체적인 문제이다. 이웃에게 빵을 주는 것은 영적인 문제이다."
( 니콜라이 베르디예브)

압바 조셉이 압바 롯트에게 와서 말했다: “아버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기도와 단식, 고요함과 묵상을 적절하게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내 상상력을 자제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합니까?” 그러자 압바 롯트가 일어나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뻗치자 마치 손가락들이 불꽃처럼 보이면서 그가 말했다. “원한다면, 당신은 불꽃 자체가 될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말씀)

 

사진출처=pixabay.com

진복판단은 영의 가난에서 슬픔으로 온유함으로 그리고 이제는 의로움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의 단계로 넘어간다.

의로움은 영어 고어, rihtwis에서 오는데, “올바른”(도덕적으로 순수한)과 “현명한”(일을 하는 방식, 태도)을 합친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도덕적이고 비난받지 않는 삶, 하느님과 이웃에게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스어 복음서에 사용되는 말인 dikaoisune는 “의로움, 정의, 정당한 상태”를 의미한다. 참된 행복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각 단어들의 의미는 나름대로 자기 자리를 갖는다.

의로움은 덕으로 무장된 삶을 제시한다(덕은 라틴말로 강함을 의미하는 virtus에서 온다). 덕이 부족하다는 것은 힘이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캔사스에서 돌풍대피 지하실 없이 사는 것과 같다. 회오리바람이 그곳을 강타할 때 대피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덕을 닦는 것은 회오리바람이 아니라 유혹, 수동적이 되고 다른 길을 바라보는 유혹의 공격을 견뎌내기 위하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움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복되도다”라든가, “의로움을 널리 외치는 사람들은 복되도다”하지 않고 “의로움, 옳음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복되도다”하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막에 있는 사람이 물 한 컵을 원하고 피난민 수용소의 아이가 빵 한 조각을 절실하게 원하는 것처럼 옳은 것을 그렇게 절실하고 긴급하게 원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굶주림은 산상수훈을 처음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체험이었다. 그때 가난은 지금도 세계 많은 곳에서 그런 것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네게브 사막이나 시나이의 광야를 건너야 했던 사람들은 너무나 절실하게 한 모금의 물을 원했던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허기로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소수라 해도, 어렸을 때는 굶주림과 갈증을 경험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유를 몹시 먹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울음을 듣지 않고 지나는 일요일이 우리 본당에서는 거의 없었다. 후에 우리는 삶에서 여전히 우리를 똑같이 짓누르는 다른 욕구들과 만나는데, 그러나 이 욕구들은 더 만족시키기가 어렵다. 그것은 지위, 성취, 인정, 소유물에 대한 욕구이며 성적인 주림이다. 그러나 옳음에 대한 허기는 일상적이지 않다. 아마도 사도들의 시대보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 그것을 더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출처=pixabay.com

마태오 복음에 대한 설교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어떤 종류의 의로움인가? 마태오 사가는 덕 전체에 대하여, 혹은 탐욕에 반대되는 특정한 덕을 의미하고 있다.”

남의 것을 몹시 탐내고 선망하는 것은 대부분의 삶을 이끌어 가는 힘이다. 내가 긴급하게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서 나는 얼마나 많은 비참함을 느꼈던가,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 다음으로 급하게 필요한 요구가 문을 열 뿐이다. 이것은 영혼을 파괴시키는 악순환이고 소위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의로움에 대한 굶주림은 그리스도가 축복하는 한 가지 갈망이다. 그것은 소유물을 탐내거나 성취, 인정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동과 인식에 있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다.

15세기에 로마의 주교였던 성 레오는 진복들에 관한 설교에서 비슷한 강조를 하고 있다:

“이 굶주림, 이 갈증이 추구하는 것은 육체에 관한 것도, 지상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의로움이라는 좋은 음식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갈망이며 모든 가장 깊은 신비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고 주님만으로 채워지고자 한다.”

교회의 박사로 인정된 세 명의 교종들 가운데 하나인 성 레오가 그리스도교적 삶의 사회적 측면들과 자선을 크게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라기보다 어떻게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무가치한 욕구들이 많이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게걸스럽게 추구하는 한 남자를 그리고 있다. 닥터 파우스트의 전설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에서 한 악마적인 협상이 이루어져서 한 남자의 그림이 그의 육체 대신에 나이를 먹는다. 이러한 협상은 도리안 그레이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기쁨을 가져오지 않고, 다른 이들에 대한 우월감과 경멸감만 갖다 준다.

때때로 그는 그림이 숨겨져 있는 다락을 방문해서 거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변해버린 초상화가 그의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그레이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와일드의 도덕은 고전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기와 갈증이 우리를 소유하기 전에 그것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도덕이다. 모든 제어되지 않은 열정이나 중독은 꼴사나운 모습이 된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핵심적인 사건은 그의 누이의 아이들이 굶어죽는 것을 막기 위하여 빵 한 덩어리를 훔치는 절망적인 남자의 도둑질이다. 범죄자인 장발장은 선하고 정직한 남자로 일을 찾을 수 없다. 그는 도와주기보다 처벌하기가 더 수월하게 조직된 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사회 질서는 냉혹하고 무정한 수사관 자베르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 이야기의 기반에는 몇 가지 종류의 굶주림이 있다: 가난한 이들을 적대시하는 세계 속에서 아이들이 겪는 긴급한 신체적 굶주림; 그의 조카들의 삶과 안녕을 위하여 애쓰는 장발장의 사랑스러운 굶주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민이 가득 찬 사회질서에 대한 작가의 예언자적인 굶주림, 자신을 옹호할 수 없는 이들의 굶주림을 막기 위하여 아무도 도둑질을 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갈망, 굶주림이다. 참으로 빅토르 위고는 의로움에 대해 굶주리고 목말라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로움에 대한 허기, 굶주림으로 초대한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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