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준법정신만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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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준법정신만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7.3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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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새로운 창조-2

가톨릭 신자들은 종종 구원을, 만약 그들이 착하게 살았고 계명을 잘 지켰다면 죽은 후에 일어날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신약성서에 미래에 있을 구원에 대한 몇가지 언급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복음서와 서간문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구원은 바로 지금 시작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후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오로에게 구원은 경험되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는 구원의 문제를 잘 다루기 위해, 이전에 어떤 어휘로도 표현된 적이 없던 단어들을 써 가면서 아주 많은 방법으로 자기 경험에 대해 썼다. 그는 예를 들면 구원을 묘사하기 위해서 새로운 창조라는 구절을 사용했다. 그는 언젠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중요한 것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갈라디아 6,15).

그는 개종 후에 자신이 예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힘을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이 느꼈다. 그것은 율법의 모든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면서 유대 율법의 정신을 실현시키는 힘이었다. 그것은 율법에 영감을 주었으나 율법 자체 보다 훨씬 위대한 성령의 힘이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들 안에 그러한 성령의 힘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하느님과 교회의 법을 아주 조심스럽게 준수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런식으로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가 않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방법이 아니며, 예수님의 방법도 아니고, 성령의 방법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바오로가 경험했고 글로 써서 알려 주려 했던 방법도 아니다.

종교적인 맥락 속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처음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의아스럽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나는 어렸을 적에 내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을 기억 한다. 나는 물 속에 빠져있지도, 불타는 건물 속에 있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내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오늘날, 어른들은 교회 안에 편안히 앉아서 왜 그렇게 구원에 대해서 야단법석들을 하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그들은 꽤 만족해하며 안전하다고 느낀다. 만약 그들이 종교적 의미에서 구원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도덕적인 법을 잘 준수하면서 안전하다고까지 느낄 것이다. 바다의 웅장함을 본적이 없는 그들은 그저 그들의 꽤나 작은 수영장에 만족해하는 것과 같다.

 

사진출처=pixabay.com

"문자는 사람을 죽이나 성령은 생명을 준다"

바오로에게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의미를 깨닫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원은 계약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왔다. 똑같은 일이 우리 삶에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부모에게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왜 이것은 하면 옳은 것이고, 저것은 하면 안되는 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들의 부모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만을 알고, 그들을 믿고 시키는 대로한다.

그러나 율법은 그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목적지로 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우리들의 부모가 우리에게 주는 규칙들은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수단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성냥을 가지고 놀지 마라”, “길을 건널 때는 양쪽을 다 살펴보아라”. 우리 사회의 법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안전하게, 공평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만일 아무도 교통 신호를 지키지 않거나 사람들이 다 사기치고 도둑질을 한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되겠는가? 법이란 인간의 매우 기본적인 차원에서 생각 할 수 있는 구원에 이르는 일종의 수단이다.

그러나 법이 하는 일은 우리가 문제를 깨닫게 하는 일이다. 법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기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테두리 즉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를 준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그저 법을 지키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친구를 꼭 사귀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꼭 사랑을 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성공해야 하고 무엇을 성취해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당신이 고통을 받을 때 이웃이 당신을 걱정해 줘야 한다는 법이 있는지? 물론, 없다.

인생을 즐겁고 만족스럽게 만드는 일들은 거의 다 합법적인 최소한의 것을 뛰어 넘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인생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은 율법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을 때 가능하다: “문자는(사람을) 죽이나 성령은 생명을 줍니다”(고린토 후서 3,7).

우리의 영적 삶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의 구조는 우리가 계명을 넘어 더 성장하여 더 없는 행복을 찾기 위해서 기본적인 규정을 제공한다. 우리가 하느님 법에 절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서 사는 행복의 축복을 기대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조차도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느님의 법안에서의 삶은, 성령께서 지복의 좀더 철저한 영적 삶으로 부르시는 것을 듣도록 단순히 우리를 자유롭게 할 뿐이다.

율법은 도덕의 시작이지 종결이 아니다

율법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올 수 있고, 어떤 차원에서는 그것이 생명을 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을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것으로 체험하였다. 토라(Torah)는 질서 있는 생활 방법이었으므로 비참한 노예생활보다 훨씬 좋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좋았으며, 아무 의미가 없는 삶보다 훨씬 좋았다. 그들이 모세에게서 받은 율법은, 그들이 비록 이 모든 규율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고 서로서로 존경해야 하는지를 마치 어린애들에게 하듯이 그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률(道德律)” 자체는 내면화된 힘이 되어 선을 행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것은 참된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종종 실패한다. 그런 도덕률은 사람들을 영적 유아기나 도덕적 아동기에 붙들어두는, 그저 외적인 규칙들-“이것을 해라”, “그것은 하지 마라”-로 남는다. 점차적으로 도덕률은 심지어 주어진 목표마저도 파괴한다.

법은 사람들이 서로서로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법을 능가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안정을 주는 대신에 사람들이 강요받지 않고도 기꺼이 하기를 원하는 최상의 것이 된다. 더 풍요로운 삶으로 그들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필요한 내적인 안정을 주는 대신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히 지켜야 할 완고한 윤리기준이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듣지도, 배우지도, 성장하지도 않고 지혜를 구하는 기도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율법만 지키고 그 안에서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결국 도덕률은 하나의 환상이 된다. 율법은 영적성장과 도덕적 성숙의 대체물이 된다. 그것은 당신의 삶을 하느님께 내어놓거나, 당신의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내어놓고 하느님이 당신을 이끄시도록 그분을 신뢰하거나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을 대체해버린다. 이렇기 때문에 종교와 교회가 때때로 성령을 질식시키고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있게 만든다. 율법이 사람들을 살아있는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대화로 초대하지 못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된다.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을 잘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반복해서 유대인의 율법이 그리스도교인의 윤리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율법은 도덕의 시작이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좋은 사람이었고, 아주 훌륭한 유대인이었으나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저 착하게 사는 것 이상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아동기를 벗어나 어른의 단계로 성장하는 것 같았고, 맹목적인 복종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대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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