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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 예수와 초기교회의 동등자 제자직가톨릭일꾼 강의: 그리스도교 여성사-7

 

 

복받아라 내 누이야
복받아라 네가 걷는 길에...
그러니 사뿐사뿐 걸어라 내 누이야
용기 내어 네 노래를 불러라
너는 네 길을 가며 할 말이 있지
별들이 밤길을 비추어 주리니
혹 기운이 빠지더라도
가슴속 노래가 이어지지 못해도
부디 잊지 마라 우리가 기다리리니
다시 힘을 북돋아 주리니
우리가 우리 누이인 너를 축복하나니...

 

가부장제와 여성억압

1983년 시카고에서 열린 여자교회(women-church)회의에서 발표된 마르시 실베스트로의 축복의 노래이다. 여성들은 가부장제가 고착된 사회와 교회 안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신앙을 위해 분투해 왔으며, 그 길은 남자들에 대한 의존과 그들에 의한 통제를 핵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교회문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교회 안에서 여성억압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단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가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거슬러 “모든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다른 것만큼이나 서로 다르며... 본성적으로 노예인 인간은 육체가 영혼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자연적이고 합당한 것처럼” 가부장적 권위에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부장적 지배가 충실하게 행사되지 않으면 가정질서는 물론 국가질서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보면서, 완전한 시민이요 참된 인간은 바로 자유인으로 태어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남성 가장’이라고 말한다.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쳐 개인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이게 가부장제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수정하고 보강했다. 자유인으로 교육받은 ‘유산계층인 (나이 든) 남성’은 완전한 시민이며, 나머지 구성원(여자들, 청년들, 제3세계 국민들, 노동자 계급 등)은 이들의 경제-정치적 삶을 떠받치는 존재들이다.

자유주의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을 낳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은 여전히 사적 영역에서 경제적 정서적 영역을 책임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가사 책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나서야 공적 영역으로 나갈 수 있다.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는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들조차 집안 관리와 자녀양육의 의무를 지고 있다.

가부장제는 공적 남성 분야와 사적 여성 분야를 갈라놓음으로써, 실제와 상관없이 가족들의 생계는 언제나 마치 아버지의 돈벌이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더라도 결혼과 출산을 빌미로 ‘임시직’처럼 여겨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성인 여성들과 소녀들은 세계 노동시간의 3분의 2를 일하면서, 세계 수입의 10분의 1을 받고 있다. 전 세계 여성 소유 재산은 세계 자산의 100분의 1에 미치지 못하며, 세계 문맹 인구의 3분의 2가 여성이다. 그러므로 성차별은 사실상 계급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가부장제에서 자녀는 아버지(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면서, 이 때문에 적출(嫡出)을 보장하기 위해 혼전 여성의 동정성과 기혼 여성의 정조가 엄격하게 강요된다. 여기서 강간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범죄이기 때문에 강력히 처벌된다.

 

By Heinrich Campendonk, 1889-1957

예수의 동등자 제자직

아리스토텔레스식 가부장적 복종형태가 교회 제도화 과정에서 신약성서에도 유입되었다. 아내와 자녀와 종에게 종속과 복종을 요구하는, 이른바 가정규범 본문들은 그리스도교가 당시 유대-그리스-로마의 가부장적 정치철학을 교회 안에 수용하여 교회체제의 안정화를 꾀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들의 삶의 토대였던 가부장적 정신 풍토와 구조를 처음부터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사목서간과 교부들이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발언을 자주 하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 구성원들이 ‘복음의 영향으로로’ 줄곧 가부장제를 거부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basileia)를 부자나 경건자나 지식인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과 창녀들에게 약속하셨다. 예수운동의 이 포용성은 남자도 여자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율법을 엄수하는 사람도 제의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사람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여자들은 탁월하고 신실한 예수의 제자에 속했다. 교부들조차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 중의 사도”라며 예수의 핵심적 증거자요 제자로 인정하고 있다.

예수운동에서 제자직은 자연적 혈연과 가족관계를 파기할 것을 요청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대신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선물로 받았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는 말로 유명해진 마르코 3,31-35에서는 자연적 가족이 집 “밖”에 있고, 새로운 가족이 집 “안”에 있다. 여기서 ‘집’이란 ‘아버지(하느님)의 집’ 곧 제자공동체(교회)이다.

이 새로운 가족관계에는 “아버지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히려 “아버지들”은 뒤에 남겨진 이들에 속한다. “아버지들”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이로써 예수운동은 가부장적 권력과 지위가 폐지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고대 ‘가정’의 가부장적 관계가 더 이상 재생산되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단절된다. 따라서 새로운 가족에 합류한 사람들은 부부관계조차 새로운 내용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기존의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던 어린이/종/여성이 제자공동체 안에서는 제1패러다임이 된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직은 아버지/주인의 자리가 아니라 어린이/종/여성의 자리에서 수행된다. “어린이(종/여성)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르 10,15) 이 말씀은 어린아이 같은 무고함과 순진함에 이르도록 하라는 초대가 아니다. 이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권력과 지배를 행사하는 일체의 권리 주장을 포기하라는 도전이다.

예수의 제자공동체 안에서는 지배구조가 용인되어서는 안 되고, 제자들 가운데 크게 되거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종처럼 처신해야 한다. 그래서 마태오복음 23,8-11에서는 일체의 가부장적 호칭이 거부된다. 동등자 제자직 공동체는 오직 한분의 스승에게서만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선생’이라는 호칭을 거부한다. 그들은 은혜롭고 선하신 한 분 아버지 하느님만이 계시기에 ‘아버지’라는 호칭을 거부한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8-13)

 

St. Paul at his Writing Desk ― Rembrandt van Rijn

바오로 사도와 초기교회의 새로운 가족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으로 한집안이 된 사람들”(갈라 6,10)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자매”로 부른다. 이들은 입양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로마 8,13-17)며, 하느님을 친밀한 가족적 호칭인 ‘압바’라고 부른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3-17)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가족’의 동기들로서, 공동의 식사를 함께 나누고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반겨 인사한다. 회심이란 예컨대 노예들조차 가정교회의 일상적 사귐에서 “사랑 받는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로 드러난다. 바오로는 종이었던 오네시모스를 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필레몬 1,12-17)

회심자들은 세례를 통해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과 가부장적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과 새로운 가족관계에 들어선다. 이전의 신분적 차이들은 이 새로운 공동체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이들은 결혼이나 가정과는 상관없이 세례 안에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 운동의 완전한 구성원이 된다.

갈라디아서 3,28은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기혼자와 미혼자 등 일체의 종교적, 가부장적 신분상 차이에 대한 무효선언처럼 보인다. 즉, 자유인으로 태어난 (유대인) 남성 가장의 종교적 특전과 가부장적 특권을 거부한다. 고대에는 사회적 가부장적 특권이 종교적 특권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오로 이후 교회문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식 가부장적 복종형태가 다시 나타난다.

사목서간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를 가부장 체제의 따라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당대 사회를 주도하던 그리스-로마의 가부장적 기풍에 따라서, 자신이 탁월한 ‘가부장’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지도자의 요건으로 명문화된다.

가정규범들은 가부장적 복종을 재강화함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의 동등자 제자직 기풍이 기존의 가족과 국가의 가부장적 지배를 거부할 동력을 빼앗는다. 이 후기 신약성서 본문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당대의 가부장적 사회에 순응시킴으로써, 이 공동체가 로마제국에 정치적으로 흡수될 길을 열어 놓았다. 더 이상 바닥에서부터 로마제국을 위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아가페와 섬김, 공감과 연대는 결단에 의한 ‘교회의 새로운 실존’을 함축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요청으로 전락되었다. 이제는 평등과 정의가 아니라 복종과 순종이 이 가부장적 기풍에 의해 제도화된다. 이렇게 교회 내 가부장주의는 예수의 복음 설교에서 사회변혁적 동력을 탈취해 버렸다.


[참고서적]
<그리스도교 여성사>, 한스 큉, 분도, 2011
<동등자 제자직-비판적 여성론의 해방 교회론>, 엘사벳 쒸슬러 피오렌자, 분도, 1997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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