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사랑의 혁명, 교종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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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사랑의 혁명, 교종 프란치스코
  • 한상봉
  • 승인 2017.07.2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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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사랑의 혁명-교황 프란치스코의 신학과 영성의 뿌리>, 발터 카스퍼, 분도출판사, 2017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2013년 2월 11일, 교종 베네딕도 16세의 사임선언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것이었다.”고 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위기에 몰린 가톨릭교회의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바티리크스(Vatileaks), 즉 교황의 책상에서 도난당한 문서들이 공개되었고, 무엇보다 바티칸은행의 불법적 운용 혐의가 드러났다.

그뿐 아니다. 가톨릭성직자들의 성추행 사건이 미국, 아일랜드, 벨기에, 독일에서 충격을 일으켰으며, 교회에 중대한 손상을 입혔다. 교회가 이를 감당하기에 어려워보였다. 교회가 영적으로 늙고, 신뢰와 열정도 잃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예언자적 능력은 소멸된 것처럼 보이고, 세상은 세속화되어 교회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

사람들은 늙고 쇠약해 보이는 유럽교회를 벗어나 지구 남반구의 젊은 교회를 주목했다. 그리고 2013년 3월 12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였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가 265대 교황이 되었다. 그는 최초의 비유럽인 교황이었으며,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이었다.

그는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선택해 다시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이름이 곧 향후 교회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 평화로운 사람,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고 보존한 사람이었다”는 게 교종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아아, 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너무도 간절하게 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 말을 곧 실천에 옮겼다. 성 베드로 성당 발코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교황의 영광의 우위성을 드러내는 전통적 상징을 거부했다. 단순한 흰색 수단을 걸치고 주교 시절부터 사용해 온 철제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었다. 장중한 인사말 대신에 “보나 세라!”(Buona sera), “좋은 저녁”이라고 인사하고, 자신을 ‘교황’이 아닌 ‘로마의 주교’로 칭했다.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교종은 그 어떤 개혁보다 ‘복음의 영원한 새로움’을 강조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젊으시고, 새로움의 끝없는 원천”(복음의 기쁨, 11항)이기 때문이다. 교종은 우리가 거듭해서 하느님에 의해 놀라야 하며, 익숙한 것을 벗어나 새롭게 길을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도 늘 새로운 현재였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분명히 밝힌 것처럼 교회 내 개혁을 원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혁명가가 될 생각은 없다. 이제는 쓰지 않는 동전을 완전히 닳고 닳을 때까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겨주는 것처럼 묵은 교회전통과 관행을 계승하지도 않는다. 토머스 모어와 요한 23세 교종의 격언을 빌리자면, “재가 아니라 재 아래서 타고 있는 불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출처=grace-of-god.tumblr.com

신앙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

낡은 교회전통 아래 숨어 있는 복음을 꺼내기 위해 교종은 지금 교회 안에 수북이 쌓인 재를 털고 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랑의 혁명”을 준비한다. 그는 “우리의 내면부터 변화시키는 사랑의 힘에 희망을 걸고 있다.”(복음의 기쁨 88, 288항)

신앙은 “우리의 모든 어두움을 다 몰아낼 수 있는 빛이 아니라 밤중에 우리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이며, 우리의 여정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신앙의 빛, 57항)는 게 베네딕도 교종과 프란치스코 교종의 생각이다. 신앙이 우리 일상을 샅샅이 비추는 강력한 조명등이 아니더라도 바로 앞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비춰주는 등불이라는 표현은 ‘교황군주제’가 풍기는 권력의 냄새가 나지 않아서 싱그럽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사소하고 평범한 행복에 만족하지만 그를 비춰주는 별이라곤 없는 ‘마지막 인간’을 풍자한 적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그 별빛이 바로 ‘하느님의 복음’이다. 그러니 ‘복음화’는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가 된다. 좋은 것은 나누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복음서는 주교들이 모인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놓였다. 복음이 공의회 의장(議長)이라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신앙의 뿌리로 되돌아가는 급진적인 혁신을 생각한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지만, 교회 역시 복음화의 대상이고 보면, 교종이 ‘복음’을 ‘교리’보다 더 많이 이야기하면서 불안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그 복음 한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중심에 ‘자비’가 있다고 여긴다. 그의 주교 문장(紋章)에는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라는 사목표어가 있다. 이는 영국 베네딕도회 수도자 존자 베다가 한 말이다. 교종은 숱한 강론에서 이 말을 반복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 지치지만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데 결코 지치지 않으신다.”(복음의 기쁨, 3항)

시편에선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103,8; 111,4) 예언자 호세아는 늘 당신을 배반하는 백성들에게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했다. 복음서에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5-37)에서 자비로운 하느님과 우리가 행할 자비에 대해 거듭 말한다. 최후의 심판(마태 25,31-45) 때도 자비로운 행위만이 중요하다.

교종은 2013년 7월 25일, 리우데자네이루 청년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상설교와 마태오복음 25장, 이 두 가지로 여러분은 행동기준을 설정하게 될 겁니다. 다른 것을 더 읽을 필요가 없어요.” 자비는 정의를 폐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의를 능가한다. 교종에게 신앙이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는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종은 브라질 주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목활동의 전환과 관련해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사목’은 교회의 모성(母性)을 실행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낳고 젖을 먹이며 키워주고 바로잡아 주고 양육하고 손을 잡고 이끌어 줍니다. ... 그러니까 자비라는 어머니 품을 재발견할 능력이 있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자비가 없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상처받은 이들’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진출처=HuffPost

교회, 자비의 자리

교종에게 교회는 조직적이고 서열이 분명한 제도 이상의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이며, 순례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백성이다.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백성으로 모으신다. 교회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자비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는 모든 이가 환대와 사랑과 용서를 받고 복음의 선한 삶을 살도록 격려를 받는 자리여야 한다.(복음의 기쁨, 111-114항)

그래서 교종은 “교회가 재산을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쓰고 있는가?” 묻는다. 공의회가 끝나기 직전인 1965년 11월 16일, 주교 40명이 로마의 도미틸라 카타콤바에 모여 ‘섬기는 교회, 가난한 교회를 위한’ 이른바 카타콤바 협정에 서명했다. 그후 주교 500명이 이 협정에 서명했다. 그들은 생활방식, 사제 복장, 칭호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노력 등과 관련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여러 의무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최초 서명자 중에는 헬더 카마라 주교와 오스카 로메로 주교도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 ... 이렇게 교회는 ... 현세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범으로 비움과 버림을 널리 전하도록 세워진 것이다. ... 이와 같이 교회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주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함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

이 공의회 이후 1968년 메데인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주교회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사목 원리를 세웠다. 1979년 열린 푸에블라 주교회의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언급이 있었고, 2007년 아파레시다에서 열린 제7차 주교회의 총회는 푸에블라의 결정을 재확인하며 ‘소외된 이를 위한 선택’이라는 사목원리를 덧붙였다.

교종은 이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로 가는 여정 안에 있다. 이 길에서 교종은 ‘성직자들의 영적 세속성’을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끔찍한 유혹으로 지적한다. 재산, 영향력, 특권에 대한 집착, 조직과 계획 혹은 교의와 율법의 안전성 추구, 권위적인 엘리트 의식 또는 빽빽한 일정 때문에 남을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 ‘영적 세속성’이다.

이 도전은 지위가 높거나 낮은 성직자뿐 아니라 교회에 봉사하는 평신도의 생활방식에도 해당된다. 수도자도 마찬가지다. 교종의 기획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다만 복음이 주는 기쁨을 가난한 이들에게서 배우고, 희망을 하느님께 두자는 요청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7년 6-7월호(통권 7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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