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주문이 되지 않으려면..." 최저시급 결정을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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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주문이 되지 않으려면..." 최저시급 결정을 지켜보며
  • 김경집
  • 승인 2017.07.2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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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2016년 최저시급이 6,030원으로 결정되었을 때 두 가지 장면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당시 최저시급을 위한 1차 협상에서 사용자 측에서 제시한 인상액은 ‘무려 30원’이었다. 물론 그건 그저 한번 ‘찔러본’ 섀도우 복싱의 일부였을 것이다. 동결을 외치며 엄살을 피우되 ‘굳이 인상한다면’ 그 정도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는 어깃장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피 말리는 줄다리기 끝에 처음으로 ‘6천 원대’의 최저시급이 탄생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아무리 협상을 위한 첫 번째 ‘공허한 액션’이라 하더라도 그건 예의가 아니다. ‘30원은 줄 테니 그거라도 먹고 떨어지라’는 협박과 다름 아니다. 그게 협상의 기술이라고 하기에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양아치들의 논리다.

협상이라는 게 처음부터 완전한 합의로 결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로의 목적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상대를 제압하거나 심한 엄살로 양보를 최소화할 카드를 내민다. 그런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지점을 찾아낸다. 데이비드 고티어는 <<합의도덕론>>에서 모든 계약은 그렇게 성사되는 것이라며 협상에 의한 최종적 합의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승리나 패배가 아니라 ‘협상을 깨뜨리는 것보다는 협상을 통해 합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지점’에 서로가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료와 실태를 교환할 수 있는 투명한 시스템은 필수적이다. 과연 우리가 그런 기본적 전제나마 실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의 장면은 6천 원대를 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자영업자들이 속출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실직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듯 그렇게 당당하게 협박했다. 그러나 그 이후 그 때문에 가게 문 닫았다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최저시급에 대해서도 그런 엄살과 협박은 여전하다. 그나마 촛불의 힘으로 불의의 정권을 쫓아내고 새 정부를 세웠기에 그나마 한 걸음 더 나아간 것뿐인데도 그런 협박은 여전히 공공연하다. 참 한심하고 웃기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 마음이다

‘최저’ 시급이란 말 그대로 최저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시간 당 ‘최저’ 그만큼의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고 의무다. 물론 시급이 17%가량 올랐으니 물가 상승률이 비해 너무 가파른 상승 아니냐는 투정이나 그렇게 지불하고서는 도저히 영업할 수 없다는 푸념이 나오는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인상분의 절반을 정부가 지원하는 걸 따지면 1천 원도 채 되지 않는 인상의 부담이다. 그리고 그런 시급 때문에 힘든 것보다는 정작 프랜차이즈 본사의 과도한 갑질과 조물주보다 높다는 건물주의 임대료 폭탄에 멍든다. 그런데 그건 쏙 빼고 경총의 논리만 대변하는 언론들을 보면 딱하다. 인상된 시급으로 한 달을 일해도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복음서에 나오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이 시대에 읽어야 할 대목이다.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일꾼을 사고 하루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주기로 한다. 아홉 시쯤 또 나가 같은 조건으로 일꾼을 사 포도밭으로 보낸다. 여기서 우리가 일찍이 눈치 채야 한다. “그가 또 아홉 시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마태 20, 3) 포도밭 주인이 그 시간에 나간 건 꼭 일꾼이 필요해서는 아닌 듯하다. 혹시나 싶어서 나가보니 ‘하는 일 없이’ 즉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본 것이다. 일손이 꼭 필요한 게 아닌데 왜 그는 쓸데없이 사람들을 고용했을까. 그렇게 열두 시, 세 시, 다섯 시쯤에도 장터에 나갔다. 여전히 사람들이 있었고 그는 어김없이 그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물론 같은 임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포도밭 주인이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거기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20, 7) 지금 그들의 모습은 누구인가? 청년들이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 물론 나이 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취업이 전쟁이며 삶 전체가 걸린 대사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절박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일자리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할 수 없이 시급의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혹은 아르바이트로 일단 숨을 넘겨야 한다.

2016년 초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780만 명이 비정규직이었다. 실제의 수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며 1년 반 지난 지금은 그 숫자가 더 늘었을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800백만 명만 잡아도 이미 노동 가능한 인구의 1/4을 훌쩍 넘는다. 결코 정상이 아니다. 비정상이다. 비정상은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삶을 만들 뿐이다. 그런데도 최저시급 인상에 대해 오히려 있는 사람들이 불평하고 수구 언론은 그것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선동을 노골적으로 쏟는다.

포도밭 주인은 늦은 오후 5시쯤에 데려온 이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했다. 그러자 먼저 온 이들이 펄펄 뛴다. 당연하다. 그럴 수 있다.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니 노동의 시간에 따라 지불하는 게 합리적이고 옳다. 그런데 거의 해지기 직전 와서 고작해야 한두 시간 일한 일꾼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다니! 그러나 포도밭 주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 14)

얼핏 보면 독선적인 주인이다. 그리고 얼빠지고 멍청한 주인이다. 그런 식이면 다음에 어느 누가 아침 일찍부터 일하겠느냐 말이다. 단순히 한 데나리온의 하루 품삯을 서로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다. 한 데나리온의 돈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략 5,6만 원쯤 된다니 그것은 바로 일용의 삶을 영위할 최소 비용을 상징하는 것이다.

일찍 포도밭으로 일하러 간 사람은 하루의 일당을 벌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마저 얻을 수 없으니 얼마나 애 닳고 불안했을까. 포도밭 주인은 그 마음을 읽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 마음이다. 나보다 못한 이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공감이다.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고 미사에 꼬박꼬박 참여한다 한들 그 마음을 읽지 못하면 청맹과니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 구절 모르고 미사 참례 못해도 그 마음 지니고 실천하면 그게 진정한 복음의 실천이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고 성경을 읽는 건 바로 그런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그래서 제대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각성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빵을 노략질 하는도다

강자의 횡포와 착취는 늘 있어 왔다. 이른바 산업화의 시기에 그것은 아예 하나의 사회적 방식으로 굳었다. 지금 이만큼 성장한 것도 어느 정도 그런 방식의 산물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방식으로 사회를 꾸려나갈까. 이제는 그 탐욕을 멈춰야 한다. 그러나 갈수록 탐욕은 가속되고 승자독식의 못된 프레임은 더욱 공고해진다. 이건 사는 게 아니다. 그건 복음적 삶이 아니다. 아무리 정당하게 획득한 행복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그것도 나보다 못한 약자의 행복을 담보로 누리는 것이라면 정의로운 게 아니다. 사회가 최저시급의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만 접근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 신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입버릇처럼 입에 달고 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백날 외기만 하면 무엇하는가. 그건 기도가 아니라 주문에 불과하다. 기도는 상품 요구서가 아니다. 삶과 믿음의 고백이며 실천의 약속이다. 아버지의 뜻은 약자를 억누르고 착취하라는 게 아니다. 그들을 일으키고 이 땅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 기도는 그렇게 하겠다는, 그렇게 살겠다는 약속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고 있는가?

단테는 <신곡>에서 “옛날에는 칼을 들고 싸움하기가 일쑤더니/지금엔 여기저기서 그 어지신 아버지가 누구에게도 막지 않으시는 빵을 노략질 하는도다.”라고 한탄했다. 중세가 아닌 21세기 현대는 어떠한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타인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과 예의를 지키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다. 그걸 외면하면 우리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밭을 망칠 뿐이다. 단테는 다시 말한다.

“그러나 너 지우기만 위하며 기록하는 자야,
네가 망치고 있는 포도밭을 위하여 죽으신
베드로와 바오로가 아직도 살아 계심을 생각하라.”(<신곡> 천국편, 130)

그 다음의 말도 기억해야 한다.

“너 좋이 말함직하도다.
홀로 살기를
원하였고 춤 때문에 순교로 끌려갔던
그이에게 굳은 소망을 내 지니길래
고기잡이도 폴로도 ‘나도 모르노라.’라고.”

살로메의 춤 때문에 순교한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피렌체의 금화에는 그 시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의 상이 새겨져 있었기에 그것은 금화 즉 돈에 대한 소망을 상징한다. 돈에만 눈이 멀고 마음이 팔린 건 피렌체 시민들만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고기잡이)와 바오로 사도(폴로)가 과연 우리에게 살아계신가? 최저시급 문제를 바라보며 나는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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