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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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 최영주
  • 승인 2017.07.16 1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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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쌈박한 ‘혁명’이라는 단어가 나를 사로잡는다. ‘유쾌한 혁명’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모순성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느끼기도 했다. 혁명하면 일단 '체게바라, 전태일, 예수’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일평생 불의에 저항했지만 끝은 결코 찬란하지 않았던 비극적인 운명들... 

그렇게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피와 희생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나는 왜 그 비극적이고 우울한 '혁명’에 더 끌리는 걸까. ‘혁명’이 유쾌하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말인가? 반대로 인류는 정말로 그 우울한 희생을 담보하고 비로소 발전한 것일까? 표지를 넘기기 전에 일단 답부터 알고 싶었다.

사진=최영주

물론 유사이래 번식을 거듭해온 인간들이 국가든 이데올로기든 몸집을 어마어마하게 불려 온 건 맞다. 기술적으로도 분명 우린 발전했다. 요샌 유튜브 채널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지구반대편의 익명의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새삼스럽게 감탄한다. 분명 인류는 얼추 진보한 것 같다. 그런데 왜 내 마음이 불편한 걸까. 사유하려는 시민으로서 ‘불평등’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나라들이 지역, 나이. 성별에 있어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뒷받침되어있으니 완전하진 않아도 정치적 불평등은 상당 부분 해소 된 듯하다. 하지만 최근 인류가 당면한 문제는 주지하다시피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이다. 이 불평등이 제공하는 ‘긴장’은 무엇이든 사람을 쉽게 우울하게, 낙담하게, 그리고 대부분 먹고 살만 한 직장을 갖고 살아도 언제든 낙오될지 모른다는 압박 속에서 허덕이게 한다.

이처럼 우리와 같은 개발완료(?)국이 상대적 빈곤, 저출산, 저성장, 경제의 불확실성으로 씨름하는 동안 개발도상국은 오랫동안 절대적 빈곤과 싸워왔다. 

선진국과의 (Fair trade가 아닌) Free Trade로 야기된 비현실적인 임금구조와 다국적 기업들에 의한 ‘세련된 폭력’은 어느 하나 해결될 길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나도 백화점에서 시즌마다 나오는 새로운 나이키 운동화를 뒤적이며 그 세련된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날’이 서있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암묵적 동의와 망각 속에서 살아내야 할 것 같다. 

이런 세계화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알고 나면.. 솔직히 세상이 마냥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국제학 복수 전공자니 더 세밀하게 잘 보여서 미칠 노릇이다.) 특히 여러 군수산업과 유대계 자본으로 대표되는 맘몬(재물신)이 지배하는 국제 정치는.. 최근 들어 더 느끼는 거지만.. 정말 망한 것 같다. 게다가 저자는 미국사람이니 "팍스아메리카"가 "아메리카노 커피"가 되어서 전 세계의 비웃음을 사고 있는 이 현실에 얼마나 개탄해하고 있겠는가? 

더 이상 이러한 약육강식의 국제질서에 희망을 걸 수 없는 저자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집단지성, 시민사회, 공동체와 같은 가치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저자가 살고 있는 미국 내부를 한번 들여다보자. 미국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독려한다는 취지에서 불평등을 오랫동안 방치해왔다. 차별, 배제, 불평등과 같은 긴장감이 침투해 삭막해져버린 마을공동체의 발생 원인은 아마도 근본적으로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사회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이 삭막해진 마을 공동체에 자꾸만 희망을 걸어야하는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럽지 않다고. 만일 그 말이 맞다면 나 역시 앞으로 사람을 각자도생의 무기력한 개인으로서만 바라보지 않고 언제든 대화 가능하고 변화 가능한 주체로서 바라보고 싶다.

저자는 성공적인 대화법이 존재한다고 보고 또 중요시 여긴다. 솔직히 난 성공에세이, 성공신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삼성신화를 떠들어 대던 이건희도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고 있는 판에...) 차라리 금수저 물고 태어난 서울대 교수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제목으로 이른바 '성공힐링' 기술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의 극악무도(?)한 폭력성에 대해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행복을 위한 대화의 원칙’이라는 말들에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저는 사랑을 글로 배웠어요..” 같은 류의. 솔직히 난 관계도 어렵고 대화도 가끔 어려워 한다. 또 그런 내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믿는다. (딴 얘기지만 나와 타인의 관계는 홍상수 영화처럼 되도록 민낯을 다 까발리지 않고 나름의 신비의 영역으로 계속 남겨두고 싶을뿐이다.)

다만 이 책에서 약간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친절과 경청의 가치"에 대해서 계속 힘주어 말하고, 챕터 전체를 할애하여 정치적으로 다른 견해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설득하려 하지말고 우선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들에 꽤 동의하는 편이다. 무조건 설득하려고 돌진하는 사람은 가끔 볼썽사납다. 한때 강준만 교수의 글에 빠져있을 때 "싸가지없는진보가 진보의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설득 수단으로 구구절절 디테일한 정보를 증거로 자꾸 제시하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은 그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적 견해를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방어기제가 더 크게 작동해서 본연의 정치적 견해를 공고히 하기도 한다. 그건 상대가 인격적으로 못나서가 아니고 원래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익숙함에 대한 옹호, 인간을 지탱하는 윤리나 도덕도 사실 그 익숙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현대정치에서 무엇보다도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그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 우선적으로 시급하다고 본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습관적으로 '너'와 '나'의 공통점을 추려내야 한다. 협치라는 말을 함부로 남발하는 뭐뭐당 때문에 사용하기 짜증스럽긴 하지만 협치는 사실상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다.

내면에선 나와의 평화를 찾고 외면에선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꾸준히 대화를 소홀히 하지 않는 힘.. 그것이 바로 내가 꿈꿔온 '사랑이 있는 정의'이고 '정의가있는 사랑' 또 결과적으로 유쾌한 혁명이 될 것이라 믿는다.
 

최영주 율리아
가톨릭일꾼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는
여성신학에 관심이 많은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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