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는 있지만 기도는 없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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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는 있지만 기도는 없는 교회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7.1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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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복음과 사도행전-15 : 루가 복음서의 마리아

기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인격적인 대화로서 종종 사적인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심으로써 개인적인 기도를 하라고 명하셨다(마태오 6,5-6). 예수께서는 종종 밤 중에 혼자 남아 기도를 하시거나 기도하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가시는 등, 자신의 행동을 통해 개인적 기도의 가치를 가르치셨다.

그러나 기도는 또한 공동체적인 것으로, 우리 모두의 아버지께 아들들, 딸들로서 함께 기도 드리는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는 형태를 지닌 것을 보통 공동기도를 통해 처음 알게 되기 때문에 이 공동기도는 중요하다. 우리는 공동기도 모임에 참석해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며, 나중에서야 어렸을 때 모임에서 했던 것을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공동기도의 가장 큰 단점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것처럼 일종의 위선적인 허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도의 핵심인 내적 대화에 들어가지 못하고 단지 기도의 외적인 행위만 할 수 있다. 아주 자주, 개인적인 기도를 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위선적인 기도를 하며 그 결과 그들은 공동 예배에서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노력을 하나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무의식적이라도 그 결과는 같아서, 진부하고, 열의 없고, 반복적인 말들만 무성하고 진정한 기도는 결코 될 수 없다.

진정한 기도는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기도에 성령께서 현존하심으로 그 기도가 생명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마치,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순종하면 성령께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 인간의 영을 넘겨받아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것과 같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하셔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하셔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로마서 8,26-27)

삼위일체 신학에서 우리는 성령이 성부, 성자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주일에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수많은 말을 할 때 보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이 신학적인 사고는 아마도 바오로가 말하는 기도의 경험에서 생긴 것 같다.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모일 때 성령은 바로 서로 주고받는 대화이며, 우리 자신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것은 아버지도 공동체도 아닌 강력한 힘, 즉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그 무엇으로서 그들이 서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강력한 에너지이다. 삼위일체적 생명은 이제 우리들 안에서 우리들을 통해서 반복되고 있다.

이는 취한 듯한 느낌을 받는 경험일 수 있다. 바오로는 어느 공동체에게 술에 취하는 일은 잊어버리고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취기(醉氣)를 경험해 보라고 권한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성시와 성가와 영가를 모두 함께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십시오." (에페소 5,18-20)

내가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바오로의 말씀을 정말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번은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온 여자 75명이 우리집에서 같이 피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방문을 열 때마다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 시간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찬미 할 새로운 이유를 발견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그들이 성령 안에서 계속 노래를 불러 음식이 식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마르타’들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였다. 기도를 하고 있던 그 마리아들은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고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잘 안될 때가 있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도 인정했다. 그러한 때에는 다른 영(靈)이 들어온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소망이나 필요함을 그 단체에 억지로 요구하는 개인주의적인 영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질투심, 분노, 참지못함, 그밖의 어떤 것의 영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목적의식이 없는 일반적인 영일 것이다. 그것은 흥분해서 지나치게 열광하는, 기도가 계속되는데 그 기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영일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공동체가 기도를 할 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자주 언급하였다. “하느님은 혼란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고린토 전서 12,33). 그것은 모든 기도 모임이 바오로가 설명한 형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인들이 ‘하나의 몸’으로 기도할 때 구성원간에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에너지는 하나로 통합된 공동 기도 경험이라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바오로가 염려했던 것은 신자들의 열광을 제어하지 않고 신자석에 앉아 졸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를 원했던 많은 전례학자나 미사 담당 사제들이 걱정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우리의 전례는 너무나 잘 구성되어 있어서 우리는 성령이 폭발하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주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사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 개개인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닐 때 그들은 전례의 형식적인 구조를 메꿀 그 어떤 것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하느님과 대화를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대화와 타인의 사적인 대화를 서로 결합시켜 서로 통하는 공동의 대화라는 경험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사람들의 사적인 삶에서 이런 식의 승복과 지지의 관계가 계속되지 않으면 그들은 공동예배에서도 이런 관계를 함께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로서 기도하려고 모일 때 우리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아버지께서 지시하신 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몸으로서 함께 할 필요가 있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한 노력 없이 전례가 “제대로 되도록” 하려는 것은 밀가루 반죽 없이 빵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의 성찬례는 거기 모여있는 밀알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의 의미와 성령 안에서 다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면 아버지께 봉헌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

너무도 자주 가족 구성원들, 사제관의 사제들, 수녀원의 수녀들, 그리고 수도원의 수도자들까지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대로 이웃을 위해서 정말로 자신들의 생명을 내어놓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속한 작은 공동체의 공동예배에서 무엇을 기념해야 하는지를 경험하지 못한다. 아니면 그들이 그러한 경험을 한다해도 그들은 그것을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개인적 경험에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경험을 미사의 희생과 연결시키지 못한다.

종종 가톨릭 신자들은 소규모 기도 모임을 할 때 타인 앞에서 자기 영혼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지를 못한다. 우리가 우리를 잘 아는 소규모 모임에서조차 우리의 신앙을 내어놓지 못한다면 더 큰 모임에서 우리 신앙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우리가 매일 매일 받는 축복에 대하여 하느님께 소리내어 감사 드리지 못하면 주일에 같이 모일 때 하느님 찬양의 노래를 부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는 마리아의 형상, 성령의 힘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비어있는 동정 상태로 돌아간다. 그 “여인”은 오로지 주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원형이며, 주님 앞에 있는 여성성이다. 그녀는 성령께서 오셔서 기도 중에 있는 공동체에 내리시기를 기다리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형이기도 하다.

“동정”이란 비어있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비움은 그녀의 영광이자 은총이다. 주님께 귀를 기울일 공간을 연 사람은 마르타가 아니라 마리아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글자를 간격없이 써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띄어쓰기를 할 때 의미가 있다.

기도 중에 삶의 초점을 맞춰가지 않으면 바쁘게 산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기도 중에 우리는 삶의 의미 즉, 삶이 갖고 있는 의미와 그 삶이 반드시 가져야 할 의미를 발견한다. 기도를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보여 줄 수 있는 동정녀다운 빈 곳을 만들어 낸다.

기도를 잘하는 유일한 길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다. 성 바오로는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한다(에페서 6,18)고 말씀하신다. 즉,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한다. 동정 마리아,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그런 대화를 하신 분이시다. 동정녀로서 그분은 ‘받아들임’의 표본이시다. 어머니로서 그분은 (어머니의) 풍부한 결실의 모형이시다. 여성성만이 씨앗을 받고 그 씨앗은 그리스도로 육화된다.


[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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