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어둡고 낮은 하늘 끝, 눈 되어 사라지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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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어둡고 낮은 하늘 끝, 눈 되어 사라지던 여인
  • 한상봉
  • 승인 2017.07.1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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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12

눈 오는 산촌

산골 마을엔 밤마다 눈이 소복이 쌓이고, 밤새 처마 끝에 매달렸던 고드름이 아침 햇살과 더불어 땅바닥에 두둑 떨어집니다. 온통 흰빛으로 눈이 부시게 하루를 여는 산골, 오늘 동네 처자들은 오일장에 나가고, 이윽고 군내 버스를 타고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지난 장에는 눈이 많이 내려 읍내엘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용택 시인의 「칠보에 오는 눈」이란 시가 새삼스럽지 않은 일상이 되어 거룩한 파편으로 생각머리를 맑게 헹구어 놓았습니다.

직행버스는 그냥 지나가고 
군내버스만 쉬는 
칠보 정류장에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며 땅에 떨어져 녹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 위에 잔돌들은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검버섯 핀 손등들처럼 차디차게 얼음을 뒤집어쓴다 
그 위에도 눈은 내린다 

주름진 얼굴 같은 양철지붕 아래 
손 대면 양철 녹처럼 부스스 떨어질 것만 같은 얼굴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눈송이들을 건너다보며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린다 
차를 기다려도 차는 저 산모퉁이를 돌아오지 않고 
이따금 눈보라만 하얗게 몰아쳐온다 

때묻은 수건으로 머리와 귀를 싸매고 
보퉁이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 
시꺼먼 실장갑 낀 손으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이 
큰물에 떼밀리고 떼밀려 떠내려온 해묵은 지푸라기들처럼 
기약없이 차를 기다리다 지쳐 
주름진 얼굴들이 하얗게 부서지는가 
손과 얼굴이 조금씩조금씩 눈송이가 되어 
풀풀풀 흩날릴 것만 같은데 
기다리는 차는 오지 않고 눈만, 칠보에 눈만 온다 
"어이,추워,날씨가 사람잡것네 사람잡아,차가 안 올 
랑개비여" 
차부 안으로 들어서며 온몸으로 눈을 털며 둘러보지만 
연탄 난로 하나 없는 낮은 처마 밑 
발 시린 땅바닥까지 
눈송이들이 날아와 시린 땅에 내려앉기가 바쁘게 사라진다 

눈이 내린다 
칠보에 저렇게 오는 눈을 어쩌랴 
이제 이 차부에서는 그 무엇을 기다릴 것도 
더 떠나보낼 것도 더는 없고 어느덧 어둠만 스며든다 
어둠만 흔적없이 찾아와 뽀얀 전등불들을 하나둘 밝힌다 
그 불빛 안으로 눈송이들이 우우 쫓겨 몰려왔다가 
우우 하얗게 쫓겨난다 
차창에 불빛도 없이 직행버스가 한대 체인 소리를 내며 
어두워져오는 눈길을 달려간다 
차는 끝내 오지 않을 모양이다 
눈송이들은 어 눈 위에 떨어지고 
눈송이들이 차디찬 손등에도 떨어져 눈물이 되어 다시 
언다 

할머니 한분이 마지막으로 보퉁이를 끌어안고 
어둡고 낮은 하늘 끝으로 눈이 되어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이 세상은 눈뿐인데 
어쩌랴 저렇게 칠보에 오는 눈을 
칠보가 어쩌랴 

눈이 덮이면 검고 붉은 땅과 집과 나무는 하나의 색깔을 고집하게 됩니다. “우린 언제든지 하나였다”는 잊어버린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듯이 안간힘처럼 눈이 내리곤 합니다. 군내 버스를 기다렸던 마을 사람들은 이내 읍내 나가기를 포기하고, 어느 덧 처마 낮은 누군가의 집으로 몰려가 따뜻한 구들에 엉덩이를 지지며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몇 되지 않는 가구라서 매일 보는 사람들이건만, 아마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통할 것 같은 좁은 울타리지만, 사람이 영물(靈物)인가 이야기는 끝이 없고, 내친김에 그날 밤이 이슥하도록 움막 같은 지붕 아래선 사람들이 옹송그리고 앉아 모두가 하나임을 확인합니다. 바깥 날씨가 칼바람처럼 매서울수록 산촌에는 은근한 정에 푸근히 잠겨듭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여성, 최후의 식민지

삶이란 고독하고 알 수 없는 부조리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산골에서도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다투고 울고 웃으며 이웃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산골에 살아도 산골 밖의 인연들이 떠나지 않아 마음이 어수선한 사람들입니다. 시골 정류장에서 마지막으로 보퉁이를 끌어안고 어둡고 낮은 하늘 끝으로 눈이 되어 사라져 간 할머니처럼, 그렇게 아득히 사라지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 세상이 걸림이고, 이유 없이 투쟁처럼 껄끄러운 인생을 다투어야 하는 운명 때문인지 괜스레 궂은 날씨만 타박합니다.

누구에게나 숙제처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자라고, 불가(佛家)에선 이를 두고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을 풀어 내고,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삶 자체가 고뇌 덩어리라면, 그 삶을 뛰어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언젠가 이런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여성, 최후의 식민지>(C.V. 벨로프 외 지음, 한마당).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억압받는 여성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다 해결된 듯한 그 자리에서조차 여전히 식민지처럼 고통받고 있으리라는 ‘절망’(絶望)의 표현이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다른 문제들도 여지없이 풀릴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쩜 ‘여성’은 우리 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싸잡아 상징하고 있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성이 해탈하고 나서야 만사가 온갖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것 같습니다.

만지면 ‘양철 녹처럼 부스스 떨어질 것만 같은’ 주름진 얼굴들, 낡은 실장갑 사이로 비죽 빠져나온 손가락 같은 고단한 삶이 곧 여성입니다. 장독대 위에 찬물 한 사발 받아 모시고 새벽 찬 공기를 가르고 비손하는 아낙네의 마음처럼 인생은 그렇게 간절하게 애원할 무엇이 있는 것인가요? 아마 이런 아낙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상처입은 얼굴들이 치유될 것입니다.

그 무력하게 상처받는 얼굴들 가운데는 물론 ‘자연’의 얼굴도 끼여 있을 것입니다. 영양제 주사바늘을 꼽고 있는 가로수라 해도 상처받은 물상(物像)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편의와 이익 앞에서 무참하게 얼굴이 패인 자연은 복종과 헌신을 강요받는 여성과 한 가지입니다.

그렇게 인간-남성이 주도하던 정복의 세기에는 일방적으로 여성과 자연이 고난당하고 생존을 위협받았습니다. 누군가 자선 남비처럼 종소리를 울리며 여성 권익과 자연 보호를 외치는 이가 있다면, 이는 면죄부를 기대하는 인간의 치졸하고 약한 심성이 부추기는 것일 뿐, 인간-남성-강자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 어떤 이들은 이제 후천 개벽이 시작되어 남성-강자가 군림하던 양(陽)의 시대는 끝나고, 여성-약자가 군림하는 음(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도 난무합니다. 힘에 의한 우격다짐이 물러나고 만사만인에 대한 연민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랑의 시대, 조화와 공존의 가치가 우위에 서는 상생(相生) 공동체-대동(大同)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선전 선동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포고령이나 선언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면 먼저 그 사람이 새로움을 살아야 합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어머니, 당신의 땅

요즘 시중에 유행하는, 인기있는 종목은 에코 페미니즘입니다. 생태 여성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생태계의 파괴와 여성 멸시의 전통은 같은 궤에 있는 것이며, 생명의 담지자인 여성들만이 자연 생명인 생태계를 위기에서 구원할 메시아로 등장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과연 여성은 생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여성만이 직접 생명을 잉태하고, 몸 속에서 열 달 동안 키우고 출산하여 제 젖으로 먹여 키우는 까닭입니다.

얼마 전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동물원에서 아기가 짐승에 물려 죽을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어머니는 저도 모르게 높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아기를 끌어안았는데, 아버지 되는 사람은 막대기를 찾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태도가 이성적이랄 수도 있겠으나, 생명 앞에서 어머니의 태도는 자못 영웅적입니다.

흔히 인용하듯이, 「출애굽기」에서 갓 태어난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세력은 다름 아니라 한결같이 남성들이었습니다. 파라오와 병사입니다. 그러나 죽을 목숨을 살려 준 사람들은 한결같이 여성들이었습니다. 산파와 어머니와 누이 미리암, 공주와 시녀가 모두 여성입니다. 본성적으로 여성은 생명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여성과 자연을 동렬(同列)로 놓고 이야기를 하는 모양입니다. 지구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 대한 감각을 키워 준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말하면서, 지구의 이름을 ‘가이아’라고 불렀습니다. 가이아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입니다.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겨지는 생태계 문제를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보려는 것은 참 적절한 지혜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더 엄밀히 말하자면, 여성의 문제이든 생태계의 문제이든 단순히 어떤 ‘주의’(主義)로는 해결될 전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파와 모세의 어머니와 미리암, 공주와 시녀처럼 ‘행동하는 지혜’만이 인간과 생태계를 실질적으로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감수성이 요청됩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큰 슬픔이라는 것, 세상에 슬픈 사람 하나 어딘가에서 어깨 들썩이고 있는 한 우리는 그 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슬픔을 아는 자만이 슬픔을 달래 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그 사람이 축복 가운데 있어야 내 영혼도 더불어 축복 안에 있다는 깨달음이 몸 구석구석 감겨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목숨 가진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여성인들 식민지로 남겨 둘 수 있겠습니까? 무참히 베어진 나무인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온 지구 생명을 돌보는 길은 온 지구 생명이 모두 나임을 발견하는 길뿐입니다. 가련한 중생들의 어둡고 낮은 하늘 끝으로 스스로 ‘눈’이 되어 사라져 간 여인. 그래서 이제 다시는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또한 가족만을 고집하지도 않고, 온 우주 생명 전체 안에서 발음(發音)되기를 원하는 여인인 어머니, 당신의 땅에 구원처럼 오기를 고대합니다, 새 천년엔.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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