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우정을 위하여, "예수는 친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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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우정을 위하여, "예수는 친구를 찾고 있다"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7.1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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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24

나는 특히 ‘다른 사람을 동료로서 받아들이기’라는 구절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사랑에 관한 시토 수도자들의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요한 이해는 우정의 역할에 관한 이해이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들을 무한히 다양하게 만들며, 그 중에서 우정은 가장 축복 받은 것 중의 하나이다. 캐시안수도회 이외에 고대 수도자들의 저술들 중에서 이 우정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이다. 그러나 시토 수도자들에게는 이 단어가 가장 활기 넘치는 방법으로 눈에 띄게 나타난다.

우정은 그들에게 인간 구원의 경륜에 속한다. 만일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 차원에서 그들이 소망에 대해 말한다면, 다른 사람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들은 친밀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그들은 구체적으로 성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을 우리에게 다시 요구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우정의 충만함을 기념하도록 허용한다.

최근에 내가 참가한 미국에서 열린 회의에서 성찬례의 복음독서는 요한 15,12-15이었고, 우리 모두가 성서에 대한 나눔을 하기 위해 나이, 피부색, 인종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섞인 소그룹으로 앉았을 때, ‘나는 너를 친구라고 부른다’라는 말의 힘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떻게 하느님이 관계들을 재배치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그리고 혁명과 함께 어떤 교계적 강조도 끝내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길을 사람들을 인도하는지 어떤 주교가 설명하였다. 우리를 친구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선택하신다; 그분은 친구들을 찾고 있다. 이것은 중대한 진술이고, 오늘날 종종 교회와 가족을 동일시하고, 인구의 반 이상이 전통적인 가족 구성원들이 아니며- 필수적으로 어떤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가족의 모델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매우 일상적이 되어버린 때에는 특히 간과되어 버리는 진술인 것이다.

알레드는 신학적이고 영적인 우정의 실체를 매우 강하게 믿었으며 그래서 요한의 유명한 말을 과감하게 바꿔 말하기도 하였다: ‘하느님은 우정이시고 우정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살고 하느님도 그 안에 사신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은 이러한 축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그가 물었을 때, 그는 따뜻하고 친밀한 우정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진출처=crusaderhistory.wordpress.com

수도원의 우정은 그들이 모두 함께 나누었던 한 친구, 그리스도 자신을 공동으로 추구하게 만들었다. 알레드는 우리가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돕기 위해서, 친구이자 형제로서의 그리스도가 그분자신을 인성으로서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는 어떻게 친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가 되는지 알았다. 그는 은총에 의해 형제들 사이의 우정이 그리스도와의 우정에 이르게 되고, 성장하고 심화되는 놀라운 과정을 길게 묘사하였다.

이 우정은, 다른 모든 우정과 같이, 앙드레 루프가 설명한대로, ‘자제, 침묵, 친밀감, 내밀함’을 요구한다. 각자의 중심에 세 번째로서 그리스도가 없다면 두 사람 사이에 영적인 우정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알레드의 메시지의 전부이다. 우정의 모든 양상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계속되며 끝난다.

알레드의 논문인 <영적 우정>은 가장 개인적인 작품으로, 생애 마지막에 쓰여졌다. 그것은 대화의 형식인데, 마치 대수도원장과 세 명의 수도승들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와 같다. 이것은 중세의 대중적인 문학장르의 형식이고 즐겨 읽기 위해 만들었다. 예를 들면, 한 대목에서 알레드는 월터를 놀리고 있다:

"형제여, 이제 와서 내가 세속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상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당신은 왜 홀로 떨어져 있고, 지금은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고, 지금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고, 지금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고, 그리고 불만과 저항의 눈으로 번갈아 십자가를 보고 있는지 설명해 달라."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한 동아리로 집중해 있는데 학생이 와서 문을 두드릴까봐 혹은 태양이 너무나 빨리 지고 있고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 것과 같다. 마치도 영적인 우정에 대한 탐구의 친밀한 나눔을 엿듣는 것 같다. 그것은 알레드가 학창시절부터 중요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주제이다.

비록 수도생활 후반부의 경험이 더욱 더 의미가 있었지만, 그는 40년 전에 첫 번째로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를 읽었고, 그 책은 여전히 그에게 많은 유용한 것을 주었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차원들이 있다: 리보의 그의 수도가족(특히 성가대석의 수도승과 평신도들과의 관계); 시토 수도회의 폭넓은 시야와 일치와 다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그 방법; 베타니아 집의 모범, 친구들인 두 자매들과 그들의 오빠 나자로, 한 지붕 아래 조화롭게 함께 살고 있는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사람들.

알레드는 현명하고 현실적이다. 그는 우정의 단계들, 그 한계들과 어려움들에 관심을 둔다- 우정이 그저 자동적으로 발생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는 우정이 어떻게 유치한 변덕에 의해 생겨날 수 있는지, 어떻게 뜨겁고 차갑게 불어올 수 있는지, 어떻게 촉수처럼 뻗어 나갈 수 있는지 생생하게 적는다.

그는 우정이 어떻게 쓰라리게 변할 수 있는지, 어떻게 물질적 욕구로 바뀔 수 있는지, 어떻게 오해, 미움과 질투에 이를 수 있는지, 그리고 우정은 참으로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하고, 부드럽게 녹여져야 하며, 그리고 어떤 이탈의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전의 친구들도 여전히 특별한 사랑과 충실을 서로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그 유대관계는 결코 중지되지 않아야 하지만, 또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거리를 유지할 권리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정은 깊은 인간의 갈망과 필요를 나타낸다. ‘우정은 둘이 하나로 된 곳에서 마음들과 영들이 서로 얽히는 것이다. 당신의 친구는 당신이 아무것도 보류하지 않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두 번째 자아이다.’‘

친구 없는 사람은 완전히 혼자인 사람이다. 그러나 또다른 자기와 말하는 행복, 안정감 그리고 즐거움은 얼마나 대단한가!... 당신이 감히 당신 가슴의 모든 비밀들을 의탁하는 사람 그리고 당신이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충고를 하는 사람.’ 그러므로 가장 시급한 일은 우정이 굳은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인데, 이 기초는 우정이 닻을 내리고 굳은 뿌리를 내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하느님의 사랑일 수밖에 없다.

"우정의 원천은 사랑,
사랑은 우정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랑이 없는 우정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알레드는 우리에게 이렇게 위대한 찬사를 남겼다:

"참된 우정의 완벽함과 확장은
위대하고 놀라운 행복이다
그 행복은 바로 우리가 다음 생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그분자신과 그분이 높이 들어 올린 창조물 사이에
그분의 창조의 다양한 계층들 사이에,
그리고 그분이 선택한 각각의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각자 다른 사람을 마치 자신처럼 사랑하는
그런 호혜의 우정과 사랑을 분출하고 계신다.
따라서 각자는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기뻐하고,
그렇게 해서 각자의 지복은 모든 이에 의해 나누어지고,
그러한 지복의 총체는 모든 사람의 것이 된다.
이것이 참되고 영원한 우정이며,
여기에 그 시작이 있고
다음 생에 그 정점이 있다.
그리고 만일 그런 호혜적인 우정이 이 세상에 오기 어렵다면
(우정이 우리를 위해 그 너머에 마련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우정을 발견하는 것만큼 자라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또한 사랑의 헌장이 이상으로 정해놓은 것을 실제로 살아낸 리보의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어제 그저께,
수도원 주위를 걸으며,
형제들이 앉아 있는,
마치 사랑의 화환과도 같은,
나는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낙원에 있는 것처럼 감탄하면서
모든 각각의 나무의 잎들과 꽃들과 열매를,
그리고 내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찾을 수 없었고,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고
그 즐거움은 이 세상의 모든 기쁨 위로 날아올랐다.
나는 나의 영이 모든 이들 안으로 빠져 들어감을 느꼈고,
그들의 애정이 내 속으로 다시 흘러 들어옴을 느꼈다,
내가 시편작가의 경구를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보라 형제들이 한데 모여 일치하여 살 때가 얼마나 좋고 얼마나 기쁜지.’"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에스터 드 왈의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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