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 여성혐오주의와 마리아 or 마리아 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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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 여성혐오주의와 마리아 or 마리아 막달레나
  • 한상봉
  • 승인 2017.07.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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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강의: 그리스도교 여성사-4

중세여성의 가정, 정치, 경제적 위치

중세교회는 성직자들과 수사, 수녀들의 금욕적 이상에 의해 규정된 세계였다. ‘동정녀’ 마리아만이 예수의 몸을 만질 수 있었던 것처럼, 독신자만이 그리스도의 현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 신분 서열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결혼하지 않고 사유재산을 포기함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체현하고 있다고 믿어졌다.

이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은 거룩한 성전인 육신을 자녀 출산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요구받았다. 따라서 피임은 ‘출산을 거부하는 쾌락적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낙태 및 영아 유기나 다를 바 없는 죄로 여겨졌다.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발생한 그리스도교의 태도는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 고대세계가 저물면서 육체를 긍정하고 존중한 고대의 극장, 공중목욕탕, 경기장, 투기장 등이 사라진 후, 중세는 육신(특히 여성의 몸)을 영혼의 감옥으로 경멸했다.

그러나 적어도 상류층 여성들은 중세에도 일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메로빙거, 카롤링거, 오토 왕가의 명문거족 출신 여성들은 제국의 퍼스트 레이디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과시하였다. 12세기 후반기까지 남자들은 대부분 읽고 쓸 줄 몰랐으나, 평신도 귀족가문의 여성들은 대체로 남편들보다 교양이 있었다.

이들은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들이 과부 신분일 때는 더욱 그랬다. 과부들은 결혼지참금과 남편의 유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고, 재혼도 자유로이 할 수 있었으며, 왕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 경우였으며, 대부분의 농노 신분의 여성들은 노예는 아니었지만 사회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아무런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교회 내 여성혐오주의

메리 T. 말로운의 <여성과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동정녀->과부->아내’는 여성적 가치의 위계질서였다. 동정녀는 사회계급에서 왕처럼 여겨졌는데, 기준은 육체적 정조였다. 여성에 대한 첫 번째 요구조건은 공적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여성은 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남성의 욕정을 불러일으키고 불협화음과 폭력, 간통과 복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죄였다.

심지어 교회에 가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자칫 ‘신성한 곳의 방화범’이 될 수 있다는 거였다. 여성이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죄로 간주되곤 했는데, 남자들의 세계를 갈망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적당한 활동으로 가장 권장된 것은 바느질이었다. 집에서 손과 눈을 여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심 깊은 여성에게 가장 좋은 장소는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적 감금상태는 여성들에게 소중한 보석처럼 여겨지고, 스스로 자신을 감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수녀들의 온몸을 감추어 둔 수녀복을 보면, 여성들은 이중삼중으로 자신을 숨겨두어야 했다. 그리고 여성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한 가지 치료법은 아버지든, 오빠든, 주교든 누구든지 남성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었다.

또한 여성은 해마다 임신을 하거나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여가를 위한 기회가 없었다. 이런 끝없는 노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완전한 침묵이었다. 여성은 수다쟁이에다 타고난 거짓말쟁이이며, 남의 험담을 일삼고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언제나 징징소리를 해대는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활의 증인으로 선택한 이유는 그녀가 부활에 대해 떠벌이며 소문을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남성 사도들은 부활에 관해 설교했지만, 여성들은 단지 소문을 냈을 뿐이라는 것이다.

 

Mother of the Redeemer and Mother of the faithful. (via authenticfauxhemian)

중세여성의 모델: 성모 마리아

중세 전반에 걸쳐 ‘여성’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이고 풍부한 개념은 두 여성에게서 구체화되었다고 메리 T. 멀로운은 <여성과 그리스도교>에서 전한다. 그들은 동정녀, 여왕, 신부, 수호자로 불리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참회하는 매춘부, 평생 은수자의 삶을 산 속죄자, 남부 프랑스에서는 사도다운 설교가이며 기도하는 관상가의 모범으로 불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다.

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수도자와 성직자들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며, 대중적 학문적으로 뜨거운 신심을 낳았다.

마리아는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로 명명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마리아에 대한 대중적 신심이 시작된 곳은 에페소였는데, 이 지역에 모신(母神) 신앙이 뿌리 깊었기 때문이다. 그 후 첫 일천 년 동안 마리아 이미지는 동방의 전통적 형식으로 남아 있었다. 이는 마치 황제의 어머니인 황후가 세상 법정을 통치하는 것과 같이, 마리아는 천상 법정을 관할하는 위엄 있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간주함을 뜻한다.

이러한 마리아 신심은 처음엔 수도원에 한정되었으며, 한편 마리아의 동정성은 교회의 자아의식의 핵심인 금욕주의와 수도생활을 알리는데 필요했기 때문에 더 강조되었다.

중세에는 기도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과 악마에 대한 그분의 권능, 저주받은 영혼까지 끌어안는 마리아의 돌보심, 나아가 당신 아드님에 대한 영향력 등으로 마리아 신심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대중 속에서 번졌다.

특히 중세교회가 교황을 중심으로 권력화 되고, 신학과 성체성사, 고해성사, 혼인성사 거행으로 더 큰 권한을 성직자들이 행사하게 되면서, 일반 대중(평신도)들은 심판자 하느님과 더 멀어지고, 자신을 고아처럼 느꼈다. 그리스도 역시 성체를 축성하고 죄를 용서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성직자 편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평신도 대중들은 마리아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어졌다. 여기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설교를 통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리아 신심을 요청했다.

“여러분은 사나운 폭풍우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찬란한 별빛에서 눈을 떼지 마십시오. 유혹의 폭풍이 불어 닥치거나 시련이라는 암초에 부딪치면, 별을 바라보며 마리아께 기도 하십시오. 여러분이 교만이나 야망이나, 중상이나 적대감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동요될 때에도 별을 바라보며 마리아께 기도하십시오.

분노나 탐욕이나 욕정이 여러분의 마음이라는 배를 뒤흔들 때에도 마리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지은 엄청난 죄로 인해 마음이 몹시 괴롭거나 ... 우울함과 절망의 깊은 심연이 여러분을 삼켜버리려 할 때에도 마리아께 기도하십시오. ... 그분께서 당신을 붙들고 계시면 당신은 쓰러지지 않을 것이고, 그분께서 당신을 보호하시면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설교 이후 마음이 괴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의 이름을 떠올렸다. 바다의 별이신 마리아가 등장했고, 그 다음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름이 마리아에게 붙여졌다. 황금궁전, 계약의 방주, 죄인들의 피난처,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 등의 이름이 붙여진 마리아는 중재자로서 중세인들의 신심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베르나르도는 ‘물길’이라는 설교에서 마리아의 중재자 역할을 강조했다. 마리아는 은총을 실어나르는 ‘물길’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육화를 통해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오시게 했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은 마리아를 통해 올 것이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첫 기적을 행하도록 한 것도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신비체에서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를 이어주는 ‘목’이었다.

아울러 그리스도가 ‘정의’의 영역에 몰두한다면, 마리아는 심판관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자비’의 영역에 몰두하신다고 보면서, 베르나르도는 “거룩한 여왕을 찬송하라”는 뜻의 <성모찬송>(Salve Regina) 완성해 칭송을 받았다. 중세기에 ‘추방당한 가여운 하와의 자녀’들은 망설임 없이 그들의 생명이자 감미로운 희망이신 ’자비의 어머니‘께 향했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그러나 마리아 신심이 자칫 그리스도의 역할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대 알베르토 등 중세학자들은 마리아 신심이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다른 수준임을 상기시켜야 했다. 하느님께만 드리는 찬미인 흠숭(latria)과 성인들께 드리는 공경(dulia) 사이에 마리아께 드리는 상경(hyperdulia)을 권고했지만, 마리아 신심은 숭배 차원으로 치달았다. 이를 두고 여성주의자들은 “하느님 안에서 여성적인 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여성 안에 온전히 녹아있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덧붙여 대중들은 중세 기사들이 자신의 ‘귀부인’이나 그녀들의 애정을 그리워하며 세속 궁정에서 사용했던 사랑의 언어를 천상 궁전의 여인에게 불러주었다. 이때부터 마리아는 최고의 아름다움과 화려한 꾸밈을 받는 존재로 등장하면서, ‘주님’(Our Lord)에 잘 어울리는 ‘성모님’(Our Lady)이란 호칭이 가장 자주 사용되었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성모찬송과 성탄구유 신심, 묵주기도, 삼종기도 등이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중에 가장 확실한 대중적 기반을 잡은 것이 ‘묵주기도’이다. 묵주기도는 빛의 신비를 포함해 200번의 성모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0세기 무렵 성모송의 초기형태가 마련되면서, 성직자들이 성무일도 때 시편을 낭송하는 것처럼 신자 대중들은 성모송을 암송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죄로 간주된 것을 단속하고 처벌하는 재판소가 되면서, 신적 권위와 비슷하거나 더 우월한 권한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 것은 대중들에게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마리아는 자비와 용서를 가져다주는 신적 존재로 기능해 왔는데, 그 토대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어머니’였다는 점이다. 마리아는 깨끗하고 순결하며 자비롭고 여왕다운 면모를 지닌, 그리고 무엇보다 죄에 물들지 않은 이상적 여인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한 여성에게 그토록 엄청난 영예를 부여했다고 해서, 다른 여성들도 그만큼 존중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 정반대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마리아와 닮았다기보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유사했다. 교회에 필요한 또 다른 모델은 여성의 성(sexuality)에 대해 회개하는 여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20 - Jules Joseph Lefebvre, (1836–1911): The Sorrow of Mary Magdalene

중세여성의 모델: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미지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590년 교황직에 올라 604년에 세상을 떠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로 알려져 있다. 그는 복음서의 몇몇 등장 여성을 잘 혼합해서 참회하는 여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교황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사도적 역할을 거세하고, 성 문제 때문에 영원히 참회하는 여성을 창조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이 만든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는 본래 매춘부였으며 예수께 용서받았다. 루카복음에서 자신의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씻겨드리던 그 여인이며, 마르타의 누이동생 마리아라고 했다. 예술가들이 성화에서 자주 표현하듯이, 숱이 많은 머리와 값비싼 향수병은 그녀의 직업이 매춘부였음을 암시한다.

11세기 무렵부터 마리아 막달레나는 공경을 받기 시작했는데, 7월 22일을 축일로 지정했다. 그녀는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나자로의 누이 마리아와 혼동되기도 했는데, 예수 부활 이후 마리아는 마르타, 나자로와 더불어 팔레스타인에서 설교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내몰려 배를 타고 마르세유에 닿았다고 한다. 여기서 마르타와 나자로는 주교가 되고, 마리아는 ‘라 봄’이라는 동굴에서 죄를 참회하고 깊이 명상하는 은수자로 살았다고 한다.

벌거벗은 몸으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참회하다가 죽어서 어느 성직자에게 발견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림에서 언제나 관능적인 빨강색이나 자주색 옷을 입고, 슬픔에 찬 모습을 잘 표현하려는 듯이 그의 몸은 언제나 비틀려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메리 T. 말로운은 <여성과 그리스도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신심은 중세 수도자들한테 분명 엿보기 좋아하는 이들의 천국과 같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동정 마리아의 모습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동정 마리아가 새로운 하와로 간주되긴 하지만, 그는 막달레나처럼 간음과 같은 현실을 결코 반영해 줄 수 없었다. 사실상 막달레나는 모든 여인이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모든 결혼한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3권, 384-385쪽)


[참고서적]
<그리스도교 여성사>, 한스 큉, 분도, 2011
<여성과 그리스도교>, 메리 T, 말로운, 바오로딸, 2008
<교황의 죄>, 게리 윌스, 중심, 2005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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