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흐 톨스토이, 가난해지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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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흐 톨스토이, 가난해지기도 어렵다
  • 한상봉
  • 승인 2017.07.1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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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
Leo Tolstoy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 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의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안도현, ‘나그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우리가 항상 듣고 읽는 구절이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너무 돈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군, 하며 가볍게 넘기고 싶지만, 성경은 들여다볼수록 너무 단호한 표현이라서 내내 마음이 힘듭니다. 게다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을 접하면 절망에 빠질 수도 있지요. 한번도 큰 돈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도 돈은 요사스런 눈길을 떼지 않는데, 하물며 이미 편안한 삶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신앙이 부족한 이에게 걸림이요, 복음대로 살지 않으면서 편안한 이에겐 재앙입니다. 유대교에서는 물질적 부를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는 그건 기득권자인 권력과 종교가 가르친 거짓말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나마 가톨릭에서는 돈과 물질적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경계하던 복음적 습관이 더러 남아 있으니 다행이지요. 그러나 요즘은 가톨릭교회에서도 ‘성공주의’가 유포되어 다만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야 한다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지요.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부란 별로 없지요. 정당한 부란 합법적인 부일 텐데, 법은 여전히 부자에겐 관대하고 가난한 이들에겐 엄격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대개 불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난이 우리의 부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전>에서 김규항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는 말은 복음을 뒤집는 말이라고. “부자는 원래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교회 다니는 부자는 천국 간다”는 말은 타락한 교회가 하느님을 능멸하는 간교함이라고.

가난은 예수가 제정한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다만 그 가난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므로 예수가 선포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수준 이상의 부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것,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은 이 세상과 인간을 위한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그 지점에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바가 큽니다.

Ilya Yefimovich Repin - Lev Nikolayevich Tolstoy working at the round table, (1891).

러시아의 문학적 종교적 천재, 레흐 톨스토이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윌리암 제임스는 러시아의 작가 가운데 도스토옙스키를 비극적 세계관에서 건져올린 종교적 천재라고 불렀고, 톨스토이를 낙관적 세계관을 가진 종교적 천재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아마도 처지의 불우함과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는 경쾌하게 복음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레흐 톨스토이(1828-1910)는 러시아의 도덕을 대표하며, 그 탁월한 영감으로 수많은 독자를 얻었습니다. 고귀한 귀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난 톨스토이의 생활과 말과 행동은 모두 ‘읽을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죠. 그의 친척들과 벗들도 왕실의 높은 자리에 있었으며,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황제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위치였지요. 그는 러시아 민중을 억누르던 경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에서 혁명적인 말을 글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루소가 프랑스 대혁명에 영감을 주었다면, 톨스토이는 죽은 뒤 7년 뒤에 발생한 러시아대혁명에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지배계급처럼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기막히게 흥청대는 생활을 즐겼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그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는데, 뭔가 유익한 일을 하고 싶은 열망으로 황제의 군대에서 포병장교가 되기도 했지요. 여기서 그는 <유년시대> 등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세바스토폴> 등 전쟁이야기를 담아내었답니다.

그는 투르게네프도 만났는데, 늘 양심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최고의 귀족이었던 신분이 원죄처럼 여겨진 것이지요. 결국 톨스토이는 서른 한 살 때 자기 영지인 야스나야 폴리아나로 되돌아가서, 농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고 경찰이 와서 집을 수색하고 학교를 폐쇄했다고 합니다. 아직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가 되기 전이었던 톨스토이는 이 사실을 알고, 큰 어머니를 통해 황제에게 말을 전합니다. “나는 무장하고 있으므로 다음에 경찰이 또 오면 누구든지 내 집에 발을 들여놓는 첫사람을 쏘아버릴 것이다.”

가난해지기도 어렵다

Tolstoy Leo

그러나 톨스토이는 쉰 줄에 들어서 더 커다란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성적 금욕주의에 대한 각성에서 시작된 전환이 ‘복음’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죠. 이는 곧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닿을 수 없는 길이었으며, 특권계급의 한 구성원이 고민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 곧 그가 지닌 여가와 지식과 힘이라는 모든 장비가 자신이 속한 러시아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소유한 영지를 포기하고 농민처럼 살며, 그가 빼앗은 것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톨스토이 백작의 부인은 자기 남편을 찬미하며 헌신적으로 도운 사람이었지만, 남편이 작가로 머무는 데 만족하는 한도 안에서였지요. 톨스토이가 예언자나 성자가 되기를 바라게 되자, 그녀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 역시 아버지가 자란대로 풍요롭게 상류사회에 진입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도 톨스토이는 가족의 만류에도 혼자서 오막살이로 은퇴하여 농민복을 입고 제 시간을 신발을 깁는 데 보냈습니다. 물론 자기 책의 저작권도 포기하고 누구든지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게 열어놓았습니다. 이른바 카피레프트(copyleft)운동을 처음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가난해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의 반대를 끝까지 막을 수 없었고, 자식들은 재산문제로 서로 싸웠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를 두고 ‘시체 위를 감도는 맹금들’ 같았다고 말하는데, 그는 환멸에 젖어 머슴 한 사람만 데리고 집을 나가서 허름한 농가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러시아 교회를 착취와 미신을 만드는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파문된 상태였죠.

그는 비교적 순수한 채로 복음을 따르던 초기 그리스도교로 돌아가길 갈망했습니다. 또한 정치보다 도덕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톨스토이는 간디에 의해 널리 알려졌던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저항”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완력으로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말과 가르침으로 저항해야 하며, 인내하는 힘과 신념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권력과 기성교회를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어쩌면 톨스토이만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농민이나 노동자, 가난한 대학생이나 문학인이 그리했다면 경찰에게 죽도록 매를 맞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가 유형지 감옥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자기 계급을 버리고 러시아 민중을 보호하는 상징처럼 살았습니다. 전쟁에 반대하고, 정부의 가렴주구에 저항하고, 지주제도를 거부하며, 교회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끝없이 써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톨스토이에게 어떤 어둠의 세력도 감히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죠.

Leo Tolstoy on the road from Moscow to Yasnaya Polyana. (via The Last Days of Leo Tolstoy: Chapter III)

부끄럼 없는 노동

톨스토이가 자신에게 제대로 된 신앙을 가르쳐준 사람이 농민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방황 중에 성직자를 만나고 수도원을 찾아가 보았지만, 법의(法衣)를 몸에 두르거나 고위성직자일수록 진실한 신앙이 있는지 의심스러웠지요. 말은 번질번질하지만 속내는 복음과 딴판으로 보였지요. 진실은 농민들에게서 발견되었습니다. <참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학문이 없는 사람들과 만나 보았다. 그런데 상류층에겐 빈껍데기뿐이었던 신앙이 그들에겐 생활 속에서 입증되고 있었다. 신앙은 그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었다. 신앙으로 일상에서 부딪치는 고난을 극복하고 맨 나중 문제라고 해야 할 죽음마저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가슴에 끌어안는다. ... 그들의 생활태도에서 새삼스럽게 감명을 받았을 때 비로소 나는 번민이 차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톨스토이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돈 강 유역에 살던 떼모뻬이 본다료프라는 농부였습니다. 그는 “그대 이마에 땀을 흘려야 그대의 빵을 얻으리라”는 성경말씀을 제 경험에 견주어 가며 <근면과 무위도식-농민의 승리>라는 책을 썼지요.

“하느님이 사람에게 시킨 일을 요약하면, 두 가지다. 즉 남자는 땀을 흘려 빵을 생산하고, 여자는 고통을 치러 아기를 낳으리라는 것이다. 황후도 아기를 낳으려면 고통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남자들이 하는 일에는 불합리한 변화가 생겼다.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로 나뉘어졌으며, 모든 일 중에 가장 근본적인 일에 해당하는 농업을 오히려 멸시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돈으로 빵을 산다. 돈만 있으면 된다. 그 결과, 하느님이 당부한 일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쓰게 되었다.

들판의 짐승이나 하늘을 나는 새나 물속의 고리들이나 하느님이 시킨 대로 살고 있는데, 교육받고 지식 있다는 인간만이 사명을 회피하고 있다. ... 노동을 외면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랑의 설교는 위선이나 다름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짚신을 신고 매일매일 호미를 손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의무가 생활의 중심이자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말’을 중지했을 때 의식도 중단되거나 후퇴한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본다료프는 한 마디 말도 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 그 사상이며 삶이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확고부동해 보였던 거지요.

여기서 깨달음을 얻은 톨스토이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자랑스럽고 보람된 노동에 대해 말합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쓰레기를 나르거나 뒷간 청소를 하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요 동포에게 그것들을 나르도록 뒷간통과 쓰레기통을 채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허름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고 신발 없는 이들의 옆을 고급 구두를 신고 손님으로 지나가는 것이 부끄럼이며, 외국이나 최근의 일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빵을 먹으면서 빵을 만들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라는 것이지요. “더럽혀진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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