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인색한 용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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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인색한 용서"가 아니다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7.1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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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11]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말 '파나칼레인'(panakalein)은 “위로나 위안을 받는다”의 뜻도 있지만 “동맹 혹은 협조자를 발견한다”라는 뜻도 있다. 또한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뜻도 있다. Panakalein의 의미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간곡히 타이르다 혹은 격려하다”라는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말의 의미는 정신을 흥분시키고 활력을 주는 것이었다. 슬픔의 진복에서 이 단어는 '인색한 용서' 혹은 '조건부 용서'의 정반대 뜻을 의미한다.

무조건의 용서는 탕자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영원히 잃었다고 두려워했던 아버지가 쏟아 붓는 그런 용서이다. 유산 중에 자기 몫을 챙긴 아들은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돈이 떨어졌고 할 수 없이 농장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더부살이를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했다. 마침내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다 상실했으므로 아버지가 종으로라도 받아주기를 기대하였다.

아버지는 멀리서 풀이 죽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뛰어나가 그를 맞이하여 껴안고 입을 맞추며,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며 잔치를 준비하였다. “잃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를 잃었으나 이제 찾았다”(루가 15,24).

이 이야기는 복잡한 드라마이다. 아들은 가족의 부를 많이 축냈고, 오늘 우리 시대보다 가족의 결속이 훨씬 더 강했던 그 시절에 아들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가문에 수치를 끼쳤다. 그는 외로운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었고, 아마도 아직 살았다면 슬퍼했을 어머니도 방치하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떠나서 기뻤을 형도 방치하였다. 우리는 형이 불평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지옥에나 가버려”하고 그는 문을 쾅 닫으며 나가버렸다. 부모가 형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예수는 탕자 아들이 집을 떠나 유산을 낭비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만 간략하게 한다. 우리는 예수의 이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와 비슷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밑바닥까지는 아니더라도 탕자에게서 우리 자신을 본다. 우리가 하는 많은 것들은 낭비 투성이다­. 시간 낭비, 재능 낭비, 기회 낭비이다.

또한 우리는 한번도 집을 떠나지 않고 규칙에 따라 살았던 “착한” 형을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의 기쁨에 전혀 동참하지 않는 그는 몹시 화가 나서 그의 아버지가 동생을 환영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비유에서 “집”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은유인데, 상속할 자리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온갖 방법을 다 해서 집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한편 비유의 아버지는 성부 하느님을 표현하는데, 우리 각자에게 유산인 다양한 선물을 준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집을 떠날 것이나, 누구는 남아서 우리가 집으로, 즉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돌아가는 순간에 우리를 환영해주는 것이다. “참회”는 그리스말 메타노이아(metanoia)를 번역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돌아서는 것, 거꾸로 돌아가기”이다. 하느님의 환영은 우리가 진심으로 참회할 때에 받게 되는 위로이다. 위로는 기쁨의 바구니와 같다. 우리 편의 가장 작고 참회하는 모습조차 거룩한 자비의 홍수를 열어줄 수 있다는 발견이다.


[출처] 짐 포레스트(Jim Forest)가 쓴 <진복의 사다리>(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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