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행동 안에서 형제를 형제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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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행동 안에서 형제를 형제로 느낀다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7.04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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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23

애정을 느끼지 않아도 사랑하라

만일 공동체 삶의 목적이 영혼의 고요 속에서 말씀에 집중하면서 무엇보다도 내적 침묵인 참된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관상적인 현존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라면, 형제들 사이의 나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게릭은 다음의 구절에서 그의 대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의 돌보심의 아름다운 은혜에 의하여, 고독 속에서 우리는 고독의 평화를 간직하지만 거룩한 우애의 위안과 편안함이 부족하지 않다. 아무도 방해하여 소란스럽게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각자 홀로 앉아 침묵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없다: ‘홀로 있는 그에게 화가 있으라, 그를 위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혹은 만일 그가 넘어졌다면 아무도 일으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동료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으나, 군중 속에는 있지 않다.”

여기에 관상 기도를 위한 분위기가 있는데, 서로에게 하느님의 말씀의 통로가 되기를 바라는 공유된 소망으로 발생된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내 자신의 말을 판단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성령께서 그분의 자비로 당신을 통해 그 어떤 적합한 말을 하시든- 모든 말씀 하나하나는 믿음을 쌓아올리고 사랑을 고무시킨다.’ 게릭은 그의 수도승들에게 말씀들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용하기 시작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사적인 대화에서도 나쁜 말을 입술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말씀의 이러한 지속적인, 사랑과 형제애의 임무는 수도승이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일들 중의 하나이며, 그렇게 해서 형제들의 지지가 관상적 삶을 심화시키게 된다. 게릭은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살에 따라 살고, 부분적으로 영에 따라 사는 두 단계에서 살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다른 이들보다도 더 쉬울 것이지만, 그러나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다. ‘애정을 느끼지 않을 때에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참다운 사랑의 힘과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게릭은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 안에서 형제들 사이에 진정으로 당신이 형제임을 보여준다.’

사진출처=heckyeahorderofpreachers.tumblr.com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 속해 있다. 이 두 가지 사랑은 처음에 하느님께서 스스로 이 두 가지 계명을 실천하셨다는 사실로부터 흘러나온다. 아버지는 외아들을 사랑하였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였다. 아버지는 하느님인 아들을 사랑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면서 그분은 그분의 아들인 그의 이웃을 사랑하였다. 

포르드의 요한의 가르침은 이러한 매우 단순한, 그러나 찬란한 본래의 신학적 이해에 기초를 두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가 하고 질문할 때, 대답은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러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화의 중요성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면 우리는 그의 연민과 순명의 사랑을 모방한다. 육화를 통해 그리고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사랑의 분출의 모범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은 다시 한번 성 요한의 복음에서 되풀이되며, 이 사랑의 신학의 중추돌이다.

결속된 사랑

그러면 무엇이 공동체에 수반되어야 하는가? 예루살렘의 공동체처럼 나누는 것, 공동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은 사도행전의 처음 7장에 묘사되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들은 그들에게 그런 중요한 모범이 되었다. 모든 이의 선에 열린다는 것은 또한 하느님께 열려 있다는 징표이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고, 그 이상으로 하느님을 원하는 것이다. 여기 시토 수도자들에게 특별한 영감이 되었던 ‘한 마음과 영혼’이 있다. 포르드의 요한은 그들에 관해 말하였다:

"이 도시(새 예루살렘, 초기 제자들의 공동체)에는 목적의 일치가 분명히 있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말과 같은 마음을 하느님과 서로를 향해 나누었다. 그들의 일치된 마음 때문에 모두가 함께 있고; 그들의 인내 때문에 모두가 한 장소에 있다. 가장 깊은 사랑과 영의 친교 안에 일치하였고, 오랫동안 순종하며 성령을 기다리면서 인내하였다. 사랑에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그 도시에서 이미 멀리 쫓겨나 버렸다..."

알레드는 상호 조화, ‘모든 거룩하고 인간적인 것들 가운데의 완전한 동의’에 대해 말하였다:

"여러분 각자는 여기 오기 전에, 전적으로 여러분의 것인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로 돌아섰고, 하늘로부터 오는 불인 성령을 본다. 성령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보내시고 불붙는 것을 볼 수 있게 하고, 여러분 마음과 영혼에 닿게 하며, 여러분 모두의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한 마음과 한 영혼을 만드셨다."

호이랜드의 길버트는 같은 주제를 이런 말들로 가르쳤다:

"그리고 사랑이 없다면 일치 속에 함께 살수가 없다- 사랑은 그들에게 같은 지붕 아래서 공동의 생활을 하도록 해준다. 사랑의 결속에 순응하는 것 이외에 공동으로 생활한다는 것의 다른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 속에는 이중의 움직임이 있다- 나눔의 사랑과 사랑의 나눔, 두 움직임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만일 분리된다면, 사랑은 행복하지 않다. 왜냐하면 포르드의 볼드윈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사랑은 재화의 나눔뿐만 아니라 사랑 자체의 나눔으로도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떤 본능적인 움직임에 의해
끊임없이 분출하기를 갈망하고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선을 전달한다.
사랑은 누군가를 그 모든 사랑으로 사랑한다;
사랑은 공동으로 가지기를 갈망하고
다른 사람을 동료로서 받아들이며
그리고 그와 소유한 것을 나누기를 원한다.

사랑의 안목 속에서,
선한 모든 것은 더 아름다운 빛으로 빛난다-
사랑은 -적절한 만큼-
공동으로 서로가 가지게 된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에스터 드 왈의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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