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례를 모독하는 우리들의 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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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를 모독하는 우리들의 불의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6.27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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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의 사회적 의미-9

현존하는 세계의 질서, 혹은 무질서는 성찬례가 지향하는 가치관과는 정반대이다. 성찬례는 사랑과 나눔의 성사이지만, 세계의 거의 모든 제도는 탐욕스럽고 착취적이다. 성찬례는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는 서로를 파괴하고 있다. 성찬례는 세계가 하나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세상이다. 성찬례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나 세상은 패권싸움으로 가득하다.

성찬례는 겸손한 하인으로서의 봉사를 추구하지만 국제사회는 거만스러운 지배욕이 판을 치고 있다. 성찬례의 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식사이나, 세상의 빵은 팔고 사는 상품에 불과하다. 성찬례의 이상은 모든 이가 땅을 공평하게 쓸 수 있는 토지제도를 이루고자 하지만, 현재의 국가중심의 체제에서 토지는 지배자들의 독점물이 되고 있다. 성찬례는 인간에게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그러나 국제 관계에서는 권력과 이윤이 최고의 순위에 있다.

한 국가 안에서도 불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세계적 차원의 불의는 더욱 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더 불행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권력을 독점하고 착취하는 지배계층에 있다는 점이다. 성찬례를 거행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땅을 독점하고 자원을 낭비하는 경우도 많다.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들이 역사적으로 또한 오늘날에도 저질러 왔고 또 저질르고 있는 잘못은 너무나 많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도교회들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산재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세계적인 차원의 이 불균형한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할 막대한 책임이 있다. 도덕적이며 구조적인 변혁을 가져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시켜야 하는 것이다. 현재는 국가들의 탐욕을 제어할 수 있는 어떠한 장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의 개발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지금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길들여지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교회는 인간 해방을 위하여 강력한 일꾼이 될 수 있다. 정말로 그렇게 원한다면 교회는 참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찬례의 신학은 전 우주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우리는 전 세계적인 영성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추상적이며 모호한 이상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전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들의 식량, 의류, 교통수단 등 모든 것들이 전 세계 국가들,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먹는 수입식량은 착취된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생산된 것이다. 일치의 성사이기 때문에 성찬례는 또한 전 세계의 정의의 성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이며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 전인류 가족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다시 그 신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찬례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라면 교회들은 해방 활동에 관한 가장 강력한 동맹세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실제로 지진 같은 자연 재난이 일어 났을 때에는 전 세계적인 행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굶주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에도 그러한 전세계적인 의식의 깨우침과 행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의의 문제에 관하여는 아직도 의식이 충분히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언론에서 실상의 아주 작은 부분만 드러내어도 우리느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하니까 말이다. 현재로서는 자선과 시혜적인 행동이 우리가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범위인 것 같다.

인류의 비극은 너무나 급진적으로 악화되어 있어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는 위선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전 세계적인 책임감을 더 이상 게을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수십년 동안 성찬례 공동체는 전 세계적인 차원의 식량 나누기 운동에 참여하거나 추진해야 한다. 그렇다면 식량의 나눔에 이어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있게 될 것이다. 교회 일치 운동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예수의 기도, “그들이 하나되게 하소서”는 오늘날 우리시대와 문제들에 심오한 의미를 던져 줄 것이다.

교회들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에 입각한 전 세계적인 나눔을 위한 의식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재물, 자원, 토지는 모든 사람, 특히 그것들을 필요로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기술의 나눔은 단지 지배자들의 이익 축적을 조장시키기 위하여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같은 주님을 받아 모시는 성찬례는 식량을 생산해 내는 사람들에게 공평한 공산품을 분배하는 같은 식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찬례의 신학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아직도 유아기에 있다. 교회들은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창조적으로 시대에 적절하게 부응해야 한다. 교회들은 전세계적인 삶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작은 이들의 동맹이 되어야 한다. 수도공동체들은 전 세계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헌신하므로써,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서로 연결시키고 소식을 전달하는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는 전 인류의 정의 안에서 일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새로운 교리교육안을 개발해야 한다. 교회사목은 행동의 전략을 필요로 하며 성찬례의 공동체로 하여금 총체적인 해방활동에 참여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격한 싸움과 적극적인 논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성찬례의 식탁은 우리에게 위험을 이겨내도록 요구한다. 많은 믿는 이들에게 십자가가 주어질 것이다.

인간 해방 활동에 투신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하여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는데에 목숨을 바치는 일꾼들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헌신적인 일꾼이 될 수단과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현실 속에서 복음을 살아갈 정치적인 의지가 없다.

성찬례의 공동체는 힘찬 노동과 진정한 나눔 그리고 정의로 가득찬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교회도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하기 시작할 때에 오늘날 현대인들의 심장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 질서를 수호하는 선도자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새로운 경제 질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약속하신 정의와 평화의 궁극적인 왕국을 예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하느님은 빵의 모습과 일의 약속으로 나타나신다. 조각난 자선은 도덕적인 파멸을 가져올 뿐이다. 모든 인간은 살아야 할 권리를 가지며 따러서 자신을 부양할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마하트마 간디)


[출처]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원출처] <하나되어> 1988년 8월(제19호)~1989년 6월(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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