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욜라 이냐시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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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욜라 이냐시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 한상봉
  • 승인 2017.06.2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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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Ignacio de Loyola (1491-1556)

1987년 봄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개봉된 영화가 한 편 있었지요. <미션>입니다. 어느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힘주어 누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난 삼아 그걸 ‘영적 체험’이었다고 말하곤 하는데, 정말 그 때는 “아, 나더러 이 길로 가라는 것이군!” 하였답니다.

영화 <미션>은 1750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 지역에서 일어난 실화를 영화로 담았습니다. 영토 분쟁을 벌이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경계선을 긋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 살아왔던 과라니족이 대량학살 당하는 문제를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과수 폭포 위에 있던 무력한 원주민들을 돌보던 선교사들의 순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때마침 6월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데모 하느라 정신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료들과 ‘제3세계 신학회’라는 써클을 만들어 해방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해였지요.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가브리엘 신부처럼 살고 싶어서 예수회 성소자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고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읽으며 옳거니, 무릎을 치며 열광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책에서나마 만났던 분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 까사스 신부입니다. 1474년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태어나 28세에 오늘날의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가서, 인디오들에 대한 정복자들의 잔혹한 폭력을 고발한 사람입니다. “인디오들의 보호자”라고 불렸던 그는 원주민들에게 인간적인 삶을 되돌려주고자 노력한 사제로서, 해방신학의 원조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예수회는 ‘양심적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영감의 원천이 되곤 하였지요. 물론 모든 예수회원들이 그와 같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다만 창립자인 이냐시오가 세상과 교회를 나누지 않고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도록’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희망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Saint Ignatius Loyola, Claudio Coello

 

나도 성인들처럼

타는 불’이라는 뜻을 가진 이냐시오의 본명은 ‘이니고 호페즈 데 오나즈 이 데 로욜라(Inigo Lopez de Onaz y de Loyola)’입니다. 아주 긴 이름으로 짐작하겠지만, 로욜라 이냐시오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귀족 출신으로, 1491년에 로욜라에 있던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사교육을 받은 그는 멋있고 친절한 궁중 신하였고 군인이었습니다. 싸움이나 노름, 연애 같은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팜플로나 지방에 있는 나바라국(國) 재상의 부하가 되었지요. 그런데 1521년에 이 지역에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포탄에 맞아 다리를 다쳤습니다.

로욜라 성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는 동안 그에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냐시오는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기사들의 사랑을 다룬 소설을 읽고 싶었지만, 마땅한 책이 없어서 집어든 것이 삭센의 루돌프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라지오의 야곱이 쓴 <성인열전>이었습니다. 그는 책을 통해 ‘나도 성인들처럼’ 회개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습니다. 이냐시오는 평생 이러한 성인에 대한 욕구와 세속적인 명예나 부에 대한 욕망 사이에서 영적 투쟁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냐시오는 몸이 회복되자, 환상 속에서 성모님을 뵙고 난 다음 몬세라트에 있는 성모님의 성지로 순례를 떠났으며, 일 년여 동안 만레사 근처에 머물며 때로는 도미니코회 수사와 함께, 또 어떤 때는 극빈자 수용소나 언덕의 동굴 속에서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그가 ‘수련기’라고 불렀던 이 시기에 이냐시오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가 지은 <그리스도를 따름(준주성범)>을 몇 번이고 읽었으며, 매일 무릎을 꿇고 여러 시간씩 기도를 하면서 제 삶을 돌이켜 성찰하곤 했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의혹과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군인출신이었던 이냐시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에 대해 얼마나 갑갑해 하였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는 명쾌한 답을 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의기소침과 우울증뿐이어서 이렇게 소리치곤 했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떤 사람에게서도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이든 약간의 도움이라도 희망할 수 있다면 어떤 수고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어디서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길을 알려 주십시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개 뒤를 쫓아가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예수회 설립과 사도적 봉사

그 무렵 카르도나 강가에서 이냐시오는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화해했다는 개인적인 확신이었으며, 구원에 대한 두려움과 조바심 때문에 자기 죄를 쉴새 없이 고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냐시오는 날마다 행하던 단식을 멈추고, 피가 튀어오를 때까지 채찍으로 제 몸을 매질하던 짓을 그만 두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제 모든 능력을 봉헌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온 이냐시오는 33살의 늦은 나이였지만 더 효과적인 봉사를 위해서 바르셀로나, 알칼라, 살라망카 등지에서 문법, 철학,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군인의 주보이자 만학도의 주보성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한편 이냐시오는 틈틈이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 하느님을 찾아가는 영성수련을 지도했습니다. 아직 학생 신분으로 설익은 지식을 전하다 보니,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는 곤혹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양심은 크게 자극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전환이 시작되었다.

이냐시오는 동냥으로 학비를 마련해서 공부를 계속 하였는데, 교회당국의 입장과 달리 그의 영성수련은 동료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것이어서 1534년에는 그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성당에서 서원까지 하게 됩니다. 이게 실마리가 되어 ‘예수회’(Jesuit)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1537년에는 다른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제서품까지 받았으며, 1940년에는 교황 바오로 3세가 예수회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초대총장이 된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이승을 떠날 때까지 수도회를 이끌었습니다. 초기부터 인도와 일본 등지에 선교사를 파견할 수 있었던 예수회는 이냐시오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110개의 수도원에 천 명 가까운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서는 성매매여성들과 거리의 청년들을 위한 집을 운영하고, 콜레지오 로마노를 설립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레고리안 대학이 됩니다. 그리고 이냐시오는 1609년에 복자품에, 1622년에는 성인품에 오르게 됩니다.

Anagrama del Santísimo Nombre de JESÚS. Compañía de Jesús fundada por san Ignacio de Loyola (siglo XVI), Roma.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이냐시오가 말하는 영성수련은 고요함 안에서 충분히 깨어 있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인격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우리들이 예수와 거침없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분이 바라시는 바를 알아듣도록 하는데, 특히 예수께서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피부로 직접 느끼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무중력의 진공 속에서 사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분은 우리처럼 똑같이 배고픔과 목마름, 더위와 추위, 모욕과 적개심 속에서 일하셨으며, 결국 십자가상에서 고통 속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이냐시오는 예수의 삶과 수난과 죽음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내게 주신 그분의 사랑에 ‘개인적으로’ 응답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개인적으로 결단하고, 고유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예수를 예수처럼 따르라’고 권합니다. “가난한 자가 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부유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모욕을 받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영예보다는 함께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현명하다고 평가받기보다는 어리석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하기를 원해야한다”고 말입니다.

1558년에 확정된 예수회 회헌에서도 수도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먼저 가난해야 하며, 영예로운 자리를 탐하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어두어야 한다고 새기고 있습니다. 회원들은 자신의 부르심에 어울리게 겸손한 자세로 세상과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당신의 동료를 우리 가운데서 개별적으로 찾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전부를 차지하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냐시오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오! 주님, 저의 자유를 모두 드리오니 당신 마음대로 하소서.
저의 생각과 이해력, 저의 모든 의지를 받으소서.
제가 가진 것은 모두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도로 돌려드려
당신께 맡깁니다. 그러하오니, 당신의 뜻대로 처리하소서.
저에게는 오직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함께 주소서.
그러면 저는 충분하게 가져
다른 것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겠다고 결정적인 응답을 한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교와 세속, 기도와 노동, 기쁨과 슬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기회이며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식을 하든 기뻐 날뛰든 모든 게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보는 투명한 창(窓)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냐시오는 세상에 대한 봉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순례자로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를 갈망했습니다.

특히 이냐시오는 그 길에서 ‘순명’을 으뜸가는 미덕으로 보았는데, 예수회 회원들의 탁월한 활동은 바로 순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증해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행동은 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로마 교황에 대한 조건 없는 순명에 따라 인도되었으며, 모든 예수회 회원들은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에 이어 교황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들을 어떠한 곳에 보내든지 그곳으로 간다는 네 번째 서약을 합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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