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시대, 어정쩡한 용서는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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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시대, 어정쩡한 용서는 금물
  • 김경집
  • 승인 2017.06.2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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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처음부터 악당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굳이 맹자의 성선설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사랑을 받고 자랐으면 처음부터 삐뚤어진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란 사람들도 어느 순간 엇나간 길을 갈 수 있다. 그게 나쁜 일이 아니고 게다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주어진 일이라면 뿌듯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며 좋은 뜻으로 일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자신이 손가락질하며 경멸하던 일을 자신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움찔하게 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처음에만 잠깐 그럴 경우가 많지만.

특히 재주와 능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으면 분명 일을 잘 할 것이고 그러면 마땅히 그게 걸맞은 일도 주어질 것이다. 그게 보상일 수도 있고 마땅한 결실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불러 자기 사람으로 쓰는 이도 자신이 하는 일이 나쁘다거나 악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신이야말로 가장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어느 독재자치고 그런 생각하지 않는 이가 드물다. 심지어 자신은 결혼도 포기하고 국가와 결혼했다고 이미지 도색까지 했다. 그렇다고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능력이 있거나 정치적 유연성을 지닌 것도 아니면서.

그림출처=한겨레 그림판

확증편향 넘어 리플리증후군에 접어든 사람들

그런 정권에 차출(?)된 이들이 보여준 민낯이 지난해 말부터 그대로 드러났다. 대학교수였던 자들이 정부의 장차관이 되고 수석비서관이 되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 어느 언론인 출신은 언론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데에 앞장섰다. 광고영화 감독이었던 자는 전지전능했고 소년등과를 자랑하던 자는 민정수석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유신헌법에도 참가했고 지역감정을 극악스럽게 조장했던 비서실장이라는 자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충성을 다한다면서 시민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데에 몰두했다. 드러난 자들만 해도 열거하기 숨차다.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잔챙이(?)들까지 챙긴다면 일일이 따지기도 버겁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아부와 아첨을 일삼으며 권력자의 눈에 들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자리 꿰차고는 호가호위 위세 부린 자들도 있겠지만. 분명히 ‘이건 아닌데’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맛본 권력의 맛은 그 자리를 의연하게 박차고 나오게 하지 못했다. 그랬을 때 인간은 자신의 합리화를 좇는다. 이른바 인지부조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확증편향으로 내달리게 되고 급기야는 리플리증후군에 빠진다. 대통령이던 자와 그 곁에 빌붙어 악행 일삼던 자들이 모두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하는 건 ‘비겁한 변명’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이 이미 확증편향을 넘어 리플리증후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줄 뿐이다.

다행히 악의 무리들은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에 의해 끝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졌다. 그리고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밑 잔챙이들(그러나 이들이야말로 가장 교활한 실세들이며 온갖 이익을 추구하고 구가했던 자들인 경우가 많다)은 잠깐 숨죽이며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었으니 사람만 교체하면 그것으로 족하고 그 기회주의자들의 능력(?)을 박탈하고 외면하기에는 재능이 아깝다 여기는 경향이 있다. 친일매국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이후 그러한 흑역사는 되풀이해왔고 더욱 더 교묘하게 이어졌다.

그들의 악행을 잊을 수 없다

참회하며 용서를 청할 때는 그 죄를 감해줄 수는 있지만 면죄나 사면은 그들의 몫일 수 없다. 무엇보다 그들의 악행을 잊으면 안 된다. 부지런한 악의 세력은 언제든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다. 그 악당들의 백서를 마련해야 한다. 부역자는 철저하게 색출하여 발본색원해야 한다. 그 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마땅히 자신의 죄업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그런 자들은 이제 ‘희귀동물’이 아닌가. 그들이 저지른 패악을 일일이 파헤쳐 기록해야 한다.

<승정원일기>를 읽다보면 지나치다 싶은 만큼 꼼꼼한 기록으로 가득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큰 얼개와 흐름만 적었다. 그래서 상소문이 올라오면 그 개략적 내용과 대표인물만 기록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는 전문과 더불어 연서한 상소인 명단 모두를 빼곡하게 적었다. 그 숫자가 1천 명이 넘더라도 빼놓지 않고 모두 적었다. 조선은 그랬던 나라였다. 그 힘으로 그나마 6백년 가깝게 버틴 왕조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과연 그런 전통과 가치가 지켜지고 있는가?

종교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길러내는 영역이다. 그래서 너무 쉽게(?) 용서하고 감싸주며 다시 기회를 준다. 의화시키지 못하고 용서하는 것은 나의 불편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악의 세력과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니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정의는 불의를 교화시키고 정의를 따르게 했을 때 힘과 가치를 갖는다.

부끄러운 주교들의 아첨과 비겁함

복음은 정의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불의에 대해 준엄하게 질책하고 저주하고 있는 대목들을 얼마나 겹겹이 두르고 있는지 돌아보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껏 ‘세상에 죄 없는 이가 어디 있느냐’며 “죄 없는 이가 돌을 던질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성직자들, 특히 고위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불의가 자행되고 약자가 억압되며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하던 대주교나 주교들이 과연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이 그토록 책망하던 사두가이들이 아닌가. 그들이 보여준 비겁과 아첨을 신자들이 기억해야 한다. 부끄러워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을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6, 4)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단단히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 16, 6)

어설픈 승리감(?)에 도취하면 안 된다. 어정쩡한 용서와 화해에 기웃거리지 말아야 한다.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해야 한다. 기록해야 한다. 높은 자리 차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치부하며 심지어 사회와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자들과 그들의 악행을 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고 사회가 변하면서 어설프게 화해와 통합만 강조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부역자들의 청산이다. 우리 모두 백서를 만들어 그자들을 기억하고 감시하며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사회도 교회도.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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