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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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 한상봉
  • 승인 2017.06.2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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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9

아내는 출타중

경북 상주시 모동면, 저희 임시 거처입니다. 마땅히 농사 지을 터를 찾지 못해 당분간 머물기로 작정하였는데, 얼마 후면 전북 무주에 터를 얻어 가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지금 출타중. 포도밭에 품을 팔러 나갔습니다. 추석이 오기 전, 지금이 포도 농사 짓는 사람들에겐 가장 바쁜 한철입니다. 그리고 저는 책상머리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겠지요. 막말로 아내는 돈 벌러 가고, 남편은 집안에서 어찌 보면 소일거리를 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여긴 바야흐로 농촌이니까, 이게 빈말이 아닐 겁니다. 예전엔 시골 남자들 일이라 해야, 모내기가 끝나면 뒷짐 쥐고 논둑에 물꼬 보러 다니는 게 고작이었다지만, 요즘 농촌은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수시로 때때로 논밭, 과수원, 비닐 하우스 일로 정신없이 일합니다. 살림 형편과 상관없이 밭에선 누구나 일꾼입니다. 흙투성이 작업복에 얼룩진 땟자국이 그들의 ‘평등한’ 훈장입니다. 그러니 제 신세는 보잘것이 없습니다. 여기선 바깥일을 해야 사람 소리 듣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아내만이 사람 소리 들을 자격이 있는 셈입니다.

농촌에선 여자에게 ‘연약한’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아침 나절, 품일을 나서는 아낙네들이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와 함께 화물차 뒤칸에 우르르 올라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평생을 화물칸 신세처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살아왔을 우리의 어머니들, 그러나 이네들은 곤혹스런 삶에도 끝내 주눅 들지 않습니다. 주눅 들지 않고 봄 나무를 기다리는 겨울 나무들처럼 메마른 가지 같은 살결을 훑어 내리면서 노동과 휴식이 어우러지는 신명(神明)을 탐하고 있습니다.

사진=한상봉

하느님은 농부

얼마 전 우리 지역의 화령성당에 입석이 하나 세워졌습니다. 성당 현판 대신에 세운 큰 돌입니다. 앞면엔 ‘천주교 화령성당’이라고 적혀 있고, 뒤에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 1)라고 씌어 있었지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라는 예수의 진언(眞言) 가운데 일부입니다. 포도 농사가 주업인 이 지역에 매우 적절한 성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스개로 신부님께 여쭈어 봤지요. “그럼, 어머니는요?” 기분 좋게 웃던 신부님은 “글쎄, 농녀(農女)는 어때?” 하십니다. 한자말이 희한해서 “하느님은 농부(農夫/婦)이시다” 하여도 좋을 듯합니다.

제가 귀농―제 말뜻대로 한다면 ‘입농’(入農)입니다. 처음 농사일에 입문한다는 뜻이지요―을 하겠다고 작심했을 때, 주변에서 물어 보는 첫 마디는 “부인도 찬성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시골 생활에선 여자들 고생이 막심하기 때문이겠지요. 밭일은 여자들의 몫이고, 밭일이야말로 기계를 댈 수도 없는 손노동을 많이 필요로 하는 까닭에, 농촌의 아낙네들은 이른 나이에 벌써 손마디가 나무 등걸처럼 불거져 나오기 때문이죠. 깊이 패인 밭고랑만큼이나 거칠어진 피부를 좋아할 요즘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둘러보면, 대체로 아내의 반대로 귀농을 늦추거나 포기하는 가장도 많다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무자식이 상팔자임을 믿는 탓인지 저는 아직 아이가 없고, 교육 문제로 얽매이지도 않은 홀가분한 편입니다만, 도리어 아내보다 제가 더 주저하던 귀농이었습니다. 그만큼 제 일이 서울에 많이 매이고 의존하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아내의 결단과 나의 동의가 우리 몸을 김제로, 예천으로, 상주로, 무주로 떠밀고 다녔던 것입니다. 잔 다르크처럼 여성이 앞장설 때, 드라클로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 같은 광경은 드문 만큼 눈물겹게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이 농부(‘農婦’)라는 말이 여기선 더 적절합니다. 요한복음을 좀더 읽어 보면 뜻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요한 15,4)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15,6)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15,9)

하느님은 농부이면서 어머니이면서 또한 흙입니다. 하느님은 온갖 작물과 목숨들을 보살피고 계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농부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생명을 몸에 품고, 생명을 낳고, 생명이 그 받은 바 천명(天命)을 다 이루도록 키워 주십니다. 흙이 바로 그런 생명의 씨앗을 받아 주고 움트게 하며 잎이 무성하도록 양분을 제공해 주는 거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네들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농부와 어머니와 흙은 자기 존재를 바랄 바 없이 은혜로 내어 주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상징이 됩니다. 따라서 그 사랑으로부터, 그 하느님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간 목숨은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운 노릇이 아닐는지요.

사진출처=pixabay.com

한의 사제인 여성

그렇듯 진정한 어머니는 자기 자녀에 대한 무상적 사랑을 훌쩍 뛰어넘어, 그 사랑을 주변으로, 마침내 우주로까지 확장시킵니다. 그 마음이 참마음이기에, 그 마음이 하늘에 맞닿아 있기에, 그 하늘이 땅과 어우러지는 가운데 ‘사제’(司祭)가 발생합니다. 집단적으로 ‘사제인 여성’이 발생하는 거지요. 흙의 전사들, 생명의 제관(祭官)이 등장합니다.

우리 전통 속에서는 우선 ‘무당’(巫堂)의 모습 속에서 이런 사제인 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성은 한 마디로 가부장 사회의 피해자요 희생양으로서, ‘서러운’ 생애를 감당해야 했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동시에 한(恨)의 치유자이기도 하지요. 여성은 그 자신이 한의 긴 동굴과 서러움의 수렁을 빠져나와야 남의 병을 고치는 의무(醫巫)가 됩니다.

"한에 들고 서러움에 집혔다가, 그리고 억울함에 실리고, 원통함에 씌어서는 아주 주눅이 들고 뭉크러졌던 사람, 그런데도 허물어진 과육(果肉)을 뚫고 과핵(果核) 속의 움이 트듯이 새 기운 얻어 삶을 향해 되짚고 돌아선 사람. 돌아서도 혼자 돌아서는 것이 아니고 한 맺힌 사람들과 더불어 돌아서는 사람, 그가 바로 무당이다."

여성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인간 관계가 파탄 나고, 경제적으로 빈곤에 시달리며,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채 살아가고, 인격적으로 멸시당해 온 나날들이 그네들의 몸을 둘러싼 조건이며, 그러하기에 그네들의 처지를 뒤집는 것이 곧 혁명이요, 미래의 바람직한 청사진이 될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살았다”는 말이 뭇 여인들의 푸념이고 보면, 이승의 아주 그늘진 응달, 이승의 끝인 듯한 막다른 골짝, 그런 곳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가 흔한 여인들이야말로, 중음신처럼 세상이라는 죽음의 골짜기를 불안스레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 줄 사람들이 될지도 모릅니다.

자매애가 넘치는 세상, 다시는 억압과 비탄, 소외와 불평등이 자리 잡지 못하는 세상, 요한묵시록의 진언대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이 말끔히 씻겨 나가고,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나라,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려 다시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 그들의 손으로 우리 인류에게 주어질지도 모를 노릇입니다.(요한묵시록 21,4 참고) 여인들에겐 그들이 당한 고난만큼이나 그 고난 속에서도 모진 목숨을 지켜 나갈 생명력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보기 싫은 젖통

자매애의 출발은 ‘어머니’에게서 원천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에 무의 바람이 분다>(분도출판사, 1996)라는 책에서 오시다 시게토 신부는 어머니를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비교적 늦게까지 잠자리의 오줌싸개였던 자신에게 “오줌을 싸다니!” 하고 화를 낸 적이 없으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돌보심 안에서 보살의 모습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오시다 신부의 어머니의 유방은 언제나 축 늘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보기 싫은 젖퉁이야, 엄마의 젖은.”
“너희가 빨았기 때문이지.”

싱긋 웃고 마는 어머니. 자식들이 “그래도 더럽잖아” 하지만 어머니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모성(母性)은 인류를 살리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창조적 힘입니다. 그 모성이 특히 가련한 인생들에게 넓혀졌을 때, 거기서 하느님이 ‘발생’합니다. 단지 어머니가 아니라 그분이 드러나신다는 뜻이지요. 그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연거푸 부활하신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여기에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31-46 참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던 예수. 그렇게 자신이 제 몸을 타인에게 먹이로 내어 주는 삶이 곧 모성입니다. 그러므로 수난 직전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빵을 나눠 주며 하셨다는 “이것은 내 몸이요, 받아먹으시오”라는 말은 인류 앞에 던져진 하나의 큰 ‘공안’(公案)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선 이 말 한 마디의 현묘한 뜻을 제대로 새기는 게 신학의 요체이며, 이 말을 따라 사는 게 신앙의 요체입니다.

제 목숨보다 귀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 목숨을 만인을 위해, 또는 구체적인 눈앞의 가련한 중생 하나를 위해 내어 놓는다는 것은 ‘사랑’이란 말을 추상화시키지 않은 유일한 방부제가 됩니다. 감히 ‘예’ 할 수 있는 경우를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만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를 예외로 한다면, 대부분 ‘어머니’들에게서 간단없이 접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망자가 생겼지요. 그래 그 벌로 다른 세 사람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판국이었습니다. 되는 대로 세 사람이 불려 나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울고 있자, 콜베 신부가 이유를 물으니, “실은 나에겐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콜베 신부는 담당자에게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을 대신해도 됩니까?”

콜베 신부는 그 사람 대신 나서서, 따로 만들어진 죽음의 방에 끌려가 아사형(餓死刑)으로 죽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남아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운명하는 것을 돌보아 주고 신부 자신도 죽습니다.

자녀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차라리 애처롭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확실히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죽을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는다 해도,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삶은 불안합니다. 결정적으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랑을 느껴 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의 ‘애정 결핍’은 평생 어느 것으로도 보상할 길이 없는 거지요. 제 나이에 받아야 할 사랑의 층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젖을 먹여야 할 때, 밥을 먹인들 아이가 온전하겠습니까? 젖을 먹일 나이엔 젖을, 밥을 먹일 나이엔 밥을 줘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삶의 곤란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 아이가 앵벌이로 나설지 누가 알겠습니까? 고아원을 나와서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하면서 밤마다 대학로를 휩쓰는 오토바이 폭주족 속에 끼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가련한 영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모성입니다. 그러니 이 가련한 자식을 위해 제 살을 발라 자식의 살을 입히고, 제 뼈를 깎아 자식의 뼈를 세울 수 있는 존재, 그건 어머니뿐입니다. 어머니처럼 “이는 내 몸이다. 받아 먹어라” 하고 말할 수 있는 영혼은 복됩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성자가 된 늙은 창녀

난데없는 곳에서 구원된 여성을 노래한 이도 있습니다. 참으로 당혹스러운 송기원의 시편입니다. 언젠가 <늙은 창녀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극인 양희경 씨가 모노 드라마로 상연한 적도 있는 내용인데, 그 중 「살붙이」라는 시는 ‘구원’의 절창(絶唱)입니다.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땜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요즘이야 직업 여성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매매춘에 나서는 여성의 성격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에서도 뻔질나게 등장하는 예전 창녀들은 그야말로 기구한 이력을 가진 소외 계층이었습니다. 더구나 남자 송기원이 자신과 동일시했던 여자인 창녀는 늙은 여인이었습니다. 언뜻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구역질을 삼키게 만들 것 같은 늙은 창녀, 어쩌면 양희경의 쟁쟁한 목소리와 사뭇 달리 허스키하고 메마른 목소리를 가졌을 공산이 더 큰 늙은 창녀에게도 남에게 줄 수 있는 것, 더 정확히, 팔 수 있는 것은 몸뿐입니다.

그러니 더욱 박복한 팔자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창녀는 세상이 낳은 선입견을 단번에 뛰어넘는 발언을 토합니다.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늙은 창녀를 사는 사내의 신세라면 오죽하겠는가? 어쩌면 공사판을 굴러먹다 마누라도 어디론가 도망 쳐 버리고 자식 새끼들은 고아원에 맡겨 둔 지 오래인 어느 박복한 사내의 움츠린 어깨가 방문 끝을 쓸며 몸을 드밀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내의 머리를 끌어안아 주고픈 창녀. 여기선 매춘부와 손님의 관계가 사라지고, 숱한 세월을 폭풍한설 속에서 견디며, 인생이란 단지 견디는 것, 이라고 세상이 가르쳐 주는 대로 살아온 오누이가 만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쩜 어미가 제 살붙이를 부여안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생애의 밑바닥에서 연꽃을 피워 올리는 심경으로, 시방 모진 목숨들 모두가 하나인 생명이라는 깨달음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길가에서 누굴 만난들…… 필시 ‘아무나’는 아닐 법도 합니다. 저처럼 궁색함을 태우고 있는, 서늘한 눈매지만 욕처럼 곤혹스런 목숨 줄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언제나 살붙이의 표정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남 같지 않은 사람들의 속내를 이미 가늠하고 있는 창녀의 얼굴은 여기서 어쩜 관세음보살의 거룩한 표정으로 뜨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혹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날도 저물었으니 여기서 이 밤을 쉬어 가시라고.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분께 하룻밤을 묵어 가시라고 청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루카 24,13-35 참고) 결국 그 밤중에 제자들은 그분이 사흘 전에 죽었던 예수였음을 뒤늦게 발견하지 않던가요. 그날도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렸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이 밤을 쉬어 가시지요

이 땅의 여성들이 한에 겨워 밤새 뒤척이는 사연은 이 세상 가련한 인생들이 잠 못 이루는 연고(緣故)입니다. 이 여성들이 마찬가지로 상처입은 남성들을 초대합니다. 세상의 모든 연약한 목숨을 더불어 끌어안고 보듬어 주도록 요청하는 초대입니다. 깊어 가는 가을밤 새워 가며 낙엽 지는 속사정을 귀담아 들어 주고, 새벽 먼동이 트도록 안아 줄 손길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비로소 참으로 새벽을 열어 주는 힘이 됩니다.

가톨릭 성가 중에 「엠마우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성염 님이 붙인 가사는 그 곡조만큼 애달프고 간절합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을 이 집에 모셔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얘기마저 하시며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우리와 한 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듯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누군들 이런 간청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실제로 손 내밀어 거친 음식과 남루한 중생의 일상에 파고들 위인은 그리 많지 않을 듯싶습니다. 우린 너무 바쁩니다. 발길을 멈춰 딴청 부릴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사실상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면서, 이 초대에 응해야 할 또 다른 얼굴의 그리스도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바쁜 나머지 노래를 부르지도, 한 밤을 쉬어 갈 줄도 모릅니다. 그런 까닭인가요, 절간이며 예배당은 흔히 여성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저녁 늦도록 장터에서 생선을 팔고 나서,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고 철야 기도를 나가는 여인네들. 술 취해 곤히 쓰러져 자는 남편의 머리맡에서 촛불에 기대어 묵주 기도를 바치는 아내들, 엎어 놓은 항아리 위에 냉수 한 그릇에 초 한 자루를 받쳐 놓고 신새벽에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들이 그나마 기우는 세상을 붙들고 있습니다.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날마다 밤마다 생목숨 앗아 가는 전쟁터 같은 이 세상에서 쉴 자리를 마련해 놓고, 날마다 밤마다 발원(發願)하는 여인이 속으로 응얼거리는 그 기도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남성들은 복됩니다.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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