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수도원은 평화와 연민의 거처
상태바
[시토회] 수도원은 평화와 연민의 거처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6.21 01:1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22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히 올바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그 뿌리에 계셔야 한다.
아무도 이웃을 완전히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 안에서 그가 이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한.
그리고 아무도 하느님 안에서 동료인간들을 사랑할 수 없다,
그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분 안에서, 우리의 이웃을 또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르드는 연결시킨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두 계명을 가지고 있다고. 영적 체험은 베르나르드에게 하느님 안에 있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통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적체험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나아가는 길이다. 가장 위대한 관상적 선물들, 하느님과의 가장 깊은 개인적인 친교까지도 공동체라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체생활로, ‘형제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이어지도록 회칙에서 규정되고 있다.

공동체 의식은 자아를 발견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개인은 발견하지 못하였던 세계에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태어나서부터 모든 사람들은 가족, 마을이나 읍내, 인근 지방과 더 넓은 지역, 노동자들의 조합, 학생들의 단체들, 수도 공동체,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전체 지체인 교회라는 더 거대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르나르드가 ‘타인들을 위한 진실하고 심오하고 보편적이고 초자연적인 사랑’에 대해 말했을 때 이것은 전혀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나왔다. 시토 수도자들로부터 우리는 공동의 사랑에 대해 배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공동의 사랑을 실제로 살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말로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나눔인 베네딕도의 길에 대한 투신으로부터 나오는 열성으로 그렇게 했다.

모든 것은 회칙의 끝에서 두 번째 장인, 72장 ‘수도승들의 선한 열망’에 있는 사랑의 찬사에 이르게 된다. 이 사랑의 찬사에서 베네딕도는 강렬한 사랑, 아주 뜨거운, 타오르고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균형과 중용으로 알려진 베네딕도는 열정적인 사람이 되고,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기쁨으로 넘쳐흐르는 가슴’을 기대하고 있다. 공동체의 교부이자, 형제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모범이고 대수도원장의 모습 속에서 그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사람, 강하고 굳건하며, 식별에서 정직하고 또한 참을성 있으며, 온화하고, 연민이 넘치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인트 티어리의 윌리암은, 그가 쓴 베르나르드의 전기 <가장 중요한 삶>(Vita Prima)에서 수도승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 베르나르드 대수도원장의 모습을 보여 주지만, 그러나 그의 말은 윌리암 자신에 관한 것이 틀림없다.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고, 그가 수도생활에 들어와 열매맺은 성과들에 대한 기쁨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다... 수도원을 조직하고 그 안에 모든 많은 활동들에 참여하면서 그가 얼마나 회칙에 완전하고도 사랑 속에 일치하면서 살아갔는지 그의 완벽한 모범을 따를 수 있었다. 그는 참으로 지상에 하느님이 거하는 자리를 짓고 있었다... 그는 형제들의 약함에 공감하면서 연약하고 무력한 이들을 배려하는 것을 배웠다... 다른 이들에 대해 그는 온화함과 배려로 충만하였다...”

알레드는 20년 동안 리보의 대수도원장으로 있었고, 여기서 우리는, 그의 수도원에 가득찬 모든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에게 그가 아버지, 사목자, 의사, 판관, 형제로서 행동한 것을 보면서, 이 ‘형제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알 수 있다. 그의 전기작가 월터 다니엘은 형제적 이해와 연민이 결핍된 수도승들이 지구의 가장 먼 끝에서 리보로 몰려들었고 그곳에서 평화를 찾았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다음의 유명한 구절에서 그는 말한다: ‘알레드는 리보를 약한 이들에게 위로와 지지의 참된 성채, 강하고 건강한 사람의 양육처, 하느님과 이웃이 가장 충만하게 사랑 받을 수 있는 평화와 연민의 거처로 만들었다.’

알레드는 아무리 약하고 불완전할지라도, 노아의 방주가 모든 유형들의 창조물들을 구원해야만 했던 것처럼, 비록 우리가 창조물들을 두는 장소들을 방주 안의 방들처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덧붙였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품고 있는 사랑의 다양한 유형들에 따라서 리보가 모든 사람들에게 허용될 정도로 강력하고 개방된 사랑의 장소가 되기를 원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네딕도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가지고 있다(회칙 40,1)는 것과 자연적인 차이점들과 은총 속의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대수도원장의 역할의 필수적인 부분인, 분별 또는 식별의 훈련을 하였다. 리보의 이런 삶에 대해 쓰면서 머튼은 적합한 사랑의 기술을 통해 변화되는 알레드의 모습을 설명하였다.

“더욱더 깊이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의 심연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는, 가장 완전하고도 깊은 관상적 일치 속에서조차도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하느님의 어떤 일을 그에게 의탁하는 영혼들의 성장과 변화 속에서, 그가 관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론 <다양함에 대하여>(de Diversis)에서 베르나르드가 말하였다:

“사람들이 한 집에서 한 마음으로 함께 산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일치 속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기쁜가! 우리는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죄를 뉘우치고, 또다른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한다; 이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또다른 사람은 가르치고 인도한다; 이 사람은 기도하고 저 사람은 독서한다. 어떤 사람은 죄를 고백하고, 다른 사람은 죄를 참회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빛이 나고, 또다른 사람은 겸손으로 빛이 난다. 어떤 사람은 번영 속에 겸손함을 보이고, 또다른 사람은 역경 속에서 인내를 보여준다; 이 사람은 일에 전념하고 또다른 사람은 관상 속에 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참으로 이곳은 하느님의 진지구나...[창세기 32,2]”

이렇듯 기막히게 뒤섞이고 다양한 사람들의 그룹은 서로 보완하고 완성시켰다. 그들의 목적은 ‘한 마음과 한 정신’: 상호 참여, 공동으로 가진 것을 나누고 섬김, 우애를 나눈다. 그리스도 차원의 자애, 사랑은 일치시키는 힘이 되어 한 마음과 한 삶을 이루고, 많은 이들을 하나가 되도록 촉진하고 있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에스터 드 왈의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동천 2017-07-03 16:06:55
위 사진 공유합니다..묵주기도하며 걷는 길의 순례자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