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교회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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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교회는 누구인가?
  • 한상봉
  • 승인 2017.06.21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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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어린 시절부터 교회는 우리들 ‘놀이터’였다. 성당 마당에서 돌치기며 구슬치기를 했다. 이따금 마당을 질러가시는 신부님과 수녀님께 수줍게 인사하고 다시 놀이에 열중했다. 성모의 밤이며, 성탄절 행사는 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고, 묵주기도와 성체조배는 당연한 나의 과업이었다. 기타 치며 대중 가요를 배운 곳도 성당 교리실이었다.

첫눈이 오면 늘 인천 제물포역에서 답동성당까지 걸었다. 성당에서 묵상을 하고 나오면 눈이 더 수북이 쌓였고, 행복했다. 장래 희망이 사제나 교사 중 하나였던 시절이다. 지금은 이런저런 연고로 사뭇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그때 그 갈망은 덧난 상처처럼 늘 가까이 있었고, 그것은 아프면서 아름다웠다.

예수님 생각 없이 하느님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어서, 예수님을 먼저 알고 싶었다. 호젓한 본당에 앉아 있으면 늘 외롭게 매달려 있던 예수였다. 윤동주가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문득 교회당 첨탑에서 발견한 것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였다. 괴로운 데 행복하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분의 제자들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행복한 고통’을 겪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신앙은 알 수 없는 신비라 하는가 보다. 바오로 사도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 했다. 그럼 나는? 소상히 밝힐 겨를은 없지만, 대학에서 신학 맛을 보고 공장으로 농촌으로 갔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른바 ‘천주교 운동권’으로 살았다. 집회에 나가고, 글을 쓰고 강의도 했다. 전 례는 시국미사로 때우고, 사람들을 만난 적도 많았다.

사진출처=pixabay.com

거룩하면서 정화되어야 할 교회

지금은 본당에서 ‘예정에 없던’ 사목위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교회’였다. 내게 ‘가톨릭일꾼’운동을 하도록 부추긴 도로시 데이는 “교회는 늘 나에게 스캔들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처럼, 나도 교회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예수님과 십자가의 관계처럼, 교회는 복음과 결박되어 있다. 아무리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복음을 우리에게 전수한 것은 교회였다.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몰랐을 것이고, 복음도 당연히 알지 못한다. 교회의 역사는 예수님에 대한 해석의 역사였고, 그 해석은 종종 예수님과 복음을 오해하고 이내 엇나가곤 했다. 교회는 스스로 아픔을 겪고 있고, 그래서 나를 아프게 한다.

신비가들은 예수님을 ‘임’(연인)이라 했다. 예언자들은 예수님을 ‘동지’라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구’라 불러달라고 청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불렀다. 스승이며 동지이며 친구였던 예수님과 ‘동행’할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매사를 늘 그분께 되묻고, 곁에 있는지 확인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함께 걷기로 예수님과 약조한 사람들이 ‘하느님 백성’인 교회이며, 그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 역시 ‘교회’이다.

이 교회를 두고 교부들은 일찍이 ‘순결한 창녀’라고 고백할 줄 알았다. 교회에 성인(聖人)들만 모여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일 테고, 예수님조차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한다. 사실상 흠결이 많은 교회다. 평신도만 그런 것도 아니고, 주교와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여전히 죄인인 채로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ecclesia sancta et semper purificanda)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교회 헌장 8항)

군말 없이 설명하지 말고 ‘사랑하라’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정화될 수 있을까? 방법은 ‘복음에 대한 신앙 감각’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먼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분께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시고 생기 없고 피상적인 우리 삶을 흔들어 주시도록 간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끝없는 슬픔은 끝없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기에 사랑이신 예수님의 뜨거운 눈길과 마주쳐야 한다. 어떤 동기도 뛰어넘는 뜨거운 열정으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리하면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의 온 생애, 가난한 이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방식, 그분의 몸짓, 그분의 한결같음, 그리고 소박한 일상에서 보여주신 그 분의 관대함,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분의 완전한 봉헌, 이 모든 것이 소중하고 우리 인간의 삶에 말을 건넵니다.”(복음의 기쁨, 265항)

베네딕토 16세 교종은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6항)고 했다. 이웃이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처럼, 지금 당장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배제와 차별로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 이웃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로 가자고 했을 때, 그 말 자체가 복음과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 가난한 목수였던 예수님의 눈길은 언제나 가난하고 밀려난 사람들에게 먼저 꽂혀 있다. 교종은 ‘군말 없이’ (sine glossa) 설명하지 말고 복음을 실천하자고 재촉한다.

사진=한상봉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

지금, 나한테 교회는 무엇인지 묻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지금, 교회는 나한테 누구인가?” 묻는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 군부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여러분이 교회”라고 했다. 어차피 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사람들 안에서 ‘복음적 신실성’이 확인된다. 교회는 자신을 사랑의 크기만으로 증거할 수 있다.

초기교회에서 테툴리아누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How these Christians love one another!) 아리스티데스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보다 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과 양식이 없는 자가 있으면 그를 돕기 위해 이틀이나 사흘을 금식한다.”고 했다. 또한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주교였던 디오니시오스는 이렇게 편지에 쓰고 있다.

“우리 형제들 대부분이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두려움 없이 병자들을 거두어들여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사랑과 친절로 세심하게 보살피고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병자들과 똑같이 죽어나갔습니다. ... 우리 형제들 중 가장 튼튼한 사람들까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 이교도들의 경우는 사정이 매우 달랐습니다. 그들은 병의 증세가 보이면 아무리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라도 버리고 달아났고, 반쯤 죽은 이를 길바닥에 버렸으며 시체를 매장하지도 않고 마치 오물처럼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니, 살다보면 질문이 이렇게 바뀌게 된다. “나는 과연 교회인가?” 복음이 몸을 얻으려면 복음 대로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교회!’ 하고 발음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누구인가? 그 얼굴이 내가 만난 교회이다. 몇몇 용감하고 사심없이 고운 얼굴이 먼저 생각난다면, 아프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7년 6-7월호(통권 7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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