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공소 '늘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상태바
도심 속 공소 '늘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 유수선
  • 승인 2017.06.20 23: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수선의 복음의 힘-3]

늘품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우리 모임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믿는 신앙공동체다. 늘품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자비의 품이다.

늘품은 우리 모두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위해 고유하게 빚으신 소중한 존재임을 믿기에, 서로 존중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란 복음 말씀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길 꿈꾸는 ‘도심 속 공소’다.

늘품은 질병으로 건강과 가정, 일터를 잃고 과거의 삶과 단절된 채 쪽방이나 고시원, 원룸에서 홀로 살아가게 된 형제들이 모인 우물가다.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여인의 복음 선포를 듣고 영과 진리 안에서 참되게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생명의 우물가로 달려 나온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유수선

세례받고도 교회에서 냉대받는 사람들

제도교회가 중산층화 되면서,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은 같은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성당에서 그들이 머무를 곳을 찾기 힘들어졌다. 아버지 집이라 찾아가서 친교를 나눌 수가 없게 되었다. 사회복지 쉼터에 있을 때 세례를 받아도, 그곳을 나가면 많은 이들은 예전처럼 세상을 떠돌다 죽을 때는 장례식장 냉동고에서 법적 연고자를 40일을 기다리다 낯선 사람들 손에 화장터 공동유골함에 버려진다.

세상의 편견과 냉대로 덩그러니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그 형제들에게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나 일반인들과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 준 ‘세례성사’는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선물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자모이신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양육될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고 마치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자식처럼 냉대를 받다가 그 흔한 연도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죽으면 쓰레기 소각장에 내버려진다. 예수가 꿈꾼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교회공동체에 들어와 하느님 나라를 함께 살아가자며 교리를 가르쳤던 나는 거짓말쟁이 약장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누굴 위해 이 약을 팔았단 말인가? 이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세례를 준비하며 그들의 드라마틱한 인생 여정을 뚫고 여기까지 그들의 생명을 보살펴 오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아차리게 되지 않았던가? 또한 그토록 지독한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낸 형제들의 삶 안에서 생명이 발하는 거룩한 빛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세례로 한 형제가 된 이들이 외롭게 세상을 떠돌다 죽어가는 상황을 내 소관 아니라고 모르는 채 방관할 수 있단 말인가?

박해 가운데에도 자발적으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사랑을 살아낸 신앙선조들에 대한 기억이 용기를 주었다.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며 지난해 12월 8일 절두산 성지 가까이에 내가 교리나 성경을 전해주었던 형제들을 중심으로 조그만 공소를 열게 되었다.

늘품,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서...

늘품은 매주 목요일에 모임을 갖는다. 첫 목요일에는 성만찬을 기억하며 점심을 먹고 미사를 봉헌한다. 둘째 넷째 목요일에는 원하는 형제들이 모여 성경과 성가를 배우고 셋째 주에는 협력자들이 모여 성경묵상 찬미기도모임을 갖는다. 또한 같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형제들의 병문안을 가거나 서로의 필요를 돌보아 주며 형제들은 그리스도인의 보편 사제직과 예언직, 왕직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늘품은 쉼터와 달리 형제들의 자발적인 봉사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미사가 봉헌되는 첫째 주가 시작되면 한 형제는 미사드릴 강당과 층계, 화장실 및 밥을 먹고 친교를 나눌 공간을 깨끗이 청소한다. 또 한 형제는 개신교 신자인데도 미사 2-3일 전부터 메뉴를 짜 시장을 보고 후식으로 먹을 식혜를 미리 만들어 놓는다. 또한 하루 전날 새벽에 남대문 시장에 나가 꽃을 사와 제대와 강당을 장식해 놓는다.

마치 어린 시절 어쩌다 공소를 방문하시는 신부님을 맞이하던 어르신들처럼, 신부를 맞이하는 혼인 잔치 집 어머니처럼 온 정성을 기울여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나는 이 개신교 형제의 정성 안에서 장독대에 냉수를 떠놓고 기도하던 아낙네들의 간절함과 거룩함을 본다.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린 모습이다.

명절에 아버지의 집에 가듯이

미사 당일도 공소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점심식사는 12시, 미사는 2시에 있다고 공지를 하지만 원룸이나 고시원 같은 작은 공간에 홀로 살고 있던 형제들은 일찍 집을 나선다. 명절날 아버지 집에 들어선 형제들처럼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음식이 차려질 때까지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상차림은 또 얼마나 예술인지. 어디서도 받아보지 못할 대접을 통해 형제들은 가족의 사랑을 먹는다. 젊은이들은 기꺼이 음식을 나르고 끝나면 설거지도 맡아서한다. 미사가 아니었으면 생각과 나이, 삶의 방식이 서로 달라 평생 얼굴을 보지 않고 지냈을 형제들도 함께 모여 밥도 먹고 웃고 떠들며 친교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하늘나라를 상상한다. 미사는 참으로 친교와 일치의 성사이다.

식사 후 재단 소강당으로 이동해 30분 전부터 미사드릴 준비를 한다. 성가도 연습하고 독서도 읽고 때론 동영상도 본다. 미사 중에 강론 후 형제들이 시와 가요로 준비해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형식 없이 기도가 필요한 형제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도움을 청한다. 영성체 후에 다시 한 번 기도시간에 열거한 형제들을 기억하며 다 같이 기도 성가를 바친다. 미사가 수동적, 형식적으로 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봉헌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신부님은 미사예물도 받지 않으신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자 비천한 이들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처럼 말씀과 성체를 나누어 주고 강복을 주시고 떠나신다. 미사 후에는 때때로 신부님도 함께 축일파티를 하거나 협력자들이 가져온 다과를 먹으며 미사의 은총을 나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확인하며 하늘 시민의 기쁨을 한껏 누린다.

사랑하는 이 형제들이 고단한 삶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우리가 나눈 사랑 안에 이미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며 그들 삶도 인도하셨음을 알아차리고 평화로이 아버지 품에 안기어 안식을 누리게 되길 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의 고통들을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에 일치시켜 봉헌하며 그 분과 함께 그 분을 통하여 마지막 감사의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길 빈다.  


유수선 수산나 
초원장학회 이사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