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걸인이 된다는 것 … "우리는 천국의 시민인가 지옥의 시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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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걸인이 된다는 것 … "우리는 천국의 시민인가 지옥의 시민인가"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6.1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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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8] "영이 가난한 이들은 복되도다"

 

"잠글 것이 없는 사람들은 복되도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에서)

4세기 에집트 사막에서 지내던 수도승들은 그들을 방문하러 온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온 방문객”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바빌론에서 온 방문객들”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순례객과 관광객을 구분하였다. 관광객은 새로운 광경들을 찾아다니며, 또다른 세계의 삶에 대해 즐기며 보는 것을 원하는데, 때때로 모험을 동반하거나 단순히 이국적인 장소에 대한 경험을 포함한다. 순례자는 하느님을 찾고 있다.

예루살렘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묘가 있는 교회(혹은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것처럼, 부활의 교회) 안에서 내 아내는 그리스도가 묻혔던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줄을 서고 있을 때에 관광객과 순례객 중간쯤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아내 앞에는 관광하기 위하여 온 미국인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의 안내자는 왜 그들이 거대한 지붕의 오래된 교회 안의 한 작은 경당을 보고 있는지 설명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부인이 “아마 여기가 예수가 탄생했던 곳인가 봐요”하고 말했다. “아니, 그건 어제 베들레헴에서 봤어요.”하고 남편이 대답했다. “아, 그렇죠. 그럼 여긴 무엇이죠?” 남편도 알지 못했다. 마침내 그 부부가 들어설 차례가 되었다. 그 부인은 자기 앞에 섰던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남편이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좁은 공간 속에 있는 돌판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무엇 앞에서 그렇게 했는가?

사진출처=flickr.com

한편, 아내 낸시 뒤에는 모두 까만 옷을 입은 나이든 그리스 여인들 몇 명이 꽃다발처럼 촛불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도시 성벽 바로 바깥의 한 작은 언덕 위에서 육화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들 앞에는 그분의 시체가 봉해진 무덤 속에 안치되었고 로마 군인들이 보초를 섰던 실제 그 자리, 그분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바로 그 자리가 있었다. 그들은 역사의 중심사건, 교회의 달력이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넘겨지는 축, 또한 그들의 삶도 그것을 중심으로 삼고 계속되는 축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예수 제자도의 출발점, 영의 가난

관광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순례자들이 될 것인가?
대답은 진복팔단의 첫 번째 단인 영의 가난을 매일매일 실천하는 것이다.

영의 가난은 제자로 가는 길의 기본적인 출발이며 정황이 된다. 이것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시작할 수 없다.

영의 가난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기본적으로 나를 방어할 수 없고, 돈이나 권력이 나를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면하게 해 줄 수 없으며, 이 지상의 삶에서 내가 무엇을 성취하고 획득하든지,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는 것과 여전히 무척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영의 가난은 내가 필요로 하는 그 어떤 것보다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가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영의 가난은 두려움의 지배로부터, 우리들에게서 사랑의 행위를 억제시키는 거대한 힘인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영이 가난해지는 것은 더 많이 소유할수록 내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신화를 떨쳐버리는 것이다.

영의 가난은 다음과 같은 어느 프랑스 격언 안에 요약된 의미이다. 즉 "우리는 죽을 때, 꽉 쥔 손안에 우리가 포기했던 것만 쥐고 간다"는 격언이다. 영의 가난은 우리를 자신 안에 가두었던 자아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는 것이다.

첫 번째 진복은...” 하고 안토니 불룸 대주교가 말한다, “하느님나라의 문턱에 서는 것이다... 아무 것도 그들 자신 안에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감히 ‘자신들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들이 바로 복된 사람들이다. 만일 그들이 ‘무엇인가라면’,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하느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귀중함은 하느님의 아들이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얻어진 것임을 그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이 세기의 하느님은 재물이다...그러면 가난은

어떤 종류의 가난이든 모든 가난은 성서를 제외하곤 어디서도 거의 찬양을 받지 못한다.

사무엘 죤슨은 제임스 보스웰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가난은 인간 행복을 거스르는 거대한 적이다. 왜냐하면 가난은 자유를 파괴시키고 실천할 수 없는 덕들을 만들고 또 다른 덕들을 지독히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죤슨은 수세기 동안 이어 내려온 충고를 약간 반짝거리게 닦았을 뿐이다.

“이 세기가 숭상하는 것은 재물이다”하고 오스카 와일드가 그의 희곡 <이상적 남편>에서 썼다. “이 세기의 하느님은 재물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온갖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재물을 가져야 한다.”

“식량, 의복, 연료, 집세, 세금, 사회적 지위(체면)와 아이들”, 죠지 버나드 쇼는 그의 희곡 <바바라 소령>에서 선언한다. “돈 이외에 어떤 것도 인간의 목을 죄는 이 일곱 가지 무거운 짐들을 들어올려 줄 수 없다. 그리고 정신이란 이 일곱 가지 짐들이 들어올려질 때까지 고양될 수 없다.” 쇼의 주제는 가난을 찬양하는 설교자들에게조차 돈의 유혹이 얼마나 견딜 수 없는 것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는 재물에 대해 중립적이었을까?

첫 번째 진복은 이와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우리편에서 보면 영원한 가시이다. 20세기 동안 사람들은, 신학자들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빠져나가는 구멍을 늘상 추구해왔다.

그런 시도들 가운데 가장 익숙하고 일반적인 시도는, 진복팔단과 신약성서에서 실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다른 구절들을 수도자들을 위한 “완전의 권고”쯤으로, 보통사람보다는 프란치스꼬 성인이나 마더 데레사 같이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간주해서 괄호 안에 가두어버리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모범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또다른 도피적 접근방식은 진복팔단의 상황, 배경을 영적인 측면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즉 “나자렛의 예수는 물질적 소유에 대해 무관심했었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이 가난했든 부자였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만 중요했다. 즉 사람의 태도만 중요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시도이다.

이런 접근방식은 강조점을 바꾸긴 했어도 적어도 내용을 심각하게 다루는 좋은 점은 있다. 결국 그리스도가 말하는 것은 “영의 가난”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태도가 문제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복되다고 말하는 가난은 만일 회한이나 어떤 미움에서 받아들이는 가난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난한 사람이 가졌으면 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환상 속에서 백만장자가 된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의 기준에 따라 가난할 지 몰라도, 영으로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는 재물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며, 재물에 대해서도 태도에만 관심을 두었을까? 복음서에서 그분이 돈에 대해 말씀한 다른 구절들을 찾아보면 절대로 재물의 추구를 격려하지 않았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 산상수훈의 다른 구절을 보면 그분은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마태오 6,20)고 가르친다.

또 다른 때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깜짝 놀라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마태오 19,24-26)는 위로의 말만 덧붙인다.

마태오는 그 자신도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계속 예수의 이런 말씀에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돈을 벌고 축적하고 보호하는 삶으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

“영이 걸인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복되다”

첫 번째 진복에서 쓰여진 “가난한”의 그리스 단어는 프토코스(ptochos)인데, 이 말은 아주 적게 소유한 사람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한다.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갖고 있으나 저축이나 사치, 잉여재물이 없고 빚이 없는 사람들을 말할 때 쓰는 그리스 단어는 페네스(penes)이다. 이런 사람은 손으로 정직하게 벌어서 살고 이웃의 존경을 받지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말한 것처럼 “머리 누일 곳조차 없는(마태오 8,20)” 그런 사람으로서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의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첫 번째 진복에서 설명하는 필요의 정도는 긴급하고 절대적이며,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 처해있는 절망적이고 필사적인 상황이다. 따라서 첫 번째 진복의 더 나은 번역은 “영이 걸인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복되다...”이다.

그러면 첫 번째 진복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절망적이고 필사적인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달린 문제이다. 그것은 매일매일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소명에 다 적절한 한가지 모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성경을 팔아서라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성인들 중에 거의 아무 것도 가진 적이 없지만,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내놓았던 성인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에집트 사막의 교부들 중 한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물인 성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하기 위해 팔고서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마태오 19,21)라고 쓰여진 책을 팔았습니다.” 어떤 성인들, 예를 들면 바실리오 성인 같은 분은 입고 있던 마지막 옷까지 벗어버리고 아담과 이브처럼 알몸이 되었다. 그는 모스코바의 “거룩한 바보”로 불리고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대성전은 그의 이름을 쓰고 있다.

그러나 거룩함이란 이렇게 빈털터리 성인들의 총합이 아니다. 또한 금욕, 고행의 위업이 영의 가난보다 자만심의 표현이었던 사람들도 많다. 난쟁이 죤이 그의 초기 수도생활 때에 한 형제에게 에집트 사막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천사처럼 살겠다고 선언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배가 고파서 허기진 죤이 그 형제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라고 형제가 물었다. “죤입니다.” “아니오, 죤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그 형제가 말했다. “죤은 지금 천사입니다 ­ 그는 밥도 집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에야 형제는 배고파 후회하는 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누그러지고 순화된 수도승은 더 겸손하고 더 보통의 가난을 수용하였다.

가난의 외적인 형태들은 사람에 따라 그리고 한 사람의 때에 따라 다양하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아무도 벌거벗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공적인 생활에서(어른이 되었을 때) 다만 두 번 공개적으로 벗었다. 즉 세례와 십자가 죽음의 때뿐이었다.

영의 가난은 어떻게 실천되는가

그리스도 이외에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영의 가난을 표현한 모범이다. 하느님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했던 모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지금 당신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루가 1,38). 그는 조용하게 예수의 모든 삶의 걸음마다 함께 있었고 성령강림 후에는 제자들과 함께 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아들에게 알린 후 하인들에게 지시한다, “그가 말하는 대로하세요”(요한 2,5). 이것이 그의 아들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리아가 했던 충고이다. 우리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헤아릴 때마다 우리는 마리아가 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힘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다.

환대의 성인이며 <가톨릭일꾼> 신문의 독자들에게 자주 자발적 가난을 권고했던 도로시 데이는 헌옷을 입고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소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참으로 무신론자들이다”라고 자주 말했다. 그는 자신의 책을 누가 빌려가고 돌려주지 않았을 때 화를 내는 자신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난 내 책들에 너무 집착해 있어요,” 하고 그는 나에게 여러 번 말했다. 그러나 감동적인 사실은 이러한 집착이 도로시 데이로 하여금 책들이 덜 없어지는 생활방식의 삶을 살도록 이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근래의 또다른 성인 중에 마더 마리아 스콥트소바라는 러시아 정교회 수녀가 있다. 파리에 있는 그의 환대의 집은 도움이 필요한 누구든지 받아들였다. 나치 점령시대에 그는 유대인들을 도왔고 그래서 체포되어 후에 라벤스부르크에 있는 가스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는 모든 사람 하나 하나를 “이 세상에 육화한 하느님의 모습 그 자체”로 보았고 모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이 놀라운 현현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모상을 존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개인소유물은 가방 하나로 충분했다. 그의 침실은 지하 한 구석에 있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자매인 가난”을 그의 신부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거룩한 가난이 부에 대한 욕망과 탐욕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걱정을 무너뜨린다”고 <덕에 대한 예찬>에서 쓰고 있다. 그는 자발적 가난이 전쟁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증언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프란치스꼬의 옷­누더기로 기운­은 아직도 아씨시의 성전에 보관되어 있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는 사리 두 벌, 묵주 한 개, 성서, 그리고 몇 개의 기도 책들을 소유하였다. 우리는 마더 데레사가 무엇을 소유했던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했던가에 대해서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버린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임신부들에게 도움을 주는 많은 공동체들을 창설하는 일에 오랫동안 전념하였다. 마더 데레사는 가장 큰 가난이 어떤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 신앙의 부족과 자기자신 속에만 갇혀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이 가난한 부자들

성인들은 거의 아주 적은 개인소유물을 가졌지만, 가진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성인들 중에는 적어도 삶의 기본적인 필요에 관한 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안락하게 살았으며 머리를 누일 지붕과 베개를 거의 걱정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성 레오 대 교황이 다음과 같이 관찰했던 것처럼: “영의 가난을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얻기 쉽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복종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동료이므로 많은 부자들도 자신들이 가진 재물로 인해 자만심을 증가시키기보다 자선활동에서 영의 충만함을 발견하였다. 이런 부자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일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게된다고 생각하였다.”

헨리 8세 집정 때 영국의 총리 대신이었던 성 토마스 모어는 아주 크고 멋진 집과 시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 런던의 탑에 갇히기 전까지는. 마침내 그는 왕이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참수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관대한 사람이었으나 가난과 감금이 그에게 억지로 다가 올 때까지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어의 활력 넘치는 영과 내적인 자유는 그가 심문을 받았을 때 나눈 대화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리치경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왕한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첼시아의 아름다운 집과 부인과 아이들을 다 남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왕한테 충성하는 것은 단지 서약을 하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죽게 될 것이오.” 모어는 “리치경, 나는 오늘 죽지만 당신은 내일 죽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정교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성인들 중의 한 사람인 키에브의 블라디미르 왕자는 988년 초기 러시아 사람들을 인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다. 회심하기 전의 블라디미르는 성인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네스터 성인은 연대기에서 블라디미르 왕자를 “끝이 없는 악덕을 지닌”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블라디미르가 키에브 사람들을 세례 받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영웅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를 성인으로 여겼다. 그는 가난한 이들, 고아들, 병자들을 돌보았던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왕궁의 문들은 굶주린 이들에게 늘 열려있었다. 그는 노인들을 위한 요양소를 세웠다. 그는 고문과 처형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왕궁에 살았고 귀족처럼 옷을 입었다.

그의 아들들 가운데 두 명은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자신들을 옹호하지 않으며 죽음을 선택했다. 젊은 왕자들인 보리스와 글레브는 첫 번째 러시아의 성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멋진 옷을 입고 귀족으로서 편안함을 즐겼다.

사진출처=philiphowe.com

영적인 걸인이 되는 조건­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

좋은 집에서 살고 포도주와 함께 식사를 하며 살았던 성인들에 관한 책들을 세어보면 도서관을 꽉 채우게 된다. 그리고 짚으로 만든 요에서 자고 때때로 딱딱한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때웠던 성인들의 삶은 더 큰 도서관을 채운다. 성인들이 가진 외형적인 차이들은 놀랍지만, 더 가까이 그들의 삶을 볼 때에 우리들은 그들의 갖거나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특별한 순명의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성인들은 영의 가난에 연결되어 있다. 모든 성인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모든 성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살아내는 것을 생명인가 죽음인가의 중대한 문제로 여기며 하느님을 추구하였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신원, 고유한 책임, 천국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는 고유한 통로를 주시기 때문이다. 영의 가난­, 영적인 걸인이 되는 조건­은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소명에 순종하는 것은 돈을 벌고 쓰는 것과 함께 물질적인 대상에 대한 책임을 포함한다. 부모로서의 소명은 수년동안 아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신체적 영적 필요를 마련해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살아야할 자리, 그리고 다양한 소유물들과 어떤 연장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이 하수도기술자나 기계기술자라면 일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연장들이 있다. 학자라면, 기본적인 서고나 서재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소유물들은 단지 우리의 일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우리의 영적 지적 성장과 연결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는 방식이며, 우리의 영혼이 소유물에 종속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해야 할 때 어떻게 이 소유물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인가 지옥의 시민인가

이런 측면의 밑바닥에 있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삶에 있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편안함과 명성인가? 우리 자신의 중요성?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인가? 우리가 물질과 관계를 맺는 다양한 방식들은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우리 영혼의 상태 그리고 우리가 천국의 시민인지 지옥의 시민인지를 밝혀준다.

에집트 사막의 위대한 성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압바 도로테오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저명한 인사에게 영의 가난을 말해주는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그가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어느 날 우리는 겸손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도시의 고귀한 시민들 중의 한 사람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을 더 죄인으로 보게 된다는 우리말을 듣고 놀랐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시민이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고귀한 시민이시여,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당신의 지위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난 이 도시에서 내가 첫째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케사리아에 가야 한다면, 그곳에서 당신의 위치는 어떨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대답했다, “적어도 그곳의 시민 지도자 위치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자 내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안티오키아에 가게 된다면 그곳에서는 어떨까요?” “그곳에선, 아마도 평민일 것 같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했다.

“그러면, 당신이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황제를 알현한다면, 당신의 위치는 어떨까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아마 거의 아무 것도 아닐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말했다, “성인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은 자신들을 더 죄인이라고 보게 됩니다.”


[출처] 짐 포레스트(Jim Forest)가 쓴 <진복의 사다리>(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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