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공정하고 섬세한 종교개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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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공정하고 섬세한 종교개혁가
  • 한상봉
  • 승인 2017.06.1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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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6?-1536)

2009년 3월 26일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라는 인터넷신문사가 정식 창간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일 년 넘게 인터넷카페 형식으로 언론활동을 해 왔지만, 정식으로 언론사 등록을 하고 일을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가톨릭교회 안에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대안언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던 중에 이뤄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일을 시작하자니, 이른바 총대를 멜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 5년 동안 전라도 무주에 살면서 어설프게 농사를 짓다가 경주로 이사와 예술심리치료사라는 명함을 파고 일하다, 제가 밥벌이하러 거취불명의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이 언론매체의 창간을 위한 준비를 부탁받았습니다. 당시 거취가 불분명했던 것이 화근인지 은총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고, 어렵사리 이 일을 ‘편집국장’이라는 이름만 거창한 직함으로 꾸려왔던 거지요.

초기에는 혼자서 취재, 편집, 관리업무까지 도맡아 해왔고, 언론이 정식 창간되면서 취재기자를 한 사람 더 들일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친구, 고동주 기자입니다. 그 친구는 컴퓨터랑 관련된 일은 물론 회계업무까지 겸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서 마치 내가 가장 부족했던 부분을 꽉 채워주는 은총처럼 다가온 사람이었지요. 저는 인터넷신문을 맡았지만, 정작 컴맹을 간신히 넘긴 수준이었고, 돈 문제는 그야말로 맹탕이어서 고전을 면치 못하니까요.

지금이야 교회언론의 환경이 다소 바뀌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교회의 비판적 언론이 그만큼 절박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가톨릭교회의 복음적 요청에 따라서 우리 사회와 교회의 문제들을 짚어내고 비전을 찾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했죠. 가톨릭언론은 세상에 대해 교회의 시각에서 예언자적 발언을 해야한다고 느꼈고, 또한 세상을 향해 들이댔던 잣대, 공평과 정의를 교회 자신에게도 들이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를 향해 발언할 때는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사실 교회언론을 하게 되면서, 저는 제도교회에서 미운 털이 많이 박힌 셈입니다. 주교회의는 좀 나아졌지만, 어떤 교구에서는 내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모양입니다. 언젠가 주교회의 산하 어느 위원회 차원에서 기획한 글쓰기 강좌를 맡아서 한 적이 있는데, 강좌 홍보를 그 교구 주보에 내려는데, 강사가 '한상봉'이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위원회는 강사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다시 글쓰기 강좌를 개설했지요. 주보 홍보를 못하면 수강생을 모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어요.

지금은 언론을 그만 두고, 가톨릭일꾼 양성을 위해 2016년부터 '도로시데이 영성센터'를 하고 있지만, 어머니이신 교회도 미운 자식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저는 가톨릭교회가 제 영혼을 아낌없이 품어준 엄마이며, 그 안에서 가르침과 인생의 행로를 발견했던 아빠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엔 에라스무스를 알고 싶습니다. 그는 교회의 사람이면서 교회의 관습에서 해방된 사람이었지요. 르네상스가 준 자유로운 공기로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요한 23세 교황을 떠오르게 합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유럽의 공용어인 라틴어를 강조한 적이 있는데, 에라스무스 역시 평생 모국어인 네덜란드어가 아니라 배워 익힌 라틴어를 쓰며 대화와 평화에 기초한 새로운 유럽을 꿈꾸었던 인문주의자입니다. 그는 평생 종교적, 사회적, 개인적으로 어떤 종류의 폭력도 끔찍이 싫어했는데, 그의 태생이 폭력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이를 거부했던 모양입니다.

Erasmus by Holbein

슈테반 츠바이크가 쓴 <에라스무스 평전>에 따르면, 그는 1466년경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는데 ‘불법으로, 금지된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어느 사제의 사생아였지요. 부모는 일찍 죽었고 친척들은 이 후레자식을 아홉 살 때 데벤터의 수도원 학교로 보냅니다. 그는 스무살쯤 되어서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들어갔죠. 그가 이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종교적 열정 때문이라기보다 그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를 사로잡은 것은 아름다운 예술과 라틴문학, 회화들이었답니다. 그는 1492년 유트레히트의 주교에게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평생 사제복(수단)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유사상가이며 저술가인 그가 가톨릭 사제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는 대단한 처세술을 터득했는데,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두 명의 교황에게서 사제복을 입지 않아도 좋다는 특별사면을 얻어냅니다. 건강진단서를 이용해 사순절의 구속에서도 벗어납니다. 또한 카브레의 주교를 설득해 곧이어 파리로 공부를 떠납니다. 그러나 주교는 인색한 후원자였기 때문에, 에라스무스는 아름다운 청년기를 보낸 자신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병약하고 섬세했던 그는 몽테규 신학교에 대해 “침실은 건강에 해롭고, 벽은 얼음처럼 차고 삭막하게 회칠돼 있다. 거의 변소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 ‘식초같은 신학교’에서는 죽을 병에 걸리든지 죽어버리든지 하지 않고는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병고(病苦)를 빌미로 학교에서 빠져나와 가정교사와 보습교사로 살아갑니다.

책을 사랑한 사나이, 에라스무스

나이 오십 세까지 에라스무스는 선물 받은, 말하자면 구걸해 얻은 빵으로 살아갑니다. 그가 빵을 얻기 위해 쓴 비굴한 헌사와 아첨의 편지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글을 모아 두면 청원에 필요한 고전적인 서간집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요. 그러나 그는 구차한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 했습니다. 그는 점차 문필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고위성직자로서 통치자의 공문을 다루는 무한한 힘을 가진 영주의 궁내관이기보다 차라리 기회가 오면 몇 푼의 돈을 받고 일해 주는 영주의 상담자로 남길 더 원합니다. 그는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기 위해 평생 유목인처럼 살았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스위스로 옮겨 다니며 베토벤처럼 아주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부유하지도 않게 지냈습니다. 그는 여자보다 책과 더 가까이 지냈습니다. 책은 조용했고 폭력성이 없었으며 교육받은 자의 유일한 특권이었으므로, 그는 책을 사랑했습니다. 책을 쓰는 것도 좋아하고, 책을 디자인하고, 인쇄소에서 덜 마른 잉크냄새를 맡는 것으로 행복했습니다. 그가 헌사를 써서 돈을 벌고자 했던 것도 대부분 책을 사기 위해서였지요.

에라스무스는 천재적인 대담성과 모방할 수 없는 능란함으로 검열관의 눈을 피해 갖가지 미묘한 문제들을 다뤘습니다. 그는 때로는 학자가 되어, 때로는 장난꾼으로 변신해 자기를 보호하면서 결정적인 위험에서 빠져나갈 줄 아는 위험한 반란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그 시대의 뻔뻔스러움에 대해 말한 것의 십분의 일만 말해도 화형장에 끌려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거칠고 시끄럽게 떠들어댔기 때문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둠 속에 앉아 자선을 구걸하며 권력자의 문간에 서서 마치 쓴 물을 삼키듯 억지로 괴로움을 참고 있은 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때때로 분노와 질식할 것 같은 비명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1509년 이탈리아를 방문해서 종교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교회를 발견했지요. 교황 율리우스는 사도의 가난함 대신에 사치와 흥청거림에 빠진 채 주교들을 호위병처럼 거느린 용병대장 같았습니다.

Marginal drawing of Folly by Hans Holbein in the first edition of Erasmus's Praise of Folly, 1515

영국으로 돌아온 에라스무스가 친구인 토마스 모어의 별장에서 쓴 <바보예찬>은 익살스럽게 그러나 명쾌하게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풍자하고 있지요. 당시 교황들과 추기경들의 향락과 비도덕적 생활 때문에 진지한 사람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치에 빠진 로마 교황청은 모든 항의를 일축했고, 우호적인 항변마저 거부했죠.

큰소리로 또 열성적으로 항변했던 사람들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화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성물(聖物)장사의 악습과 베드로대성전을 짓기 위해 교황이 허락한 면죄부(대사부)를 판매하는 상인들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민요에 실려 민중들에게서 불려지거나 피를 빨아먹는 거대한 거미로 그려진 교황의 초상화가 담긴 유인물이 손에서 손으로 몰래 전해졌지요.

역설적 글쓰기, 바보 예찬

에라스무스는 <바보예찬>에서 ‘우매함 부인’의 입을 빌려 대담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며 지고하신 신부님, 교황님께서 그리스도의 삶을 닮으려는 일에 전심전력하신다면, 그리고 가난을 견디시려 노력하시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을 참으시며, 모든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경멸을 공유하신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이 분들보다 더 많은 한탄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현명함이 이 분들의 정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점령한다면 이 거룩하신 신부님들께서는 얼마나 많은 보물들을 잃게 될까요! 그 엄청난 부, 하느님의 그 명예, 수많은 고관대작직의 분배, 셀 수도 없는 사면, 그토록 다양한 세금, 향락, 쾌락의 자리인 불면의 여러 날 밤, 단식, 기도와 눈물, 그리고 예배와 수천 가지 다른 힘겨움이 대신에 들어서게 되겠지요.”

에라스무스는 복음의 원천으로 되돌아가 ‘독단적 교리아래 숨어 있는 그리스도를 끄집어내’ 형식에 질식당하고 있는 교회를 정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는 루터나 츠빙글리, 칼뱅처럼 교회의 문제를 일거에 쓸어버리는 격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경건함의 본질이 예배형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신앙의 척도는 오로지 우리 마음과 태도에서만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을 그리스도교 신자로 만드는 것은 성인숭배나 성지순례, 시편송독과 스콜라신학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돌보고,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생활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성인을 가장 잘 받는 자는 성인의 유골을 모아 경배하는 자나 성인의 무덤을 순례하고 촛불을 가장 많이 켜는 자가 아니라 자기 삶 속에서 성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가장 완벽하게 모방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모든 종교의식을 정확하게 준수하고 기도, 사순절 금식이나 미사를 올리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성경을 다시 한 번 라틴어로 번역하고 자신의 자유로운 견해를 상세한 주석과 함께 첨가하는 작업에 몰두합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이야기되는 그리스도의 삶이 수도자나 사제들 뿐 아니라 모든 민중에게 전달돼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농부는 밭을 갈면서도 성경을 읽어야 하며, 직조공은 베틀에 앉아서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새로 번역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번역본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함으로써 반대자들의 창끝을 미리 꺾어놓습니다. 영문 모르는 교황은 교서에서 “우리는 매우 기뻤다”고 답했습니다.

Portrait of Desiderius Erasmus by Albrecht Dürer, 1526, engraved in Nuremberg, Germany.

폭력과 분열을 원치 않으실, 사랑하는 하느님

이렇게 에라스무스는 최초의 종교개혁자로서 이성의 법칙에 따라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행동하는 인간, 루터를 보냅니다. 마르틴 루터의 쇠주먹은, 단지 펜으로만 무장한 연약한 에라스무스의 손이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럽게 조화시키고자 했던 것을 단 일격에 부숴버립니다. 그가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문에 격문을 붙이면서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문명과 유럽세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남과 북, 게르만인과 로마인으로 분열되었지요.

유럽인들은 교황파 아니면 루터파가 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교회와 복음을 화해시키려던 에라스무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편에도 종교개혁의 편에도 서지 않았습니다. 둘 다 의미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둘 다 광신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정함과 유럽의 통일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양편에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개신교도는 그의 이름에 대고 저주를 퍼붓고, 가톨릭교회는 그의 모든 책을 금서목록에 올립니다.

그 뒤로 종교전쟁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쟁터의 암호가 되었고 군사행동의 깃발이 되었습니다. 신의 대리자들은 복음이란 말을 전투용 도끼처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죽기까지 양편에 폭력을 중지하라고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쓰다가 바젤에서 평범한 시민의 옷을 입고 세속의 명예도 없이 고독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죽어가며, 굳어가는 입술로 갑자기 어린 시절 배웠던 고향의 언어로 더듬거리며 말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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