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상주로 귀농, 혁명보다 영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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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상주로 귀농, 혁명보다 영성을
  • 한상봉
  • 승인 2017.06.1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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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8

시골에 내려온지 이 주일이 지났습니다. 먼저 경북 상주에 이삿짐을 풀고, 급한 일감을 처리하고, 뒤늦게 텃밭을 일구고, 아직도 남은 서울 일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며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시 잠깐이라 해도 좋을 보름 동안 일이 많았던가, 아니면 정신을 놓고 살았던가, 퍽 많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집니다. 밀린 일거리로 정신없을 때는 하루해가 길게 여겨지지만, 사이사이 빈 시간에는 무료하기도 합니다. 평소 즐기던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지 않는 탓일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틈틈이 시청하던 「장미와 콩나물」에서 김혜자 씨가 보여주는 연기가 참으로 절묘합니다. 만화 같지만 오락물로 제격인 ‘왕초’. 이 드라마의 뒤끝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결단코 텔레비전을 사양하기로 하였습니다. 담배만큼 끊기 어려운 것이 텔레비전이라는 생각을 잠시 ‘진지하게’ 해 봅니다.

사진=한상봉

상주에선 땅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답니다. 농민들의 땅에 대한 애착이야 탓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연고 없이 찾아온 입농자(入農者)에겐 어지간히 곤혹감을 안겨 줍니다. 당분간 정신 수양을 하기엔 좋을 듯합니다. 특별히 바쁘게 거들어야 할 농사일도 없고, 이참에 미루어 둔 책도 좀 읽고, 땅을 구한다는 핑계로 우리네 산천경개도 둘러볼 기회가 많이 생길 듯합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 솔솔이 주머니 돈이 빠져 나갈 걱정도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돈이란 돌라고 있는 것인데, 쓰면 또 얼마나 쓰고, 벌면 또 얼마나 벌겠습니까? 가난한 살림이라 오히려 마음이 넉넉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 정말 곤혹스러운 사태가 계속 벌어집니다. 아직 남아 있는 글빚이 많은데,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쥐어짠다고 한들 어디 머리카락 수만큼 글발이 서겠습니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글쓰기가 ‘싫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쓰기가 싫은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 장황하게 이런저런 거창한 이유를 들 수도 있겠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저 ‘지금은’ 글쓰기가 싫다는 것 그 자체가 이유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텃밭을 일구고, 마당에서 풀 뽑고 있을 때 안심(安心)이 됩니다.

당분간 생각없이 살아도 좋을 듯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틈나는 대로 텃밭에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는지, 오늘은 어느만큼 자랐는지 들여다보고, 감탄하고, 초조해 하는 게 사실 즐겁습니다. 이만큼 미욱한 제가 예전엔 교사며 사제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다 하면 믿을 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감히 성인(聖人)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면, 저처럼 다소 엉뚱한 사람들에게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천칭 위의 하느님

성인이 되고 싶었던 시절, 고등학교 다니던 때입니다. 성인이 되려면 먼저 수도원 문을 무조건 두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읽었던 성인성녀전에 등장하는 성인 성녀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수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꿈은 곧 낭패를 당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이던가요. 저는 수학 시간이 제일 난감했습니다. 도무지 무슨 액이 끼었는지 수학 문제만 들여다보면 머리가 지근거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생긴 요령이 수학 시간엔 책 뒤에 소설을 껴서 읽는다는 것이지요. 나처럼 이미 수학을 포기한 학생 중에는 영어 자습서를 들고 공부하는 경우도 있었고, 선생님도 이런 걸 눈감아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에 몰래 읽었던 소설이 내 인생을 고달프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김성동의 <만다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그리고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이 책들은 내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종교와 교회,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정체에 대해서 쉽게 답할 수 없었느니까요. 하느님은 그렇게 대자대비하신 분이 아니라는 점, 일그러진 중생의 마음을 닮지 않은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는 점, 인생은 그저 축복에 가득 찬 것이 아니라는 점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 책은 우리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너무도 불행했습니다. 우리 부모와 이웃들, 그리고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치곤 하던 불행한 사람들이 의식 한가운데로 부상하였던 거지요.

영화 만다라의 한 장면.

그 책들을 읽고 나서 성서를 다시 보기로 했다. 인간의 불행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역사에 숱하게 개입하셨던 하느님. 그런데 왜 아담이 선악과에 손을 댈 때는 기척도 하지 않으셨을까? 만일 그때 한 마디라도 하셨다면 마음 약한 아담이 과연 사과를 따 먹었을까? 단연코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불행에는 하느님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전생을 들여다보듯이, 그 책들은 나의 과거를 비추어 주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죄다 운동장으로 내쫓긴 채 나가서 놀고, 양옥집에 산다는 몇몇 아이들은 그네들의 과외 공부 선생이기도 했던 담임 선생님과 조개탄이 벌겋게 달아오른 난롯가에서 무언가 정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쓸쓸한 기억입니다. 우리는 그네들이 교실에서 나오면 몰래 돌멩이며 눈덩이를 집어던지곤 했습니다. 우우 몰려다니며 놀던 우리 친구들은 부잣집 대문에 오줌을 누고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 치는 재미에 맛을 들이곤 했지요.

신약 성서 역시 얼마 읽지 않고 덮어 버렸습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헤로데 왕은 어린 아이들을 살해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라마에서 울부짖는 소리”라고 하였다는 그 소리는 애꿎은 아기들이 죽음 앞에서 지르는 소리, 그 어미가 살해당한 아기를 품에 안고 통곡하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 주셨다는 하느님을 오히려 원망하며 설움에 북받쳐 울지 않았을까요? 그 사이 메시아가 될 아기는 부모와 함께 에집트로 탈출하였다는데 말입니다.

역사가 부조리한 만큼 인생도 부조리하고 하느님도 부조리한 것일까요? 천칭에 아이들의 죽음과 메시아의 탄생을 달아 맨다면 어느 편으로 무게가 기울어질지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항상 강자는 당당하고, 약자는 서러울 뿐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던 백성들에게는 헤로데와 하느님이 똑같이 강자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혁명과 영성의 사잇길에서

대학에 들어가서 나는 주로 폭군 헤로데와 싸우는 데 여념이 없었지요. 하느님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은 얼마나 무서운가요. 야곱이 그처럼 하느님과 밤새 맞붙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눈에 보이고 손에 쥐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신앙적 확신 속에 살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인 메시아조차 젊은 나이에, 그것도 먼저 죽어간 영혼들과 살아서 고통받는 생명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십자가 없는 신앙은 거짓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체 게바라는 나의 젊은날의 우상이었다.

예수가 잡히던 날 밤의 베드로처럼,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 갈 만큼 비겁하지는 않았지만, 감옥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만큼 용감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마음으론 시인 김남주가 감옥에서 써 보냈던 시편들에서처럼 투철한 혁명 전사를 흠모했지만, 몸은 이른바 운동권 ‘주변’에서 맴돌았습니다.이런 연유로 저는 성인이 되고 싶었던 꿈을 일찍이 접어 두게 되었고, 오히려 성인이란 골방 거사 정도로 치부되고, 새로운 인간형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당연히 해방신학의 세례를 받은 탓일 텐데, ‘혁명적 그리스도인’이 그것이었습니다. 비록 자칭 무신론자였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전형처럼 보였던 체 게바라를 흠모하고, ‘역사적 대의’에 따라서 첨단의 깃발을 들고 싶었던 게지요. 그러나 항상 ‘마음만’이었습니다.

그 뒤 천주교 사회 운동에 투신하면서 ‘혁명과 영성’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고, 이건 순전히 개인적 선호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혁명 쪽보다 영성 쪽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깊은 영성 속에서라야 참된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며, 또한 인생길에선 어느 순간엔 이런 시간이 요청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제가 입농(入農)의 뜻을 세우게 된 것도 이런 깨달음의 바다를 맛보고 싶은 바람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습니다. 큰 나무 곁을 걷다 보니 문득 내 키가 커졌다는 이야기처럼, 성성한 나무 그늘을 찾아들고 싶은 영적 갈증이 무엇보다 큰 탓인지 모릅니다. 혹시 또 압니까? 이제야 진짜 하느님을 화염에 휩싸인 떨기나무의 불꽃 속에서 만나게 될지 말입니다. 이글거리는 파라오의 태양열 속에 타 죽어갈 운명에 놓인 무력한 떨기나무 같은 히브리 노예들의 목숨을 살리시는 그분을 말입니다. 온갖 미물과 인간을, 우주 생명 전체를 건지시는 생명의 하느님, 그분을 만날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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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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