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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우리는 기꺼이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나는 도로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짐 더글라스는 “코 끼었다”고 표현한다. 도로시와 함께 살지 않아도 그렇다. 패트 머레이 역시 일생 “코가 끼어 있는”삶을 살았다. 패트 역시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도로시를 글로 쓰여진 책에서 만났다.

❧ 나는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가톨릭일꾼> 신문을 보았다. 펜실베니아주의 에리 공공도서관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 때에도 신문은 일생동안 25센트였다. 신문을 보기 위하여 25센트를 보내면 영원히 볼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계 가톨릭이었고, 신문 앞면의 흑인과 백인이 서로 팔을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즉시 이렇게 말했다 “이건 공산주의 신문이다!” 그는 나에게 지옥같이 화를 냈으나, 그의 태도자체가 나한테는 내가 무슨 좋은 일에 관여 했다고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네소타의 대일 위호프는 도로시가 행동할 때 그에게 사로잡혔다. 대일은 도로시가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어떤 문제들을 제기했는지 말한다:

❧ 그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이발하러 가는 길이었다. 부모님은 나의 비틀즈 스타일의 머리에 화가 났고 머리를 깍으라고 강력히 명령했으므로 나는 기분이 무척 불쾌했다. 아마 11월쯤 되었을 때였다. 나는 길 한 가운데로 걸어 내려오고 있는 한 그룹의 여성들을 보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작은 마을 세인트 클라우드였다. 좀 떨어져서 나는 그들이 길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난 생전 처음으로 시위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한 남자가 앞에 나서서 나를 행진에 초대했다. 그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행진이었고, 도로시 데이가 앞에 있었다. 베트남에서의 전쟁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나는 베트남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러나 나는 함께 걸어가면서 재빨리 역사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연방건물까지 갔고 거기에서 신문기자들의 사진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머리를 깎으러 갔고, 다음 날 아침 내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나는 도로시 데이에게 소개되었고, 그는 내가 도날드와 매리 험프리의 집에 오지 않겠는지 물었다.

나는 험프리 가족을 잘 알지 못했으나, 그래도 갔다. 그건 일종의 정식 모임이었다. 도로시는 자신을 소개하고 가톨릭일꾼에 관해 말했고 나에게 신문을 주며 관심 있느냐고 물었다. 난 이런 것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내 사진이 신문에 났으니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1967년 봄에 나는 다시 험프리네 집에 초대받았다. 도로시 데이가 다시 왔기 때문이다. 도로시는 나와 험프리네 아이들과 오후 내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도로시 데이는 우리들에게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마르틴 루터 킹이 했던 반전 연설에 관해 말했다. 그것은 역사적인 연설이었는데, 알다시피 나는 한 작은 마을의 소년에 불과했고 어른들은 내게 전쟁같은 큰 문제들에 관해 말해준 적이 없었다. 전쟁. 혹은 민권운동. 그래서 이건 정말 특별한 체험이었다. 도로시는 우리 젊은이들이 전쟁과 미국 내의 흑인 처우 문제를 마르틴 루터 킹이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는지, 또한 이 두 문제들을 분리시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서 도로시는 종교적 믿음 –우리의 도덕–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등등의 문제로 옮겨갔다. 그런데 … 우리는 묵주에 관해 농담하기 시작했고 도로시는 우리에게 매우 화가 났다. 우리는 구식성가를 틀기도 했다. 그러자 도로시는 점점 더 화가 났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상징물 같은 것에 대해 긴 토론을 유도했다. 하지만 그 날 밤은 나에게 정말 인상 깊은 밤이었고, 우리 모두에게 그랬다고 생각한다. 도로시는 우리를 어른으로 취급했으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들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도로시 데이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왔고, 밀워키에 카사 마리아 환대의 집을 세웠던 마이클 컬렌은 가톨릭일꾼의 부름을 들었던 또 다른 중서부 사람이다:

❧ 물론 카사 마리아를 시작한 후, 우리는 뉴욕으로 도로시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나는 신학교 시절부터 보브 길리암에게서 온갖 이야기들을 들었다. 나는 어떤 괴짜여인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적어도 매우 제도적인 … 사무적인 가톨릭일꾼 건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톨릭일꾼. 나는 크리스티가를 걸어내려 가고 있었고 마침내 일꾼 앞에 섰다. 초라한 모습의 그 건물은 유리창 안을 거의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먼지를 통해 나는 마리아 상, 요셉 성인상, 십자가 그리고 스프를 만들고 있는 그들의 큰 방을 볼 수 있었다. 도로시는 3층에서 나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좁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 때의 인상은 아직도 나와 함께 있다.

그리고 아 … 악취를 맡으면서 이 고약한 냄새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매우 우아하게, 한 여성이 그곳에 있었다. 도로시가 나를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 위에 머리를 땋아 두른 이 키 큰 여인. 그의 모습은 그곳에 꽉 찼다. 그렇다, 현존이다. 당신은 항상 그가 거룩한 여인임을 알게 된다. 항상. 그때 비록 그런 말을 쓰지 않았지만, 당신은 성인 앞에 있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사실을 안다.

그는 즉시 나를 그의 방 동료에게 소개했다. 도로시는 그 여인을 길에서 데려왔다. 후에 나는 그 악취가 여인의 다리 궤양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여인의 다리는 썩어 있었고, 도로시는 그에게 자기 방 간이 침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런 후, 당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뉴욕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도로시를 처음 만났는지 기억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창립자를 만나기 전에 일꾼 집에서 한참 동안 일하고 살았다. 데리 로저스의 경우는 다르다:

❧ 내가 어떻게 가톨릭 일꾼에 오게 되었는가는 가장 경이로운 이야기이다. 나에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는 캐나다로 캠핑 여행을 떠나는 길에 뉴욕을 들르게 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그냥 가톨릭일꾼을 지나쳐 가고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자.”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는데, 친구가 말했다, “벨을 누르자.”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왜 어때, 누르자, 누르자.”

그래서 우리는 벨을 눌렀고, 도로시가 문을 열었다. 내 친구는, “내 친구가 항상 가톨릭 일꾼에 관심이 있었고, 항상 여기 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첫 번째 대화의 시작이었다.

그러자 도로시가 말했다, “우리 2층에는 빈 침대가 있어요.” 그냥 … 그랬다. 그 완전한 받아들임이라니. 그래서 나는 들어갔다. 난 텍사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동부에 왔다. 그러나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팻 러스크도 아무 질문없이 받아들이는 도로시의 자세를 기억한다:

❧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도로시는 금요일 모임이 끝난 후 거실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 아래 책상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다. 나는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도로시는 푸른 색 잠바스카트와 하얀 블라우스에 머리에는 땋은 하얀 머리를 얹고 있었다. 그는 깊고 큰 푸른 눈의 사람이었다. 당신은 그가 당신의 심연까지 볼 수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도로시는 나를 깊숙이 환영했다. 나는 수줍고 불쑥 큰 질문들을 던지려고 온 열렬한 소녀였으나, 손이 떨려서 그가 준 차를 마실 수 없을 정도였다.

“제가 일꾼에 와서 당신과 함께 살고 함께 일할 수 있을 까요?”

도로시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는 기꺼이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척 메타이도 이러한 환영을 경험했다. 그는 티볼리에서 비폭력의 평화 조성에 관한 모임 때 처음 도로시를 만났다. 그는 베트남 징집영장을 불태웠고 “그 행위는 물론 도로시의 모성적 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도로시의 즉각적인 대답은 ‘아, 당신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네요. 우리 가족의 일원입니다!’”

에이드 베선

고 에이드 베썬은 가톨릭일꾼 가족의 처음 구성원 중 하나였고 가톨릭 일꾼 신문과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마스트헤드(신문의 발행인, 명칭 등을 기재하는 난)를 고안했던 사람이다.

❧ 내가 가톨릭 일꾼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때는 1933년 가을이었는데, 도로시 웨스톤이 동 15번가에 있는 작은 가게를 구경시켜 주었고 일꾼 신문들도 보내주었다. 나는 도로시의 이야기들을 읽었고 아 … 열 아홉 살 내 마음속에는 불꽃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또한 신문이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도 알아차렸다. 나는 다른 신문에서 흑백의 아름다운 삽화들을 보았고 그래서 생각했다, “우리 가톨릭 신문에도 그런 식으로 무엇인가 보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나는 네 개의 흑백 그림을 그렸고 가톨릭 일꾼 신문 편집자에게 보냈다. 얼마 후 엽서가 날아왔는데, “우리는 당신의 그림들이 너무 좋아서 신문에 넣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편집인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아, 나는 감격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헌 옷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헌옷들을 모아 두개의 가방에 넣고 시내로 가톨릭 일꾼을 향해 갔다. 나는 수줍음이 많았다. 그래서 마치도 작은 도끼로 조각을 해 놓은 듯한 키큰 여인을 보았을 때 내 모습은 화석처럼 굳어졌을 것이다.

어머나!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그는 친절했다.

“이것들은 다 당신 껍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우리는 방이 없네요, 그렇지만 어딘가 당신을 있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나를 있을 곳을 찾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환대가 나에게 실천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저 …”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그림을 그린 사람인데요.”

“아, 당신이군요? 자, 여기 앉으세요” 그는 나를 신문더미 위에 앉히고, 자신도 또 다른 신문 더미 위에 앉아서 다음 달에 어떤 성인 그림들이 필요한지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신문의 삽화가로 아주 행복하게 정착했다. 처음에 도로시는 상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고, 어떻게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도로시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애덕 행위를 실천하는 진짜 사람들을 성인들에게서 보았다. 추상적인 의인화가 아닌, 진짜 사람들을–빈센트 드 폴 성인과 그가 집을 만들어 준 작은 아기들, 아픈 사람을 먹이는 성 마틴 드 포레스 등.

도로시가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두 오두막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는 오두막 건너편에서 파도 호텔을 경영하고 있던 월터 스토야노브스키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월터는 함께 지냈던 그 시절에 관해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다:

❧ 알다시피, 도로시 데이는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이었다. 난 잘 설명할 수가 없지만, 그는–평범하면서 특별했다. 그는 파도 호텔로 자주 건너와서 손님들과 이야기하고 섞이곤 했다. 포도주 한 잔을 마시며 그 날 일어난 일들에 관해 담소하곤 했다. 그는 늘 생각해야 할 책임지는 일들이 많았지만 항상 침착한 태도를 보였고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쁜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실상, 바로 이점이 내가 그에게서 배운 중요한 것이다. 삶의 소소한 것들이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열 받지 않고 문제들을 처리했는데, 그게 참 힘든 일이었다. 또한 내 말을 이해한다면, 도로시는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보려고 애썼다. 그로 인해, 나는 공동체에 더 깊숙이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에이즈 환자들에게 음식을 배달한다든가 등등.

나는 도로시가 자주 웃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삶을 사랑했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 도로시는 책임들과 도시의 소란 그리고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글을 쓰고 자신의 소명에 대해 묵상할 수 있었다. 해변가로 긴 산책을 하고 바다공기를 즐겼다. 아, 그는 스테이튼 아일랜드를 사랑했다. 사랑했다! 호텔 건너편의 오두막들을 팔았을 때, 그는 나에게 또다른 집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집은 유일하게 스페인 사람들의 구역에 있었는데, 그곳은 집을 소유할 수 있지만 땅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끝트머리의 두 집을 사들였고 후에 호텔 건너편에 세 번째 집을 마련했다. 한 번은 파도 호텔에서 그의 생일 파티를 한 적이 었었다(그가 스페인 구역에 이미 살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케익을 준비했고 그는 음악에 따라 춤추기 시작했고 정말로 행복해 했다. 도로시는 또 내 조카 결혼식에도 왔다. 결혼식은 폴란드식으로 진행됐는데 도로시는 모든 상징물들과 폴카 음악을 즐겼다.

다니엘 베리건 신부

다니엘 베리간 신부는 도로시가 그의 일생 활동에 원천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 도로시는 내가 신학교에서 전혀 만날 수 없었던 온갖 사람들과의 연결을 시작해 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연결의 핵심부에는 그가 맨하탄의 동부지역에서 경험하고 있었던 도시의 가난과 전쟁의 세계 그리고 지구의 오염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간단하게 들리지만,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놀라운 영감을 주었다. 왜냐하면 도로시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고통을 원하고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고통은 그냥 사회, 경제, 정치세계가 지닌 모순의 결과였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측면에서 비참을 만들어내고 있는 체제를 “추악하고 썩은 체제”라고 가차없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로시의 글을 읽었고 그를 알았으며 그를 위대한 친구라고 부르면서 행동을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특권을 받은 셈이며, 나의 가족도 그랬다.

존 바에즈

도로시와 단 한번 만났던 사람들에게도 그와의 만남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죠안 몬테사노는 도로시가 샌프란치스꼬에서 반전가수 존 바에즈를 만났던 때를 기억한다:

❧ 존 바에즈와 도로시는 농장 노동자 시위에서 만났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함께 있었던 때를 기억한다. 도로시는 존을 좋아했고 그의 목소리에 사로잡혔다. 후에 두 사람은 따로 걸어나가 이야기 시간을 가졌다. 도로시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경우였다. 그는 어머니처럼 존을 사랑스럽게 끌어안았다. 존은 그 후 자신의 신발에 대한 욕심을 얼마나 부끄럽게 여겼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존은 75개의 부츠를 갖고 있는데 도로시는 헌 것으로 가득찬 자루 속의 신발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터뷰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로시를 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꼽았다. 이건 아마도 부분적으로, 인터뷰 자체에서 오는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난 오로지 도로시에 대해서만 물었고 그와 인터뷰한 사람 사이의 관계만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인에 대한 도로시의 영향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다. 캐트린 럼프는 도로시가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그 자신의 일부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처음 지적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아마도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신앙 속에서, 그리고 살아있는 확신 속에서 계속 그와 참으로 연결되고 있을 것이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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