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성령으로 태어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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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성령으로 태어나는 교회
  • 한상봉
  • 승인 2017.06.1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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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과 은총 5강

 

 

성령의 성사로서의 교회

그리스도가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연장”, 또는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같은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죽고 부활함으로써 육체적 한계를 지닌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몸’이 아니라 ‘영적 몸’으로 활동하신다. 이를 두고 ‘우주적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몸은 ‘성령’과 동일시 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것이지, 교회를 선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생전에 교회의 기초에 될만한 제자공동체를 이루셨고, 최후의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라는 당신의 정체와 사명을 기억할만한 사건을 물려주었다.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물려준 요소를 취하여 교회를 설립했는데, 교회설립에 결정적인 계기는 성령강림 사건이었다. 결국 교회는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와 성령, 그리고 제자들의 결단으로 말미암아 설립된 것이다.

그래서 성 이레네오는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성령이 계시며, 하느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 교회와 모든 은총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교회가 성령을 통해 세상을 하느님 안에서 궁극적인 완성으로 이끄는 보편적인 성사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교회를 ‘성령이 활동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성사’라고 할 때, 교회는 제도적 차원을 넘어선다.

사진=한상봉

에클레시아, 하느님 백성은 평등한 하느님 나라의 시민

교회를 가리키는 말인 ‘에클레시아’(Ekklesia)는 그리스어로, 공동체의 문제를 공공장소에서 의논하기 위해 소집된 시민(자유인)의 모임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모임’ 자체가 중요하며, 굳이 영속적일 필요는 없다. 에클레시아에서 쟁점이 해소되면 모임은 해산한다. 교회 역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일시적인 결사’일뿐 영속적인 조직이 아니다, 마치 자유로운 성령처럼.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적 만남이며, 공동체의 문제를 복음의 빛으로 의논하고 신앙을 심화시키고 경축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이루어진 만남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재산, 의식, 교회법, 교리, 사목이 이루어지는 제도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이다.

이런 의미를 가장 잘 담아내는 표현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이다. 하느님 백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사도’들이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조직된 백성이며, ‘사제적 공동체’이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4-5)

모든 그리스도인은 ‘형제’이며 ‘자매’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세례 받고,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는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라고 말했다. 그가 교황이든, 주교든, 사제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본질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매형제들’이다. 다만 교회 안에는 성령의 현존으로 인한 ‘다양한 은사’가 있을 뿐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1코린 12,4-11)

사진=한상봉

카리스마란 무엇인가

성령(하느님의 영)이 주시는 카리스마(charism, 은사)는 구약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성령은 삼손을 통해 백성들을 해방하고(판관 13,25), 왕들은 기름부음을 받고 백성들에 대한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고(1사무 11,6), 예언자를 통해 역사에 개입한다. 복음서에서 성령(그리스도의 영)은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교회를 설립하도록 했다.

그러나 성령의 활동은 항상 개인적인 차원에서 주어지며, 창조적이고 비관습적이며 새로운 영역에서 발견된다. 초기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바오로 사도는 카리스마가 각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공동이익(1코린 12,7)을 위해 행사하는 구체적인 기능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는 ‘몸’이며, 각 지체는 고유한 기능을 지닌다. 그러나 ‘머리’는 한 분 ‘그리스도’이시며, 각 지체들은 ‘사랑 안에서’ 똑같은 존엄성을 누리고 있으므로, 전체의 일치를 파괴하는 특권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데로 오르시어 포로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5-16)

이를 보프는 <교회의 권력과 은총>에서 ‘형제애적 순환성’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안에서 교계제도(성직자)가 거룩한 권력과 종교적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너는 듣고 순종하며 질문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할 수 없다. 교계제도가 자신을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며 손, 발, 심지어 심장까지도 완전히 지배하는 형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상관없다. 이것은 이교도의 지배권력이 하는 짓이다. 교계제도는 교회 안에서 유일한 카리스마가 아니며,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일으키는 다른 카리스마를 억눌러서도 안 된다.

교회는 성령이 질식당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성령이 주시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카리스마가 살아 있어야 예수의 메시지가 복음으로 되살아나고 꽃을 피운다. 그래야 하느님 백성은 단순한 ‘교구민’이 아니라 복음과 모든 이들에 대한 봉사로 이루어진 다양한 카리스마가 종교적으로 실현되는 교회 안에서 참된 구성원이 된다. “사랑으로 성장하는” 교회는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인정하고, 권력의 사적인 독점과 지배를 피하게 된다. 보프는 “단순한 사랑이야말로 카리스마 중의 카리스마요 봉사 중의 봉사이며, 사실상 그 원천”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찬가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라.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사진출처=trekearth.com

카리스마와 교회 구조

카리스마가 성령과 부활한 주님이 세상에 현존하는 방식이라면, 카리스마는 제도를 만들고 이를 유지시키는 영적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힘은 교회 안에서 지배/피지배 집단을 만드는 힘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형제애적 평등을 이루도록 이끄는 힘이다. 한 개인이 권력행사를 통해 다른 개인을 억누르게 되면 그리스도의 성령 대신에 ‘인간적’ 정신이 교회 안에서 작동하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요청하신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질식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교계제도가 권력화 되면서, 수많은 하느님 백성을 교회 안에서 주변화 시킨다면 이는 성령의 요청을 거부하는 일이다. 하나의 카리스마가 우위에 서서 다른 카리스마를 침묵시키는 일은 사탄의 유혹이며,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이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1테살 5,19-22)

물론 교회 안에서 질서와 원칙과 순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기 위해 조직된 군대와 달리 사랑하기 위해서 조직된 교회는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 교회에서 개인 구성들이 지닌 카리스마들이 공동선을 위해 사용되도록 조율하고, 친교와 일치를 꾀하는 카리스마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당부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애쓰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이끌고 타이르는 이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는 일을 생각하여 사랑으로 극진히 존경하십시오.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을 타이르고 소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며,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하십시오.“(1테살 5,12-14)

사실상 모든 권력구조가 카리스마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모든 이에게 봉사하고 공동체 안에서 정의를 세우는 도구라면, 권력도 카리스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해방과 구원의 이름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권력도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대사제에게 심문받던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바오로의 편지에는 초기 공동체에서 이미 주교(감독, 감목)와 부제(봉사자)가 있었음을 밝힌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바오로와 티모테오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필리피의 모든 성도에게, 그리고 감독들과 봉사자들에게 인사합니다.”(필리 1,1) 여기서 특히 감독들(주교들)은 봉사직분을 맡은 각 지체들이 서로 조화롭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돕는 역할이며, 권력의 축적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동체의 일치와 형제애를 위해 존재한다. 이 일치의 카리스마는 정통적인 교리와 자비의 성사에 우선적으로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특히 공동체의 정신을 분별하고, 모든 카리스마들을 공동선에 봉사하도록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가 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읽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2,9-21)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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