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가]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 "성인은 늘 교회를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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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가]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 "성인은 늘 교회를 넘어서고 있다"
  • 한상봉
  • 승인 2017.06.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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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chthild von Magdeburg (1210-1280)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 중국 명나라 문인 진계유

오래된 12세기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교황을 비롯한 주교와 사제를 모두 ‘아버지’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제도가 확립되고 교회법을 중심으로 규범이 만들어질수록 가부장권이 두드러졌습니다. 이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죠. 군주의 아내도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남편 뒤에 멀찍이 마땅한 거리를 두고 자리잡아야 했으니까요. 그나마 여성들에게 허락된 교회적 이상은 세속에서 벗어나 하느님 뜻에 맞는 금욕적 삶을 사는 수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교회의 모든 직무에서 배제되었으며, 결국 지향과 이념이 비슷한 남자수도회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이 시절, 십자군 전쟁으로 남성들이 줄어들게 되면서 여성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자유로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녀원으로 몰려들었죠. 그러나 중세 초기 수녀원들은 거의 전부가 명문 귀족출신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중산층이나 하층여성들이 수녀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만을 따라 살기를 열망하던 이런 여성들에게 공간을 내주었던 거처가 곧 베긴회(Beginen)입니다. 신비가로 유명한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가 활동했던 여성 평신도 수도공동체였지요.

‘자유로운’(Ledig) 성인,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

Mechthild von Magdeburg

12세기에 수녀원장 힐데가르트가 이끌었던 라인강 부근의 베네딕토 수녀원은 신비주의의 중심이었는데, 13세기에는 아이스레벤 근교의 헬프타 수녀원이 그러했죠. 지금도 이 수녀원에는 “예수의 사랑이 세상을 품고 있다”고 새겨진 동판이 있는데, 거기에서 1258년부터 1302년까지 3명의 성녀가 살며 기도하고 활동했습니다. 하케보른의 게르트루트는 겨우 19살에 원장으로 선출되어 41년간 수도원을 이끌었고, 그녀의 동생 메히틸드, 헬프타의 게르트루트도 이곳에서 살았죠. 그리고 베긴회 회원이었던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드도 핍박을 피해 이 헬프타 수녀원에 머물곤 했죠.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는 일찍이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에 관해 여섯 권의 책을 펴내어 유명해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독일어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또 수도회와 재속성직자들을 비판했기 때문에 비난을 듣곤 했는데, 메히틸드가 보여준 신비주의는 ‘불가사의한, 기이한, 비밀스런’ 그런 게 아닙니다. 공중부양도 아니고 환시나 망아(忘我), 성흔(聖痕) 따위가 아닙니다. 본래 ‘신비주의’란 말은 ‘입을 다물다’라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입니다. 속된 귀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자신의 내면 안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며, 세상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영 안에서 누리는 내적 자유와 해방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는 교회권력이 흔히 요구하던 맹목적인 ‘순종’을 거절합니다. 순종에는 명령하는 사람과 복종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믿는 데서 나온 말이죠. 메히틸드는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명령과 복종 없이 혼연일체가 되는 통합된 자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내 안에 계신 데, 이제 명령하는 것은 ‘나’이면서 동시에 ‘그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거기서 영적 자유가 밝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많이 배우지 못한 신분 낮은 귀족출신이지만, 12살 때부터 31년 동안 지속적으로 ‘불타는 산’이었으며 ‘그치지 않는 샘’이 되어 자신이 경험한 하느님에 대해 즉흥적이고 아주 생동감 있는 언어로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신랑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신부는 그의 고귀한 용모를 바라봄으로 도취되었다. 거대한 강함 가운데 그녀는 제 속에서 나오게 되며, 거대한 눈멀음에서 그녀는 가장 분명하게 본다. ... 그녀가 더 높이 헤매일수록 그래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수록, 그녀는 신성이 반사되는 빛으로 인하여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그녀가 일하면 일할수록, 그녀는 더욱 부드럽게 쉰다. 그녀가 더 많이 파악할수록, 그녀는 더욱 조용히 침묵한다 ... 나는 사랑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이 때문에 어떠한 피조물도 나의 고귀한 특성을 대신할 수 없으며, 사랑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나를 열 수가 없다”

그가 속했던 베긴회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메히틸드의 ‘천국으로 가는 시’가 있습니다.

사막에서
텅빔을 향해 돌아라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며.

홀로 서라
누구의 도움도 청하지 말라
그러면 너의 존재는 고요해질 것이다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위해 노력하라
자유로운 사람들, 그들을 찬미하라.

병자를 돌보라
그러나 홀로 살라
슬픔의 물을 마시는 행복
단순한 삶의 잔가지로
사랑의 불을 태우는 행복.

이렇게 당신은 사막에 살 것이다.

베긴회, 규율도 없이 청빈하며 핍박당하나 자유롭게

교회의 가부장적 위계질서에서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았던 베긴회는 수도회의 수행전통에 기대어 만들어진 평신도공동체입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여성들을 위한 자유의 섬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도로테 죌레는 <신비와 저항>이라는 책에서 “성(性)과 소유에 바탕을 둔 세속성에 맞서는 영적 혁명이었고, 내적 여정을 걷는 여성들의 새로운 표현형태였다”고 말합니다.

베긴회의 회원들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독일의 라인강 지역, 프랑스 북부와 스위스에서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회원이 되기 위해 수녀원에 들어가거나 결혼을 할 때처럼 지참금을 헌납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많은 남성들이 수도회나 사제직을 선택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30대 중반까지 결혼하지 않고 도제로 공부했기 때문에 독신여성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이들은 ‘다른 삶’을 선택했습니다.

특히 신비주의적 감성을 지닌 여성들은 결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은 출산 이후에도 계속되는 아이 양육과 가사노동, 징벌의 권리를 가진 남편에 대한 종속,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하며 결국 과부로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교육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갈망 때문에 베긴회를 찾았습니다.

베긴회는 3명에서 12명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경건하고 명상적이며 동시에 자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만끽했습니다. 공동체는 이들에게 혼자 살아가는 미혼여성이 기대할 수 없었던 보호벽이 되어주었고, 공동으로 예배드리며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공부하는 공동체’로서 교양을 쌓을 수 있었는데, 라틴어를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국어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지요. 또한 그들은 설교하고 서로 가르쳤으며, 조언자가 되어주었고, 다른 여성들을 영적으로 돌보아줄 수 있었습니다.

베긴회는 200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는데, 전통적인 수도원이나 은둔 지역 밖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초창기의 베긴회 여성들은 서약이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았고, 결혼한 사람들조차 아예 배제하지 않았으며, 세상과 멀어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도시문화 안에서 살며, 결혼이나 수도원에 대안이 되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찾아낸 것입니다.

베긴회 회원들은 그들 각자의 집에서 살거나 또는 친구들이나 친척집에 살기도 하였지요. 집 대문에 흰 십자가를 그어서 표시했으며, 단순한 옷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빵을 굽거나 맥주나 양초를 만들거나 실을 잣고 천을 짜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로 병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들을 보살피며, 죽은 이들에게 장례를 치러주었죠. 그들 주변엔 연대감을 느끼는 사제와 수도자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규칙이나 서약 없이 자유롭게 공동체 안팎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긴회 회원이 1만 명이 넘어가고 커지자, 교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지지와 비난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죠. 시스테리안회에서 이들을 지원해 주었고, 특히 네덜란드의 야콥 폰 비트리(1165-1240) 추기경은 베긴회를 열정적으로 대변해주고 보호해 주었죠. 1233년에 교황의 교서인 <동정녀 마리아의 광채>에서는 간접적이나마 베긴회의 집과 단체들을 인정해주었죠. 그러면서 베긴회는 살아남기 위해 점차 교회의 감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규칙을 정해야 했죠. 그들은 독립적인 삶을 꿈꾸며 여전히 여성평신도로서 수공업에 종사하며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았지만 교회의 간섭은 쉽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긴회는 14세기에 이르러 대대적인 핍박을 받게 됩니다. 처음엔 떠돌아 다니던 회원들이, 나중엔 일정한 거주지에 모여 살던 회원들까지 이단(異端)으로 몰리게 된 것이지요. 그들은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처럼 신비주의적 요소를 바탕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덕행이나 업적, 교회의 중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영혼의 순수함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했던 발두스파 등 청빈운동과 비슷했던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청빈하며, 핍박당하나 자유롭게 살았던 베긴회의 무정부주의적 특성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람처럼 성령처럼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으려 했습니다. 회원들은 한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로, 한 가정에서 다른 베긴회의 집이나 수녀원 등으로 옮겨다닐 수 있었고, 언제든 공동체에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아마 이 통제할 수 없음을 교회는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Liebe und Leid, Kampf und Grimm von Rüsenberg, Irmgard

‘수녀’가 아닌 그저 ‘자매’라 서로 부르며

오늘날에도 교회의 무딘 영적 감각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저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살기에는 복음적 감각이 너무 뛰어나고, 성당 안에서 조직적으로 살기엔 너무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더 넓게 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교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 감각과 응답만으로 기꺼이 투신하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이 모여 또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교회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릅니다. 성인은 늘 교회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에도 많은 여성들이 ‘수녀’가 아닌 그저 ‘자매’라 서로 부르며 특별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사부였지만 ‘사제’가 되길 거부했던 성 프란치스코처럼, 교회로부터 안전장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어떤 신분도 거절하던 여성들이 있습니다. 권력과 안전에 대한 유혹을 버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어려운 선택일 것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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