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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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었다
  • 한상봉
  • 승인 2017.06.05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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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6
사진출처=obvious magazine

너무도 많은 첨단의 노래

때로 김수영의 노래가 가슴에 젖어드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심신이 지친 모양이다. 사실상 쉬지 않고 호기심의 향방을 따라 내달려 온 시간들이 도로 위에 질펀하게 깔려서 신음하고 있다. 늘 첨단의 것을 찾아온 세월이다. 첨단의 것은 늘 진보의 길 위에 있고, 나무가 죽기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듯이, 나는 진보의 길 위에만 서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시달렸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가톨릭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은 없었지만, 정확히 그 안에 얽혀들지도 않았다. 그건 나름대로 ‘나의 자유’에 대한 배려였다. 무엇인가 제도의 틀 안에 머무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조직의 생리에서 자유를 박탈당하기 쉽고, 나는 자유로이 내가 부를 첨단의 노래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가톨릭 교회의 제도권 바깥에서 생활했다.

돌아보면, 간사로 활동해 왔던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이 모든 것이 교회 안에서 비공인 단체라고 부르는 교회 안의 재야 단체였던 것이다. 그 첨단의 노래를 그나마 받아 줄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호교론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하느님께서는 선교사보다 먼저 이 땅에 오셨음을,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 안에 이미 넘치게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펼쳐지고 있었음을, 그리스도교는 단지 이를 새로운 언어와 방식으로 풍요롭게 하려는 하느님의 배려임을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제1세계의 교리를 주입시킬 때에는 제3세계의 해방 신학을 말해야 했으며, 교회가 제 몰골을 화장하느라 부산할 때에는 교회가 거리에 나가서 외쳐야 함을 깨달았다. 민족 해방ㆍ민중 해방을 위한 신학을 요청하였다고 확신했다. 교회 첨탑 위에서 현기증을 일으키거나 감실 속에서 어두운 영어(囹圄)의 생활을 감당해야 했던 하느님을 만백성, 그 가운데서도 가난한 이들의 품으로 되돌아가시도록 석방시키라고 탄원하였다. 정치적 남성 신학에 대항하여 발언하기 시작한 여성 신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제는 뭇 생명의 총체적 해방을 바라는 생태 신학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첨단은 늘상 현실 속에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지만, 그 호기심과 미래에 대한 전망은 끊임없이 자신을 유혹하는 매력 덩어리였기에, 여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내 온전한 자유의 반납’이라 여겼다. 그러나 실상 이는 하나의 마음결이며, 근기(根氣)이며, 어쩌면 나의 생리(生理)요 취향(趣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자기 만족적 신앙이요 자기 만족적 삶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은 후회가 없다. 나는 나의 자유를 살았으므로. 단지 그 가운데서 혹시나 미루어 두고 보살피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하고 넘어간 상처입은 영혼은 없었는지, 더 중요하지만 너무나 가늘고 작아서 듣지 못한 신음 소리는 어디에 없었는지, 오히려 숨어 있는 이기심과 명예욕을 남몰래 더욱 키워 온 것은 아닌지 두려울 뿐이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될 법한 것은 내가 말하고 선포했던 모든 언사(言辭)들이 내 삶과 생활에 그다지 반영되지 못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얼마나 충분히 제 말에 앞서 제 삶을 돌아보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인격과 관련된 문제이며, 결국 그 사람의 구원에 관련된 궁극적 질문에 답변하는 일이다. “너나 잘해!” 이 말 한 마디면 나의 말문은 그대로 얼어 버릴 참이다.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었다

시인 김수영

김수영은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 왔다”고 썼다. ‘이제 그만’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절실한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음을 반성하는 말일 게다. 그래서 김수영은 이렇게 노래한다.

……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김수영, 「서시」 (부분)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는 말이 있다. 이젠 보다 근본적인 반성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높이 뛰지 못하게 되더라도 주저앉아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 자신의 아이엠에프, 우리 자신의 영혼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만일 이 시기를 나 자신과 그럭저럭 타협하며 넘기거나, 고민을 진작에 접어 두고 적당한 마음 자리에 찾아가 눕는다면, 우리는 김수영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하고 불렀던 탄식의 노래를 끝내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만일 제 삶을 진지하게 감당하려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했던가. <준주성범>에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는 자”라는 말이 있던가. 김수영이 혁명은 안 되고 방을 바꾼 이유는 그가 지식인의 범주를 차마 스스로 넘어설 수 없는 비애를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손 노동이 결여된 두뇌 노동만으론 사람이 제구실을 온전히 하기 힘든 법이다. 생계를 위한 노동을 넘어서서 노동 자체를 사람된 보람, 목숨을 부지하는 생명됨의 보람으로 살지 못하는 인생이란 사실상 무언가 빠뜨리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부유한 민중 신학자가 추상적 가난 속에 파묻혀 허위 의식을 갖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글쎄, 김수영은 <강가에서>라는 시에서 일요일이면 찾아와 강으로 가자고, 산보하자고 조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강가에 가서 술을 사 주면서, 차비만 남겨 놓고 술을 사 주면서, 그러나 결국 차비마저도 술값으로 지불하면서도 빠짐없이 찾아와 강가로 산책하자던 사람, 그리곤 반드시 4킬로미터 가량을 걸어서 귀가하는 그이, 김수영보다 식구가 일곱 명이나 더 많다는 그이의 모습에서 김수영은 ‘우묵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깨닫는다.

그는 나보다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속(俗)돼 간다 속(俗)돼 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사진출처= mldfg.tumblr.com

아카데미즘의 심장에 뚫린 구멍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서 몇 차례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삶의 환경이 바뀌든지 바뀌지 않든지,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인생의 좌표가 바뀌고, 행선지가 엇갈리며, 요동 치는 마음이 전혀 뜬금없는 방향으로 휘돌아간다. 막을 길 없다. 이 전환기에 서 있는 사람은 심사숙고중이다.

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 갑자기 방향타를 잃고 멈추어 버린 적이 있었다. 내 잔잔한 관념에 균열이 생기던 때가 있었다. 1991년 당시 일하던 사무실에서 ‘노동헌장 반포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방 신학에 심취하던 때였는데, 새로운 주제가 다가왔다. 노동 신학, 그렇게 이름을 붙여도 좋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무튼 ‘노동ㆍ노동자ㆍ노동 문제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다. 먹물들은 식자(識者)들이 늘 그러하듯이, 우선 노동 신학에 대한 자료 수집에 골몰했다. 마침 필리핀 방문이란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

필리핀은 당시 ‘민중의 힘’을 통하여 마르코스 대통령을 굴복시키는 혁명을 성취하였고,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등장으로 방향타를 잃어버린 민중 운동권이 ‘완전한 개혁’을 위하여 다시금 힘을 결집하려던 시기였다. 나는 수 년간 노동 운동에 투신해 왔던 에밀리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수녀를 만날 수 있었고, 대번에 여쭈었다. “노동 신학에 관한 자료는 없나요?” 그 수녀는 대답 대신에 다른 질문을 내게 던졌다. “어느 노동자가 당신에게 신학을 해달라고 요구합디까?” 나의 질문은 학구적인 질문이었고, 수녀의 질문은 실천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그 동안 노동자들의 삶과 운명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했고, 실상 노동자들을 피부로 느껴 본 적도 별로 없었음을 깨달았다. 운명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처지에 신학은 무슨 신학…… 결국 그 동안 내가 신주 단지처럼 여겼던 ‘이론’이 무너져 내리는 진통을 느껴야 했다. 식자들의 허위 의식을 깨달았다. 그 뒤로 나는 한동안 아카데미즘의 심장에 뚫린 구멍을 채우지 못했다.

급기야 노동 현장에 들어가기로 작심을 했다. 노동 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신학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노동자의 발견, 그리고 노동의 발견은 솔직히 너무 힘겨운 짐이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초라해졌고, 생산 활동에 전혀 무능력한 자화상을 만나야 했다.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이 다 그들처럼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같이 사는 녀석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이걸 겸손이라 말하는 건 옳지 않다. 단지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그 다음은 그 사람의 몫으로 남겨진다. 내 관성에 니코틴처럼 인이 박힌 적(敵)들과 다른 모든 주변의 적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되짚고 되짚으며 살아 내야 할 몫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김수영, 「아픈 몸이」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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