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지배계급과 결탁한 교회와 기초교회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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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지배계급과 결탁한 교회와 기초교회공동체
  • 한상봉
  • 승인 2017.06.0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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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과 은총 4강

지배계급과 결탁한 교회

교회는 ‘종교-사회적(제도적) 영역’과 ‘교회-성사적 영역’이 있다. 그러나 제도교회는 성사의 도구이며, 교회의 거룩한 과업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사회적 틀이다.

종교-사회적 영역인 제도교회는 자기 신앙의 내용을 표현하는 교리와 전례, 조직 구조를 미리 (초월적 힘에 의해) 설정해 놓은 게 아니라, 교회 형성 과정의 산물이다. 이는 해당시기의 사회적 상황과 계시를 드러내는 신앙인들의 종교적 체험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역사적 결과물이다.

계급사회에서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에게 자신의 지배를 설득시키고 이데올로기적 합의로 그들을 압도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통합하고 심화시키며 확장하려고 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설득을 위해 필요한 것이 종교-교회 영역의 동의와 지원이다. 그래서 지배 계급은 교회가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자신을 조직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회는 보수적인 집단이 되며, 지배 계급의 기능을 ‘하느님 이름으로’ 합법화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통일을 위해 교회의 단일성을 요구하고 니케아공의회를 주관하면서 교리마저 하나로 확정지으려 했다. 그 당시 이념은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교회”였으며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은 철저히 단죄 받았다.

그러나 교회는 지배 계급에만 순응하도록 예정된 존재가 아니다. 피지배 계급도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에 지지와 지원을 요청한다. 그들은 교회가 지배계급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정당화 하라고 요청한다.

따라서 교회는 계급갈등의 상황에서는 지배계급의 권력확장에 이바지 하든지 혁명적 기능을 수행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교회가 침묵하는 것은 결국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배권력에게 힘을 보태는 결과를 낳는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스스로 자기 안에 계급적 구조를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의 지배영역에 합류하고 동조하는 경우이다. 일반 계급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영역에서도 종교적 생산수단을 차지한 자가 주권을 장악한다.

콘스탄틴 전환 이후 성직자들은 점차 민중(평신도)에게 허용된 종교적 생산수단(신학과 자산)을 빼앗아 독점하기 시작했다. 초기교회에서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목적 결정과 사목자 선택의 권리를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문역에 그치거나 아예 의사결정 구조에서 배제되고, 주변인으로 밀려났다.

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사회적 분업처럼, 교회에서도 종교적 분업이 일어나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게 곧 성직자들이다. ‘성직’이란 전통적으로 ‘봉사직분’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권력의 성격을 띠었다. 성직자들을 비롯한 교회 관리-전문직은 종교적 생산라인의 주축을 관리하며 종교적-상징적 상품을 생산해서 신자/소비자들에게 공급한다.

이때 ‘자본’을 형성하는 대주주(정치권력)와 소액주주 사이에서 성직자들은 갈등하며 효율성과 전망을 고려하며 영업전략/사목정책을 수립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자신의 불평등한 계급구조와 마찬가지로 편중된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회영역/지배계급과 조화를 이루어 왔다. 이때 피지배 영역에서는 이런 교회를 ‘반동 보수 교회’로 비판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 역시 피지배영역이 지배영역에 저항하는 가운데, ‘천당-지옥설’을 통해 민중을 길들이는 교회의 보수적 종교 상품에 대한 비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교회는 지배-피지배를 둘러싼 사회상황에서 자유롭게 결정하는 ‘자율성’의 영역이 있다. 이는 교회의 신원에서 직접 나오는 자율성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교 창립자인 예수님에 대한 서술이다. 교회의 근본적인 이상은 생산수단의 균형과 형제애적 나눔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창립자인 예수님과 그분의 이상이 새겨져 있는 성경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교회는 언제든지 예언적이고 해방적인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사진출처=popsugar.com

교회와 하층계급

교회가 ‘종교의 이상적 지향’을 일깨우고, 민중해방에 대한 종교적 세계관을 전개시킨다면, 교회는 지배계급에 반기를 드는 강력한 혁명적 기능을 수행한다. 하층계급의 종교적 관심은 해방운동을 합법화 시키고, 그들을 지배해 온 세력을 비합법화 또는 불법화시키는 방향으로 아간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비전은 가난한 이들을 우위에 두고 또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친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역사적 존재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이 미천한 이들에게 맡겨져 있다고 가르쳤으며, 그분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사회의 갈등 상황에서 지배계급이 행한 타살이었다. 이렇게 신앙의 상징체계가 재해석된다면, 그 상징의 해방적 차원이 현실이 되고, 죽음도 이런 행진을 가로막지 못한다.

이러한 사태는 지배적인 교회전통을 파괴하지 않고 “복음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발생한다. 이처럼 신앙의 원천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전통의 어긋난 균열을 치유하고 재통합하는 것은 종교적 지식인(신학자)의 몫이다. 이 일은 평신도-민중-신학자에게 맡겨져 있다. 이들 진보적 신학자들은 하층계급과의 연대를 통하여 민중들의 해방을 향한 열망을 알아듣고, 체계화 하며, 그들이 직접 자신들의 열망을 표현하도록 돕고, 그들의 이상이 사도들의 이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수행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교회기초공동체는 종교적 사회적으로 권력을 박탈당한 하층계급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 교회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이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상을 품고 있기에 거룩하고, 만인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도적 교회이다.

기초교회공동체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는 교회기초공동체를 “기쁨과 희망의 원인”(96,262,1309항)이며 “해방운동의 중심”(96항)이라고 극찬했다. 기초교회공동체는 라틴아메리카 새롭게 탄생한 민중교회이며, 사제가 태부족한 교회현실에서 신앙을 보존하고 일꾼을 양성하는 못자리였다. 또한 해방신학을 낳게 한 산실이기도 했다.

교회기초공동체는 대개 15-20가구로 구성된다. 그들은 1주일에 1~2번 모여 성경을 읽고, 삶을 나누며, 자신들의 기도문을 만들고, 복음에 비추어 현실문제를 신앙 안에서 해결해 가려고 했다. 결국 평신도들이 이 공동체에서 말문을 열기 시작했으며, 자신을 교구에 속한 일개 교구민의 하나가 아니라 사도로서 새로운 교회를 창조하고 있다. 그들은 구조적 폭력에 의해 압박받는 민중이며 동시에 의식화를 통해 해방하는 민중이기도 했다.

제도교회(교구)와 기초교회공동체는 상보적 관계에 있다. 제도교회는 공동체를 통해 민중에게 다가가며, 그들의 고통과 희망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교회를 현실화 한다. 따라서 교회기초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천명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복음은 교회기초공동체의 중심에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복음의 빛에 비추어 자신들의 현실을 성찰하는데,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전해진 복음은 그들에게 희망과 약속과 기쁨을 전해주는 메시지였다. 니카라과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가 이런 공동체(솔렌티나메 공동체)에서 농민들과 더불어 복음을 읽고 나눈 대화는 <말씀이 우리와 함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자신들과 동일시하며 실제적인 의미를 찾아나갈 줄 안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분도출판사, 1981

기초교회공동체는 ‘교회 조직’이라기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이다.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로 결심할 때마다 새로운 교회가 하나씩 탄생한다. 이들은 평등한 형제자매로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서 필요한 일에 누구나 사도로서 참여한다. 교회의 사도성은 교황이나 주교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특성이다.

기초교회공동체는 해방의 표지와 도구로서 세상에 열린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민중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민중이 동원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또한 기초교회공동체에서 양성된 일꾼들이 다른 사회운동 단체나 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세상에 봉사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주된 관심사는 사회운동의 조직이 아니라, 민중운동을 촉발하고 강화하는 일이다.

기초교회공동체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삶을 경축하고 지지하고 지원한다. 그들의 성인공경과 마리아신심과 종교축제 등은 ‘가톨리시즘의 타락한 형태’가 아니라 무의식과 상징을 통해 드러나는 ‘대중의 신앙감각’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 개인의 사업 성공과 건강을 바랄뿐 아니라, 공동체가 겪는 상황을 상기하고 경축하고, 희망을 드러낸다. 따라서 공식전례뿐 아니라 창조적인 공동체 전례가 발생하는 창조의 샘이다. 민중은 경축하는 법을 알고 있기에 희망을 지닌 백성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더 이상 억압받는 민중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자신들의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민중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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