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허를 찔러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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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허를 찔러야 할 때입니다
  • 한상봉
  • 승인 2017.05.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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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라는 간절함

사순절이면 어려서부터 늘 입에 외곤 하던 성가가 있지요. “수난 기약 다다르니 산으로 피해 가시어, 근심하고 답답하사 피땀이 땅을 적시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고 죽으니, 우리들은 통회하여 보속과 사랑 드리세.”

곡조의 애절함 때문인지 이 노래를 응얼거리는 동안엔 뭔가 묵직한 심경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죽음이란 한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라는 관점에 서면,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통과 의례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란 항상 우리에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홀로 죽는 이의 고독함과 남는 자의 내버려짐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성문 밖에서 패배자로 죽었으며, 그것도 제자들이 다 도망 간 뒤에, 그분을 따르던 여자들만이 남아 멀찍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지난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저는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응급실로 들어왔던 환자들은 대부분 토요일을 넘기지 않고 입원실로 옮겨졌지만, 산소 호흡기가 달려 있는 병실이 비질 않아 오랫동안 응급실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나는 호흡 곤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므로 일반 병실이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결핵성 늑막염이 제 병명입니다. 어찌 되었던 그 사흘을 지내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노릇이었습니다. 응급실은 밤이고 낮이고 불을 훤히 밝히고, 도무지 쉽게 잠을 청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뻔질나게 환자들이 바뀌어 가면서 신음하는 소리, 가래 끓는 소리, 의료 기구 가동되는 소음이 귀를 괴롭혔습니다. 죽음이 경각에 달려 있는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같은 줄 베드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는 결국 주일날 오전을 넘기지 못하고, 산소 호흡기를 떼고 영안실로 옮겨졌습니다. 죽음이란 사실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인지 느끼게 합니다. 산 목숨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깨닫게 합니다. 침대에 누워 있자니, 오만 가지 생각이 들며 나며 합니다.

병실로 옮겨지면서야 환자들에게서 생기를 느끼게 됩니다. 생명에 대한 의지는 가르치지 않아도, 의식하지 않아도, 몸 자체가 스스로 얼마나 열망하는지 문득 새삼 깨닫습니다. 부활절 새벽에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막달레나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 주었듯이, 환자들은 대체로 새로운 새벽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키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병실문을 젖히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이젠 어찌저찌 해야지! 하는 새로운 다짐 하나씩 품고 사는 게 환자들 심경일 것입니다.

그래서 비나리합니다. 죽은 목숨이 살아났다는 부활절 아침이 오면 상처입은 목숨들이 죄다 자리 털고 일어나 눈부신 봄햇살을 맞으러 거리로 공원으로 산으로 강으로 걸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사진=한상봉

호흡 곤란, 그 후

여의도로 오기에 앞서 일 주일을 전주에서 지냈습니다. 터잡고 살 만한 시골집을 구하러 전주로 내려간 첫날밤에 일이 생겼습니다. 동네 병원에서 담이 들었다는 진단을 받기는 했지만, 다른 자각 증상은 없었기 때문에 내 마음이 내 몸을 그냥 방치해 두었던 모양입니다. 도무지 주인에게서 제대로 관심받지 못하던 몸이 신경질이 났던가, 아니면 참다 못해 사보타지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날 밤도 기분 좋게 벗들과 더불어 술 한 잔 걸쳤는데, 맛나게 담배도 피웠는데, 갑자기 내 몸이 숨쉬기를 망설였습니다. 이른바 ‘호흡 곤란’입니다.

전주 한마음병원에서 주사 한 방 맞고서 호흡은 풀렸지만, X-레이를 찍어 보니 늑막에 물이 한가득 찼다고 합니다. 주사기로 물 빼내면 간단하지만, 늑막에 고인 게 물만이 아니라서 주사로는 어림없다 합니다. 호스를 박든지 해야 한다는데, 이왕이면 연고지에서 하는 게 병 구완에 좋을 듯 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서울로 올라와 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것입니다. 약만 꾸준히 잘 먹고 보신(補身)하면 떨어질 병이랍니다. 다만 쉽게 피곤해지니, 일을 사서 하는 습성이 배인 나는 걱정이 많아집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아프고 나서는 도무지 일하기가 싫어집니다. 신문 잡지도 건성으로 보게 되고, 게으름만 늘고 있습니다. 당연히 글쓰기는 고역입니다.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제 몸 추스르고 제 생각 여미는 것도 버거운 차에, 바깥일은 그저 치르어야 할 부채처럼 여겨집니다. 많이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빈틈은 어디인가

이즈막에 내 안팎에서 일어나는 흐름들을 바라보면서, 만사에 대하여 ‘일단 정지’하라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내 삶의 빈틈을 살피라는 전갈 같습니다. 이참에 예전에 읽은 나희덕 님의 시가 굉굉 아늑하고도 깊숙한 진동으로 울립니다.

때로는 타고 가는 기차의 앞머리가 보인다
속도를 조금씩 늦추고
포물선을 그리며 철로를 지날 때
그 휘어짐 속에서는 보인다
어떤 대열 속에 몸을 싣고 있다는 것과
대열이 어디로 더듬이를 옮겨가는지
질주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게 언뜻 보인다
풍경보다 내 몸이 먼저 보이는 때가 있다
절망의 아가리 속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조차
고개를 돌리지 않고 지켜보아야 하는
참담함이여, 이 느리고도 쓸쓸한 대면이여
기차는 천천히 제 옆구리를 보여준다
어서 나를 찌르라고
지금은 허를 찔러야 할 때라고
(나희덕, 허)

그렇다면 나를 둘러싼 이 세계가 거듭거듭 보여주는, 그러나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나의 빈틈은 어디에 있을까요? 결국 ‘글쟁이’로 낙인 찍힌 나의 허(虛)는 ‘글’과 ‘삶’이 그다지 일치하지 않음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함을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하던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는 서른 해를 목수의 작업대 주변에서, 아니면 목수로서 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작업대는 그의 삶의 현장이었으며, 땀흘려 일하는 이들의 성소(聖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장소인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곧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겪어야 할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 노고와 보람이 교차하는 곳을 상징합니다. 예수는 세상과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제 몸을 십자나무에 못박았습니다.

평생 동안 작업대에서 다루던 그 나무들처럼, 스스로 나무가 되어 제 몸에 못질을 해서 분열된 세상을 일치시킴으로써, 당신의 선포를 몸으로 증거하였답니다. 목수는 나무와 못을 사용해서 집을 짓습니다. 참된 목수였던 예수는 상채기 난 우주(세상, 집)를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입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기서만이 참사랑이 발생한다는 걸 예수는 눈치 채신 모양입니다. 따라서 예수처럼 목수일로 생계를 삼았던 시인 유용주가 한 말은 옳습니다.

못은 그대 향한 집중 파탄이다
단절과 단절을 화해시키는 불가슴이다
격정의 피, 단독 투신이다
그대 시선 너무나 까마득해
불가슴으로 다가갈 수 없을 때에도
목수들 망치 놓지 않는다
못주머니 풀지 않는다
못은 상처를 위한 가장 뚜럿한 파탄,
좋은 목수들 끈질기게 못질 계속한다
그리하여 못은 파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까이 가려 하는 것에만 전력투구한다
모든 사랑은,
빛나는 상처의 못박힘들이다.
(유용주, 못)

사진=한상봉

입질을 하기 전에 먼저 몸이 살아야 함

열매는 무르익어야 벌어진다는데, 때가 되었나 봅니다. 이번 설날에 식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부산 사시는 둘째형이 이런 말을 건네었답니다. “너는 옛날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입으로만 먹고사는구나.……” 우스갯소리로 하신 말이었겠지만, 그냥 귓등으로 넘겨 두기엔 힘들더군요. 다량 투입되는 결핵약으로 무디어졌던 뇌세포가 발기하고, 잠시 머리 속이 먹먹해집니다. 이 말머리(화두)를 충분히 성찰해 봐야 할 모양입니다.

지금은 백석 ‘하늘의 문 묘역’에 누워 계시지만 아버지는 목수였고, 아버지의 작업대가 놓여 있던 집 안마당은 늘 나무와 톱밥과 연장 들로 어수선하였습니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둘째형이 아버지를 도와서 일을 거드는 동안에, 나는 나무토막을 주어다가 총이며 무전기를 만들고 전쟁 놀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입니다. 그런 탓일까, 그 후로도 형은 아버지가 믿어 주는 아들이었고, 나는 그저 재롱둥이로 만족해야 하였지요.

형은 지금 비행기를 고치면서 먹고삽니다. 나는 무엇으로 먹고사는가 하면 글을 쓰고 입담으로 먹고삽니다. 내가 퍼질러 놓은 입담이 ‘거룩한 노동’과 ‘아름다운 휴식’에 대한 것이었다면, 형은 ‘거룩하다’는 노동을 몸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정말 쓸모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그 쓸모 있는 물건을 직접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요?

이런 생각이 어쩌면 아직도 남아 있는 1980년대식의 콤플렉스인지도 모릅니다. 노동의 우위성, 신성한 노동 등등에 집착하는 것은 1980년대의 가치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전범으로 삼아 오랜 수도원 전통에서나 샤를르 드 푸코, 조셉 까르댕 같은 이들이 노동과 가난을 근원적 가치로 삼은 것은 생태학적 미래 사회를 위해서도 유효한 가치일 것입니다. 이는 그저 몸으로 하는 ‘단순 노동’마저도 의미있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편리함을 구하기보다 조금 더 몸을 부리고, 질박한 생활 양식을 좋아하게 된다면, 세상은 무척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하는 폼’만 잡는다는 데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의자 공장에 들어간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게 그만 ‘폼’만 잡다 말아 버렸던 것입니다. ‘노동 신학’을 하겠노라고, 그러기 위해선 먼저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공장에 들어간 지 두 달 반 만에 나는 공장을 떠났습니다. 관념으로 버티기엔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번엔 전제 없이 뿌리 박는 노동이 요청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생을 담아 낼 터전과 그릇을 얻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듯싶습니다.

시인 유용주 님은 「막노동을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품을 판다는 것인데, 우스운 것은 품보다 포옴을 파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야. 정당하게 품을 팔아야 바른 삶을 일구어 나갈 것인데, 폼부터 먼저 팔려고 드니 한심한 일 아닌가. 먼저 정직하게 품을 팔 것, 품파는 데 자신없는 사람이 포옴을 먼저 팔려고 든다는 것을 명심하게. 땀냄새가 얼마나 구수한 줄 아나. 그 냄새를 진짜 맡을 때까지 치열하게 자신을 밀어붙일 것! 건투를 비네.”

사진=한상봉

입농(入農)을 생각하며

차분히 장기적으로 농사 지을 생각을 합니다. 전원 주택이 아니라 농가(農家)에 터를 깃들이고, 흙과 더불어 살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몸이 허약하다면, 몸이 허락하는 수준에서 노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농사를 모른다면 남은 생애를 농사를 배우는 데 허비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내게는 ‘귀농’(歸農)이란 말이 도무지 맞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농사에 입문하는 ‘입농’(入農)입니다. 그래서 농문(農門)에 호적을 올리고 싶은 게지요.

생각이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언젠가 전남 나주에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게 나주 평야일까요, 논둑길을 달리다가 뻘건 흙빛을 보면서, 옆자리에 앉은 후배에게 “저 흙을 막 퍼먹고 싶은 충동이 생기네”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간절하면 세상이 도무지 다르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마음만이 아니라, 실제로 흙을 집어먹으며 뜨거운 눈물 흘릴 수 있다면, 그때야 나도 ‘사람’이 된 것이라고요.

사람이 부모의 은덕으로 몸을 입고 태어났다고 다 사람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철들어야 사람입니다. 뜻을 세우고, 그 뜻과 자신이 온전히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참사람’ 하나 탄생하는 것이겠지요. 두고두고 자기더러 ‘사람 좀 되라’고 다그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세가 있다면 이승에서 내가 얻은 깨달음, 사람됨의 수준을 그대로 입고 거기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빛 안에서 살았던 사람은 죽어서도 가장 익숙한 빛 속으로 걸어갈 것입니다.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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