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은총을 독점하는 교회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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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은총을 독점하는 교회권력
  • 한상봉
  • 승인 2017.05.2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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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과 은총 3강

 

 

“교회는 세속적 통치자와 유대관계를 끊고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과 함께 복음적 청빈으로 돌아가 박해와 고문과 죽음 앞에서 두려움 없이 예언자적 용기를 지니고 고난받는 종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리라는 희망을 가져도 좋을까”(보프)

제도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세상에 증거하는 신도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를 조직화 한 교계제도, 교리, 전례, 경전, 전통을 일컫는다. 이런 제도화된 조직을 통해 공동체는 안정과 일치, 복음전파와 통치에 필요한 구조를 갖추었다. 어떤 신앙공동체도 제도화 없이 존속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제도화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교회의 제도화가 권력을 낳고, 교회독재에 문을 열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권력이라도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는 액튼 경(Load Acton)의 말을 유념해야 한다.

사진출처=adaltaredei.tumblr.com

주교란 누구인가

본래 그리스도교는 ‘변혁의 산물’이었다. 유대교는 초기교회를 “나자렛 예수를 숭배하는 유대인 분파”로 보았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자신들의 신앙공동체를 유대교와 구분하여 ‘그리스도교’(Christianismo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나름의 의식과 교리와 생활방식을 지닌 신도들의 공동체라는 뜻이다. 이들은 단지 유대교의 연장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적 삶을 따라 살면서 새 시대, 새 사람, 새 약속을 제시하였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준 힘은 신앙과 순교자들의 용기였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주교 없이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주교로부터 생긴다.”(필라델피아 3,1)고 말했다. 또한 “주교는 그리스도의 대변자이며 하느님의 대변자”(마네시아 3,1, 스미르나 8,1)이며 “주교는 하느님의 사자이며 그리스도와 같이 존경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교권주의와 상관이 없다.

성 이냐시오는 주교는 로마황제 트라야누스의 박해로 체포되어 107년 로마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순교했다. 그는 압송 도중 그리스도, 교회조직,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7통의 편지를 써서 스미르나 등 여러 교회에 보냈다. 이처럼 이냐시오가 말한 ‘주교의 권위’는 법률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는 몸인 공동체가 선출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신앙공동체들은 투표로 자신들의 사제를 뽑았고, 뽑힌 사제는 자신을 선택해 준 공동체에 매이는 몸이 되었다. 로마에서 제시하는 후보 명단 같은 것은 결코 없었다. 심지어 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주교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국가행정관이라는 공직을 맡고 있었으며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공동체 주교로 호출되었을 때 자신이 이제 막 회심한 사람이라고 항변했지만, 히포의 공동체는 그를 설득해 주교로 삼았고, 391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어떤 공동체는 그 도시의 방문자를 주저앉혀 주교로 삼았고, 결혼한 사람도 주교가 될 수 있었다.

Emperor Constantino statue in Capitoline Museums, Rome 2016

제국교회의 출현

초기교회는 불법적 종교로 제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자, 점차 호교론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제국에 이로울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옹호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누치오 펠릭스는 <옥타비우스>(Octavius)에서 “그리스도교인은 현 시대의 철학자이며 과거의 철학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인이었다”는 말까지 했다. 결국 311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관용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선포했으며, 로마법에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교회는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제국의 불법종교에서 공식종교이자 신성한 제국 이데올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사제들을 이교도 사제들과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재정적 지원도 제공했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는 <복음의 준비>에서 이 정치종교적 사건을 “구원사의 정점이며 성경적 약속의 실현”이라고 해석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아예 국교로 선포했다. 이때부터 이교도는 “미친 자”로 간주되었고, 정치-종교적 질서에 대한 반역자로 처벌되었다. 이렇게 교회는 주변화된 집단에서 ‘보편교회’가 된다.

이후 제국의 지도자들이 교회에 관여함으로써 이교도의 그리스도교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이교화가 진행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313년까지도 그리스도교는 제도라기보다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제국에 편입되자마자, 교회는 제국의 법률, 교구조직, 관료적 집중화, 지위, 직함 등을 물려받게 되었다. 교회와 종교의 개념 역시 로마화 되어 법률적 지위를 얻었다. 신앙(fides), 성사(sacramentum), 성직(ordo), 백성(plebs), 교회(ecclesia) 등.

교황, 하느님의 대리자

11세기에 들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교황령(1075)을 발표해 성직매매나 교회에 대한 세속군주의 간섭을 배제하였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느님의 권능을 반영한 존재는 하느님의 대리자인 ‘교황뿐’이라며, “교황만이 모든 왕을 그 아래 거느릴 수 있”으며 “아무도 교황을 심판하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미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지니고 있는 고위 성직자들을 황제가 임명한다면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이 사라질 것을 염려했다. 밀라노 대주교의 서임권을 두고 다투던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사건은 유명하다. 당시 교황이 머물던 카노사에서 황제는 사흘 밤낮을 빌어서 교황에게 용서를 청해야 했다.

이런 교황권이 가능했던 이유는 ‘콘스탄티누스의 증여’(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라는 위조된 문서 때문이었다. 이 문서는 ‘황제 교황주의’를 주장하던 카를 대제가 로마에 와서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되었다고 추측되는 이 문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서로마 제국 지역에 대한 모든 관할권과 통수권을 실베스테르 1세 교황에게 증여했다는 내용으로, 서유럽의 교황권 우위를 입증하는 문서였다. 이 문서는 1440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에 의해 위조되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머리’라는 표현이 교황에게도 적용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교황은 하느님과 교회와 주교, 제국에서 모든 가치를 지닌 자로 선포된다. 이를 두고 “교황은 첫 교황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승자요 후계자”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Agostino Veneziano (Print made by); Portrait of Pope Paul III, half-length in profile wearing the Papal tiara. 1536. British Museum

제국교회에 대한 비열한 옹호

“이러한 제국(제도)교회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과 같다”고 레오나르도 보프는 말한다. 교황과 교황청은 모든 전술적 결정을 내리고, 지역교회와 교구는 이를 실행하는 전세계에 뻗쳐 있는 지점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권력유형은 병리적 현상을 낳는데, 창조적 정신과 대화 및 비판정신의 압살이다. 어쩌면 복음적 가치일수도 있는 복종과 겸양, 체념과 고통의 감수, 원칙 고수와 위계질서 등이 기존 권력의 정당화와 비열한 옹호를 위해 사용되었다.

교황이 절대권력을 쥐게 되면서 기성질서에 도전하는 것은 무엇이나 단죄받았다. 교회는 종교개혁(1521)에 반대하고, 혁명(1789)에 반대하고, 심지어 ‘양심의 자유’에도 반대하였다.

1846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양심의 자유를 “미친 짓”(Deliramentum; DS 2730)이라 비판하고, 의사표현의 자유는 “가장 사악한 죄”(Deliramentum; DS 2731)로 배척했다. 계몽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도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태도는 권력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만 분배된다. 이런 권위적인 교회가 역사적으로 파시즘과 나치즘 등 전체주의에 동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교회는 자신의 생존이익과 복음을 분리시키는 유연성을 보였다. 나치즘의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독일 주교들은 “가톨릭은 다른 정부형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치 정부 형태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제도교회는 어느 특정지역에서 자신이 배척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면 예언자적 사명을 쉽게 저버린다. 이는 초기교회가 보여준 모습과 다른 것이었다. 초기 교회는 로마제국에 맞서 고통을 달게 받았으며 용감하게 순교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끝내 지켜주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생존에 급급해하지 않았다. 당장의 성공과 실패, 생존과 죽음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주교들은 선봉에 서서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을 위해 죽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후 교회는 기회주의자가 되었다. 교회의 성공여부는 복음적 요청을 희생하더라도, 전체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심성과 타협에 달려 있었다. 주교들은 죽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데 나서지 않고, 신자들에게는 제도교회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폭력을 단죄하는 전통을 유지해 왔으나, 스페인 내전(1936-39)처럼 교회가 불타고 사제가 투옥되는 상황에서는 폭력사용을 달리 해석했다. 스페인 주교단이 인민전선에 맞서는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자 비오 11세 교황은 정당한 반란과 부당한 반란을 구분지었다. 처음에는 이랬다가 나중에는 저렇게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교회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by Joan Brand-Landkamer, artist | St. James Roman Catholic Cathedral, Seattle, Washington

교회권력의 집중은 비복음적이다

이러한 교회를 개혁하려면, 교회를 “권력자의 눈이 아니라 권력의 전망을 내던진 이들의 눈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프는 말한다.

예수는 교회를 설파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을 주고, 우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정의와 평화, 용서와 사랑이 깃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예수는 기성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람들 위해 군림하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라고 요청했다.

“예수는 복종하되 자유롭고 비판적이며, 충실하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권력자들에게는 종이 되라고, 형제들에게는 권력욕을 버리라고 하셨다. 형제애, 열린 대화, 보잘 것 없는 이들과 죄인, 심지어 원수에게도 손을 내미는 차별 없는 사랑을 요청했다.”(보프)

예수는 사람들 사이에 계층과 분열을 조장하는 특권을 축복하지 않았다. 예수의 행적과 말씀에서 드러나는 권한(exousia)은 사랑에서 온 것이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여기서 예수가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그분의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이며, 이 권한은 지배의 권한과 다른 사랑의 권한이다. 사랑의 권한은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우며, 자신의 약함과 베품과 용서의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는 힘이다. 예수는 항상 자신의 삶 속에서 이 권한을 드러내셨다. 그는 지배 권력을 거부하였고, 기적의 권능조차 거절하고(마르 15,32), 오히려 연약하게 죽기를 원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 42-45)

그가 교황이든 주교든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변하는 자는 예수처럼 종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 이교도의 군주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가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력이나 지배도 반대했다고 전한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공동번역:지도자]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10)

그런데 교회제도는 그리스도가 원하지 않았던 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이상한 일이다. 교회공동체에 요청된 권한은 ‘봉사’였다. 최초의 직무자였던 ‘부제’가 봉사자였음을 기억하라. 이런 점에서 교회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를 삼고 있는 이 복음서 구절은 전후맥락을 분명히 살펴야 한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공동번역; 배척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 말은 교회 안에서 교회권력이 지니는 배타적 특권을 옹호하는 발언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가 72명의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선교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발언으로, 복음에 적대적인 세상에 대한 발언이지, 교계제도와 신자들의 관계에 대한 말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듣고 있는 제자들처럼 세상에 ‘파견된 선교사’이다. 그런데 이들이 복음을 전했는데 배척당했다면, 이는 그리스도가 배척당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은총을 독점하는 성직자

교회가 권력화 되면서 성직자들은 은총의 독점적 소유자로 존재했다. 오직 사제만이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제단을 중심으로 성직자들이 평신도와 차단된 거룩한 장소에 머물렀듯이, 고해성사는 사제-판관과 평신도-죄인을 갈라놓았다. 이제 사제는 고해실 안에서 한 사람의 생활을 사사건건 판결하는 판관이 되었다. 그곳에서 은총의 거래가 이루어졌고, 은총은 양으로 잴 수 있는 물건처럼 취급되었다. 대죄는 영혼 안에 은총이 완전히 말라붙게 만들었다. 소죄는 물통 속의 수위를 줄어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은총이 흘러나오는 중요한 의식을 치르면 물통은 다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더 자주 고해성사를 보면서 수시로 은총을 채워넣어야 했다.

은총은 또한 교회의 인가를 받은 신심행위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었다. 대사를 받으면 연옥에서 일찍 헤어나게 해 주는 은총을 얻는다. 이처럼 은총이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재산처럼 취급되면서 기도는 은총의 공급을 늘리기 위해 바쳐졌다. 묵주기도 역시 연옥에 있는 날수를 줄여주는 대사를 얻어내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대사는 특정한 주일에 특정한 성당에 나가는 것으로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성령 대신에, 교황이 관장하는 영적 수로와 저장탱크 장치를 통해 은총이 통제되고 공급되었다. 그렇게 신자들의 일상생활은 교황과 교회에 저당잡힌 셈이었다.

여기서 대사(大赦, Indulgentia)에 대해 잠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대사’는 마태오복음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대사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더라도 남는 벌을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로” 면제해 주는 은사이다. 죄와 벌을 구분해야 하며, 가톨릭교회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는 사해졌지만 그 벌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필요한 게 ‘보속’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 완전히 보속하면 영혼이 천국에 가지만, 보속을 다하지 못하면 연옥에 가서 나머지 보속을 완전히 끝마쳐야 한다. 교회는 생존자들이 죽은 이의 보속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보속을 대신해 주는 것이 ‘대사’이다. 흔히 기도와 성지순례, 헌금을 통해 신자들은 교황과 주교들이 정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변방에서 탄생하는 교회

보프는 현실적으로 권력화 된 교계제도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교회가 탄생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주변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정신과 자유가 가능한 곳”이라고 말한다. 관료주의에 빠져 있거나 구조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는 곳에서는 희망이 없다. 그런 교회는 자신이 지시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거부도 두려워하고 있으며, 당연히 ‘방어적 교회’가 된다.

개혁교황이라고 부르는 프란치스코 교종은 ‘변방’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보여왔다. 그건 이유가 있다. 예수가 변방인 갈릴래아의 나자렛 사람이었으며,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셨다. 초기 교회는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시작되어 황제숭배를 거부하면서 박해 받았을 때 가장 복음적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는 완강한 제도교회의 변방에서 시작될 것이다. 교회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이 ‘복음’을 발견하고, 발언하기 시작할 때 교회는 생명력을 회복할 희망이 생긴다.

앤드류 그릴리는 새로운 상황에서 교황권의 기능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교인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가장 사랑이 많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행위에 대한 신념, 모든 이에 대한 개방, 복음에 대한 기쁨,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믿음을 명백히 드러내야 한다. 곧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말과 행동과 그의 전체적인 지도력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백히 신념에 찬 사람이 교황직에 오르게 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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