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와 권정생의 하느님, "그대는 지금 아파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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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와 권정생의 하느님, "그대는 지금 아파보았는가?"
  • 유대칠
  • 승인 2017.05.22 2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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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7]

온전히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것과 둘이 아닌 ‘하나’를 이룬다. 하느님을 온전히 안다 말하는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서서 그를 마주 보고 있는 듯이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있는 이는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을 인식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 자기 삶의 밖에 그렇게 생각의 대상이 되어 서있게 두지 않는다.

하느님을 온전히 아는 이는 절대 하느님을 남으로 두지 않는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느님과 하나를 이룬다. 하느님과 절대 남으로 살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이다.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되어 하느님의 뜻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히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크하르트 선생의 생각이다.

하느님과 남처럼 살지 않으려면

하느님과 하나가 된 사람은 남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기 위해 애쓴다. 이기고 빼앗는 기쁨으로 살지 않는다. 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이는 하느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신학 책을 잃고 종교인으로의 형식적인 삶을 오랜 시간 살았다 해도 하느님과 진정 하나가 된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에 대한 힘든 논리를 이해한다 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아집이 될 수 있고, 그 아집이 자신을 높이고 하느님과의 하나 됨을 막을 수 있다. 그 아집이 교회 밖 이 땅 가득한 아픔과 눈물을 가릴 수도 있다. 그 지식이 자신을 하느님 더 가까이 있는 이로 스스로를 생각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선택과 행위의 신적 근거라 생각한다.

때론 하느님과 하나 된 삶이 아닌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의 욕심을 타인에게 강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강요를 하느님의 뜻이란 식으로 믿게 만든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한 교회는 가난하고 아픈 이의 눈물과 하나 되지 못한다. 자신이 진리라 믿는 그 아집으로 읽혀진 글 밖에 존재하는 아픔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에크하르트 선생은 삶을 온전히 깨우친 사람은 책의 내용을 온전히 공부한 수 천 명의 사람보다 더 온전히 깨우친 사람이라 본다. 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이에게선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욕심으로 채워졌을 뿐, 하느님의 모습이 비워진 사람이라 한다. 하느님에게 그는 남이다. 사물에 대한 욕심을 비운 사람, 가난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선 하느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저 말로 하나 된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과 하나 되어 있음을 본다. 바로 그런 이가 하느님으로 채워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남이 아닌 ‘우리’란 이름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권정생 선생

권정생, 가난의 자리를 사랑으로 채웠다

권정생은 물질이 풍족하면 마음이 가난해져 두렵다 했다. 소유가 두렵다 했다. 가난을 반겼다. 큰 치장 없이 초라하고 작은 집이지만. 따뜻하고 조용하게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는 곳, 그렇게 가난을 사색할 수 있는 자신의 작고 가난한 집을 좋아했다. 글쓰는 이들이 가진 큰 책상도 없다.

있다하여 사치라 욕하지 않을 그런 가난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지만, 그는 그 조차도 가난하게 살았다. 온전히 비우며 살았다. 자기 욕심에 잡초 하나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저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워진 그 가난의 자리를 사랑으로 채웠다. 죽음의 순간 북녘 어린아이를 생각했다. 어느 욕심 하나도 내세우려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으로 채웠다.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권정생은 아무 것도 채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하느님의 향이 난다. 하느님의 모습이 보인다. 거대 교회에 거대 복지 시설을 운영하며 입으로 ‘사랑’이라 말할 뿐, 실상은 엄청난 절망을 안겨주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의 모습은 더욱 더 선명하게 가난의 소중함과 가난을 채우는 하느님의 모습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더 많이 하느님에 대하여 글공부하고 더 많은 세상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서 나지 않은 하느님의 향을 그에게서 접하게 된다.

유서에서 조차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는 말 대신, 아프고 힘든 이를 위한 기도를 우리에게 부탁한다.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말이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티벳 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유언 중 발췌)

글보다 삶에서 하느님을 더욱 더 온전히 배운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을 읽으며 권정생을 생각한다. 하느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 글 지식이 아닌 비움, 즉 가난이란 그의 말이 생각난다. 그 가난한 이의 존재 속에 하느님이 가득히 채워져 있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 생각난다.

권정생, 어쩌면 그는 지금도 하느님과 더욱 더 온전한 하나가 되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주세요”라고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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