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사랑의 멍에를 짊어진 그리스도인
상태바
[시토회] 사랑의 멍에를 짊어진 그리스도인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5.22 13: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21

베르나르드는 또한 다른 종류의 사랑도 보고 있으며, 우리에게 사랑의 다른 단계들을 제시한다. 그는 네 가지 사랑의 단계를 구별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자기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할 때이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요구, 우리의 비참함을 느끼도록 하여,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되풀이되는 괴로움들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게 하고, 각각의 경우에 얼마나 그분이 다정하신 분인지 입증된다."

그러나 필요에 의해 하느님께로 돌아감으로 해서, 그분의 감미로움에 대한 경험은 결국,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을 촉구하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감미롭다는 것을 곧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비록 여전히 순수한 사랑과 이기적인 사랑 사이에 찢겨져 있지만, 이렇게 우리는 그분 자신을 위해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는 우리가 가장 오랜 시간동안 머물러 있거나, 결코 이 생에서는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단계이다. 왜냐하면 네 번째 단계는 우리가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만 우리자신을 사랑할 때,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지복직관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관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에서 썼을 때, 베르나르드는 지복직관을 하느님 ‘자신의 높은 언덕’, 강하고 비옥하고 풍요로운 산으로 부를 수 있을 뿐이었다.

이 논문의 끝부분에서 베르나르드는 앞에 있었던 부분의 요약을 우리에게 남긴다:

생각해야 할 첫 번째 초점은,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을 능가하는
측량 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을만 하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다.
그 이유는, 내가 전에 말한 대로,
그분이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대한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그분, 측량 못하는 영원한 하느님,
모든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랑이신 그분,
그분의 위대하심은 한계가 없음을 알려준다,
그분의 지혜는 끝이 없다, 사랑이다.
우리는, 그러면,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한계를 정하는가?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오 나의 힘이신 주님,
나의 굳센 바위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
나의 유일한 소망과 사랑,
나의 하느님, 나의 협력자,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모든 힘을 다해;
그러나 당신께 상응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기에,
그러나 내 능력의 충만함을 다해...
나는 더욱더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더 많은 힘을 주시는 만큼;
그러나 결코, 결코, 당신은 그만큼 사랑 받으실 수 없습니다.

끝에서 베르나르드는 우리에게 혼인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그는 우리에게 침실, 입맞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같은 말을 제공한다. 그는 욕구로서의 사랑에 관해서 쓴다.

아가서는 무엇보다도 그에게 있어, 중세기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사이,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신비 해석을 위한 원천이었다. 아가서는 중세 수도원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주석이 달린 책이었다.

베르나르드의 주석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단일 작업이었고, 쟝 레끄레르끄의 말대로, ‘중세 수도원 문학의 걸작’이다. 그의 저작은 올바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의 아주 세련된 라틴어로 되어, 심도 있고, 심미적이고, 운율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원래 수도회 총회에서 나온 것인가?

쟝 레끄레르끄는 베르나르드가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내적인 열정을 위한 출구를 찾기 위해, 그는 그분의 사랑을 전달해야 하고, 사랑을 표현하면서 여전히 더 심도 있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저작을 읽을 때, 첫 번째 클레르보의 수도자들이 들었던 것처럼, 베르나르드 자신이 살았던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스러운 혼인, 혹은 변화시키는 일치는 대부분의 우리에게 강하게 울려 퍼지는 말인지 모르나, 그 말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목적으로서 남아 있는다. 베르나르드는 거룩한 형상이 하느님에 의해 우리의 본성 안에 심어져 있다고 말하였다, 그분과의 완전한 일치라는 우리의 운명을 뿌리깊게 상기시키는 형상으로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짊어졌어도 우리 각자가 다음과 같음을 그는 보여준다,

"일 때문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두려움 때문에 위축된다... 그러나 그 자체 안에 돌아서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용서의 희망 속에서, 자비의 희망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말씀과의 결합을 열망할 수 있는 곳으로. 그 곳에서 이 기본적인 창조물은 하느님과의 우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사들의 임금님과 함께, 사랑의 멍에를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토머스 머튼은 이것을 장엄한 구절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세계와 우리 자신의 세계에 주는 베르나르드의 섭리의 메시지를 요약한 것이며, 클레르보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얻음’에 대해 첫 번째로 들었고, 도움을 받았던 바로 그 12세기처럼 오늘날에도 많이 필요한 구절이다.

베르나르드는 생애의 마지막에 쓴, 아가서에 대한 여든 세 번째 강론에서 심오하게 혼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땅히 신부는 다른 모든 사랑을 끊는다
그녀자신이 완전히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
사랑에 대한 답례로 그녀는 사랑에 응답하며
그리고 비록 그녀가 온전히 그녀자신을 사랑에 쏟아 붓는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거의 비교도 안될 것이다,
원천에서 항구히 흘러나오는 흐름과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Love),
영혼과 말씀,
신부와 신랑,
창조주와 창조물 사이에는,
그 흐르는 양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목마른 사람과 흐르는 샘 사이에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혼인은 우리가 모두 열망하는 것이다. 강론 83은 이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저 사랑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이 일은 말씀 자체에 의하여 우리 영혼 속에서 실현될 것이다.

내가 내 영혼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해 두자마자 전혀 의심의 여지없이 그분은 그분이 시작하신 선한 일을 완성하는데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주목하시고 그의 아들의 재현과의 유사함을 보시기 때문에, 혹은 머튼이 지적한 것처럼, ‘단순함의 숨겨진 이미지가 죄의 어두운 껍질에서 해방되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분은 더 많은 사랑을 영혼에 쏟아 부어, 용기를 주고, 사랑으로 하느님과의 완전한 의지의 일치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베르나르드가 신비의 혼인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이다.

회칙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시토회 설립 교부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삶의 충만함"으로서 이것은 하느님 체험 속의 사랑의 완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토회 방식의 이 ‘신비의 요인’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베네딕도가 심은 씨가 꽃으로 활짝 피어난 것과 같다.

베네딕도는 그의 수도승들이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나아가기’를 원하였다. 회칙의 마지막 말에서 그는 "당신은 하늘의 본향을 향해 서두르는가?"라고 물었다. 그 다음에 그는 "당신은 우뚝 솟은 정상으로 출발할 수 있는가?"라고 덧붙였다.

베르나르드에게 7장의 사다리의 열두 계단은 곧장 완성된 사랑, 관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이르게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임금님의 방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영혼은 ‘은밀하게 임금님의 포옹’ 속에서 쉰다. 이 방에 있는 동안 영혼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입으로 되풀이하지 못하는 신비를 듣는다...’

아가서의 주석은 시토 수도자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논문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폰티니 대수도원의 한 익명의 수도승이 말한 대로, 그것은 수도생활의 목적, 전 과정을 추적하는 시(詩)이다. 그것은 서로를 찾고,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서로 더 가까이 하려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이다. 그것은 성서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열정적인 언어로 관상을 사랑하도록 더 조율된 관상서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는 시토 수도자의 삶의 목적을 아주 단순하게 요약한다. 그들은 사랑의 열렬함으로 그것을 탐구하였지만, 만일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체험이 실제 우리 삶에서 우러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런 반향이 없을 것 같다. 월터 다니엘은 3일간 임종자리에 있었던 알레드를 묘사하였는데, 비록 몸은 허약하였지만 알레드의 정신은 굳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가 되풀이해서 ‘빨리, 빨리’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그렇게 말한다. 또한 발음 자체도 서두름의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 단어는 오직 한 음절로 된 말이기 때문에 입술 움직임이 더 쉽고 귀로 들리는 소리가 어느 정도 더 감미롭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단어들을 사용하곤 했다.

‘Hasten, for Crist luve’: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서둘러라(for the love of Christ, hasten)’ 라고.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