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능함이 어떻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이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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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능함이 어떻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이게 하는가?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5.2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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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4

요한 복음사가가 유의했던 사건들 중의 하나는 ­요한 복음서 9장 전체에 기술되는데­ 날적부터 소경인 사람의 이야기다. 한 걸인이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안식날에도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는 예수가 지나갈 때 제자들과 주고받는 질문의 대상이 된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이 질문의 전제는 소경이라는 장애가 징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러분은 그 소경이 평생 지고 사는 어두움 속에서 이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랍비가 무엇이라고 대답하는지 궁금해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아야 한다. 소경은 예수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듣는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덧붙인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소경은 아무 말도 안하고 아무 것도 청하지 않는다. 그는 기적을 청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무덤처럼 조용하다.

그런데 예수는 마치 아담을 만들 때 그런 것처럼, 흙과 침을 섞어서 소경의 무덤 같은 눈에 바르고 가까이 있는 실로암 못에 가서 얼굴을 씻으라고 말한다. 소경은 예수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랍비의 말에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를 한다.

“그래서 그는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고 요한 사가는 기록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이 기적은 짤막하게 묘사되고 있다. 요한 복음서 9장의 주요부분은 소경의 눈을 치유하는 부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 기적에 응답하고 있는지 그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눈을 뜨게 된 사람이 그 걸인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 그 사람을 닮기는 했지만 그가 아니라고 합니다’ ” 당사자는 바로 그가 자기라고 하면서 일어난 일을 말한다. 예수라는 랍비가 어떻게 진흙을 개어서 그에게 발라주었으며, 실로암 못가로 얼굴을 씻으라고 보내서 그렇게 했더니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설명을 한다. 사람들은 그 랍비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그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논쟁은 점점 가열되고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의 의회에 데리고 간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날 진흙을 개는 일종의 노동을 했으므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안식일 규칙을 위반했기에 명백히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확실하게 하고, 이 일이 거짓이라는 그들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하여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렀다. 부모는 그가 자신들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며 그가 날 때부터 늘 소경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은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부모들은,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는 다 자란 사람이니 스스로 대답할 수 있겠지요”라고 대답한다. 요한 사가는 부모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대답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부모들이 그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아들이 구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다. 그들은 율법가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던 것이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두 번째로 질문을 받는다. 율법가들은 집요한 질문을 하면 이런 이야기들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에게 말한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 사람(예수)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라는 말은 “진실을 말하고 악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라는 격언과 비슷한 말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진리가 말해질 때마다 영광을 받고 진리가 부정될 때마다 모독을 받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한다: “나를 낫게 한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을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치유된 것은 그의 눈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부모를 고통스럽게 했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예수가 어떻게 그의 눈을 고쳤는지 다시 질문을 받자 그는 묻는 사람들에게 이미 그가 진실을 다 말했는데도 그들이 듣기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왜 당신들은 또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제자라는 말이 이 시점에서 어뢰 같은 역할을 한다. 그에게 질문했던 사람들이 대답한다,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들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이지만 그 자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소경이었던 사람은 개의치 않고 대답한다: “이상한 일이네요” “당신들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분은 내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죄인의 청은 들어주시지 않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분명한 사실을 지적한다. 지금 여기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준 사람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어떤 일을 한 사람이 있다. “그분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걸인이 탁월하고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감히 논쟁을 하고 있고 그의 거침없는 태도 때문에 거부를 당하고 있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났다,” 고 그들은 그에게 말한다. 눈을 못 보고 있는 사실이 그 죄를 말해주고 있다는 가정이다. “그런데도 우리를 훈계하려고 하는구나!” 그는 회당 밖으로 쫓겨난다.

그러는 동안 예수는 다른 곳에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식을 듣고 소경이었던 사람을 찾아 나선다. 놀라운 일은 그 사람과 만나는 장면에서 예수가 다시 한 번 그를 앞서 지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그를 발견하자 이렇게 묻는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사람의 아들은 구세주를 칭하며, 새로운 아담,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스라엘을 구원할 존재이다. 치유를 받은 그 사람은 질문을 하면서 예수에게 대답한다. “제가 경배해야 할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이제, 앞을 보게된 첫 번째 날에 이 이름 없는 사람과 함께 우리들은 복음서의 절대적인 핵심 앞에 서게 된다. 예수님은 대답한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치유받은 사람은 즉시 대답한다. “그는 말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경배했다.”

경배는 태도이며 또한 신체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무릎을 꿇었든가 엎드렸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행위는 구세주의 현존 안에 있다는 자각을 반영하는 행위이다.

이 소경이야기의 핵심 구절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예수가 말하는 부분이다. 이 구절은 단 한 마디로 예수의 정체성을 요약해주는 구절로 자주 인용된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는 단지 한 차원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이야기는 2천년 전 어느 날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사건에 대한 충실한 서술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또한 오늘날의 우리들과 연관이 깊다.

소경의 입장에 우리 자신을 놓아보면서,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변의 물질 세계를 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우리의 무능함, 창조세계 속에서 창조주를 알아볼 수 없는 소경됨,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볼 수 없는 우리의 소경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소경됨은 보통 더 악화되는 소경됨이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에게는 더욱 더 놀라는 것이 없게 되어 한때 특별했던 것들이 평범한 것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진부함, 지루함은 점점 더 일상적인 조건이 되어갈 수 있고 우리들은 소란스러움으로 이 진부함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아마도 우리는 성전과 실로암 못 중간쯤에 앉아 있었던 눈먼 걸인보다 더 우리 주변의 세계와 만남이 적은 지 모른다.

어둠 속에 앉아서, 나는 왜 내가 이런 불행한 조건들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토론하는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내 잘못인지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인가 묻고 있다.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자 나는 “하느님의 일하심을 보이게 하려는 것”이라고 확신에 차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의 무능함이 어떻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이게 하는 일과 관련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젖은 진흙으로 내 얼굴이 문질러지고 세례 받는 못 속에서 씻은 다음, 그 사람의 대답은 나에게 빛이나 깨달음에 관한 어떤 이론이나 원칙이 아닌 것으로 다가왔다. 대답은 바로 그 사람이다. 예수는 단지 또다른 선생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며, 우리가 기다려왔던 구세주로서 말씀과 행위로 자신이 세상의 빛임을 드러낸다.

이 사실을 2천년전 예루살렘에서 믿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믿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한 복음서의 이 9장은 주로 그들 자신이 직접 보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목격했던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눈으로는 보지만 볼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대로 보지 않는 상태에 머물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마치 그들은 “우리는 이미 충분히 보았고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예언자나 길거리에서 떠드는 예언자들이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일생을 받쳐줄 지혜와 원칙들이 있다. 당신의 기적과 걸인들을 데리고 꺼져버려라. 우리는 충분히 보고있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진복팔단의 계단을 올라가기 위하여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 어떤 죽은 몸이나 지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오르는 것이 바로 경배이며, 이것은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했던 그 치유 받은 사람의 경배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치유를 받은 후 먼저 주변의 물체들과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더 중요한 선물은 그날이 다 저물기 전에 사람의 아들, 세상의 빛, 먼지와 침으로부터 아담을 만든 그분 앞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출처] 짐 포레스트(Jim Forest)가 쓴 <진복의 사다리>(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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