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작은 창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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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작은 창이 따뜻하다
  • 한상봉
  • 승인 2017.05.22 2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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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마음이 허전할 적엔 고향 같아 찾아가는 곳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유년의 골목이 소곳하게 들어앉아 있는 인천시 숭의동 191번지. 지금도 남아 있는 그 골목길에 들어서면, 지붕 낮은 집들 처마 밑으로 유난히 목청이 컸던 나의 어린 시절 동무들이 삼삼오오 오리 새끼들처럼 들쿵거리며 달려온다.

금새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골목에 들어서기 전엔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만 머물러 있던 잔상들이 이 골목에선 언제든지 어제처럼, 때로는 현재 진행형으로 느껴진다. “상봉아, 얘들 데리고 다른 데 가서 놀아!” 썰물처럼 그리고 밀물처럼 몰려오고 나가며 골목을 누비던 유년은 그렇게 가슴 저리고 그러나 밝은 빛살처럼 번져 온다. 옛집에 서면, 그 장독대 그대로 있고, 발돋음하여 내다보던 창틀은 어깨에 닿을 만큼 낮아서 나를 놀라게 한다. 마치 거인이 되어 난쟁이 마을에 찾아간 듯하다.

사진=한상봉

처음 서울에 올라와 자리잡고 살았던 곳은 당고개였다. 이 동네는 유년의 골목을 가진 그곳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희망촌’이라 불렀다. 서울의 막장이라고 불리는 이곳 당고개, 4호선 전철 종점에서 내려 마을 버스도 없이 십여 분 동안 산비탈을 걸어 오르면 다다르는 ‘달동네’였다. 백 미터 후방엔 불암산이 솟아오르고, 앞산은 수락산. 그리고 그 기슭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양지마을’이 건너다 보였다.

처음 이사 왔을 때, 235번 종점에서 과일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가 했던 말이 기억 난다. “새로 이사 왔수? 여긴 서울에서 망한 사람들이 제일 마지막에 이사 오는 곳이라던데……” 그래서 형편이 피면 다시 이사를 나가는 곳이라는 이 무허가 판잣집 동네에서도 나는 행복했다. 낮고 손바닥만한 창에서 배여 나오는 불빛은 유년의 천진난만한 따뜻함을 불러일으켰다. ‘난 망해서 여기 들어온 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처음 집들이 오셨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직 철없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언덕받이를 오르면서 나는 “엄마, 이 동네 좋지. 앞뒤가 다 산이야. 공기도 좋고……” 어머니는 일언지하에 “그래, 공기만 먹고 산다든……” 하셨다.

희망촌이나 양지마을이라는 이름은 그저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를 뿐, 공식적인 행정상의 명칭은 물론 아니다. 사람들은 그네들의 바람을 이름에 담았다. 처지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서 그래도 희망을 갖고 햇볕 바른 땅을 기다리며 살자는 뜻일 게다. 처음 이사 올 때는 역에서 마을에 이르기까지 그 흔한 연립 주택이나 빌라 한 채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점차 그린 벨트 지역을 포위하듯이 인근이 온통 빌라촌을 이루었고, 옆동네에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개발은 그렇게 작은 집들을 밀어내고 순식간에 거대한 집을 지어 사람들을 그 안에 규격을 정해 몰아넣으려고 한다. 어쩌면 이 동네도 그린 벨트에서 해제되어 빌라가 들어서고 “불암산 기슭에 인접한 청정 주택” 어쩌구 하는 플래카드가 나붙을 것이다. 그리고 유년의 꿈도 해체당할 것이다. 아직 햇볕을 찾지 못했거나 희망을 이루지 못한 가구들은 12평짜리 영구 임대 아파트를 기웃거리거나, 퇴계원 또는 의정부 쪽으로 짐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노상 있는 억울한 일 때문에 구멍가게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아저씨들도 찾아보지 못할 것이며, 여름이면 노상 골목에서 사는 아이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이웃은 증발된다.

당고개 희망촌. 사진=한상봉

예부터 큰집은 옥(屋)이라 부르고, 작은 집은 사(舍)라고 불렀다. ‘옥’(屋)자는 송장[尸]에 이른다[至]는 뜻이고, 사(舍)란 사람[人]에게 좋다[吉]는 뜻이다. 큰 집에 사는 사람은 화(禍)를 받고,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복(福)을 받는다는 뜻이다. 소창다명(小窓多明), 작은 창이 따뜻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집이 주거 개념이 아니라 재산 개념이다 보니, 여유 돈만 있으면 큰 집을 사려고 한다. 한때 온 국민이 열광하던 아파트 투기 바람이 그래서 생겨났다. 뭐든지 큰 것이 값지다는 것이다. 집이 크면 창도 크고, 창이 큰 집에선 큰 차를 굴리고…… 이웃이 이웃에게 늑대인 사회, 만인이 만인에게 경쟁자인 마을은 그렇게 생겨난다.

고려 때 산원동정이란 벼슬을 살던 노극청(盧克淸)이란 사람이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팔리지가 않았다. 일이 있어 시골에 가 있는 동안에 그의 아내가 낭중(郎中) 벼슬의 현덕수(玄德秀)에게 백금 열 두 근을 받고 집을 팔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노극청이 현덕수에게 찾아가, “내가 이 집을 살 때에 백금 아홉 근만 주었는데, 수년 동안 거처하면서 서까래 하나 보탠 것이 없이 백금 서 근을 더 받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하고 서 근을 되돌려 주려 했다.

현덕수가 굳이 받지 않으려 하자, “내가 평생에 불의(不義)의 짓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딴 것도 아닌 집을 헐하게 사서 비싸게 팔아 재물을 탐하겠는가. 자네가 만약 남은 서 근을 받지 않는다면 전부를 다 돌려 주고 내 집을 도로 찾겠네” 하여 끝내 백금 서 근을 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큰 집을 좋아하고, 게다가 탐욕 때문에 작은 창(窓)을 부수는 이들을 칭찬할 이유가 없는 것은 이 탓이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만이 좋아라 할 이야기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안할 수 없어 던지는 말이다. 들을 귀가 없다고 내 입마저 봉할 까닭이 없는 탓이다.

당고개 희망촌에 살기 전에는, 인천에서 영구 임대 아파트엘 살았었다. 남들은 땡 잡았다고 하였지만, 일 년을 채 버티지 못했다. 밤늦게 손님이 와서 술자리를 하다 보면 시끄러워질 수도 있을 법한데, 어김없이 다음날 싱크대 위에 달린 스피커에서 관리실 방송이 터져 나온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이웃을 생각해서 밤중에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여간 조심스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종이장만한 벽체를 상하좌우에 두고 사는 아파트 사람들, 큰 아파트 덩칫값도 못하는 얄팍한 인심이 싫어서 수년 전 산동네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그런데 산동네마저 목 졸리고 더 외곽으로 물러날 것을 종용당하고 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 “서울엔 안전 지대란 없습니다.” 그 후론 서울 탈출을 날마다 꿈꾸었다.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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