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죽음, 새로운 생명으로 옮겨가는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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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죽음, 새로운 생명으로 옮겨가는 출구
  • 한상봉
  • 승인 2017.05.15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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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indulgy.com

가깝고도 낯선 죽음

죽음에 대한 유년의 기억은 그리 낯설지 않다. 예전에는 인천 간석동에 공동 묘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천주교 묘지가 백석으로 옮겨졌으며, 그 과정에서 나는 할아버지의 유골을 처음으로 만져 볼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기억이 나지 않는 할아버지를 상면한 것이 그분의 묘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미 수십 년 묵은 묘에서 파 낸 할아버지의 유골을 목장갑 낀 두 손으로 받아 들고 나는 아직도 삭지 않은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멈칫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묘지 근처에서 꺾은 이름 모를 풀꽃은 아직도 내 일기장 가운데 바삭 마른 채 그대로 붙어 있다. 할아버지의 유골은 곧 십정동 화장터에서 들끓는 기름불에 태워졌고, 하얗게 바수어진 뼈가루를 나랑 열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는 큰형이 뒷산 소나무 밑에 골고루 뿌려 주었다.

그때 큰형이 피워 물었던 담배 연기가 지금도 기억 난다. 인천의 모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형은 그때 무슨 상념에 젖어 들었던 것일까? 대학에 진학한 뒤 나는, 가끔 십정동 공동 묘지를 찾아가곤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탓도 있지만, 묘지의 풍경은 마치 ‘사하촌’(寺下村)과 같은, 낡은 한국 단편 소설선 겉표지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인생을 자못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사춘기를 넘어선 젊음의 뒷장이기도 했다.

이유 없는 무덤이 없다는데, 저 많은 무덤마다에도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을 것이었다. 길섶의 풀포기처럼 흔하디 흔한 민중의 삶에도 역사가 흐르고, 장편 소설 수십 권씩으로도 부족할 만큼의 이력이 붙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늦가을 매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내 말 좀 들어봐∼봐∼봐∼” 하고 성긴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학 2학년 때 정작 아버지가 이승을 떠나셨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울음이 나오질 않아서 고생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자식된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 인정이 메말랐거나, 진화가 좀 덜 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시신에 염을 할 때야 한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나는 슬픔에 젖기보다 나도 눈물을 흘릴 줄 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오히려 다행스러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러나 살다 살다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내 유전 인자에 뭔가 어긋난 지점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두고, 인정머리 없다고까진 말하지 않지만 ‘사무적’이다 또는 ‘일 중심적’이다 하고 평하기도 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니 내 의식과는 다르게 깊은 슬픔의 감정에 젖어드는 법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런 사람이 텔레비전의 연속극을 보면 퀭하니 눈물이 도는 건 뭔지 나 역시 이해 못할 일이다. 아니 생존과 자기 성취 욕구, 그리고 현실의 강퍅함이 내 모습을 그리로 몰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공수래 공수거를 옛문자로 알았더니 과연 허언 아니로다. 지나간 일 생각하면 일장춘몽 부운 같다”던데, 이 뜬구름 같은 세상을 거머잡으려는 심사를 버려야 본래 면목(本來面目)을 되찾을 성싶다.

의식 바깥, 죽음의 자리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를 앞둔 여름에 우리 친구들은 강촌(江村)에 놀러 가기로 했다. 부모들에게는 대충 둘러대고 따라나선 물놀이에서 그만 나는 익사할 뻔하였다. 물 속에 세 번을 들어갔다 나오면 숨이 끊어지게 마련이라는데, 몇 번을 첨벙거리다가 누군가 엉덩이를 밀어 주는 바람에 구사일생하였던 것이다.

그 물 속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내 짧은 생애를 스쳐 지나간 뭇사람들의 영상이 모두 스펙트럼처럼 떠오르고 사라지고 했다. 그만큼 생명은 질기고, 내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뭇사람들의 기운으로 함께 길러지고 자라나는 모양이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부터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고, 이제부터 사는 것은 잉여 생명이라고, 더부살이 생명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했다.

아마도 이런 체험들이 나의 삶을 더욱 ‘종교’에 얽매어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종교적 삶을 빛나게 살지 못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종교가 내 영혼에 살을 발라 먹였으며, 또한 살길을 열어 주었던 탓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날들은 ‘죽음’에 대한 의식 바깥에서 살았다. 아니 오히려 죽음은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신문 방송에서 접하는 수많은 ‘타인의 죽음’과 ‘내 죽음’은 전혀 다른 공포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이 죽음 앞에서 쇠렌 키르케고르는 평생을 바쳐 씨름하였다는데, 그래서 신학자들보다 더 깊은 죽음의 신학을 사색하였다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죽음이 경사스러울 게 못 된다는 생각 속에서 오히려 삶을 더 진척시키고 싶어했다. 공자(孔子)도 말하지 않았는가.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만일 내가 죽는다면, 세상도 따라서 빛을 잃는 게 아닌가? 내 몸 없이 나한테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 없이 우주도 없으며, 내가 있어야 우주도 약동하는 게 아닌가? 우주는 태초(太初)로부터 태말(太末)까지 나를 위해서 공력을 기울여 온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 조상들의 조상들의 조상들까지, 무생물에서 온갖 유기체 생명까지, 진화의 온 축이 나 하나의 존재를 향하여 거듭거듭 유전 인자를 전해 온 것이 아니던가?

그네들이 없다면 나도 없고, 내가 없다면 그네들의 공력도 빛을 잃게 마련 아닌가? 그래서 나는 온 우주와 맞먹는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존귀하고 신비롭고 영적인 존재가 나 아닌가? 우주 진화의 꽃이 이 몸 아닌가?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한 마디, ‘나’ 아닌가? 여기까지 상상해 보면, 마찬가지로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 낱낱이 존귀하고 우주와 맞먹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친구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우주를 모욕하는 셈이 되고, 땅에 침을 뱉으면 우리 조상의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 아이가 하늘님이시다, 저 며느리가 하늘님이시다, 저 노인이 바로 하늘님이시다, 하셨던 해월 최시형의 예지가 바로 그것 아닌가?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성서의 이야기나, 사람에겐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다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모두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바다이며, 만사를 사랑으로 빚으셨다는 말씀이 투명하게 정수리에 박힌다. 모든 심연, 모든 죽음은 바로 오늘의 삶을 위해 마련된 배려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우주 생명을 키우는 일에 동참하는 새로운 출입구가 열린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이런 생각 자체가 경망스럽고 추상적이며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 봐도 그리 인생에 해될 게 없다는 신념을 다져 본다. 주어진 삶의 빗장을 여는 일, 그래서 온 세상에 살맛 나는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엮어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출처=plus.google.com

죽음, 또하나의 미래

칼 라너는 죽음을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며, 성서가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루가 1,79)라고 표현한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피동적으로 또 체념하며 죽음을 ‘당하기’ 쉽지만, 또한 이런 까닭에 호들갑스런 행사를 통하여 타인의 죽음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애쓴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답게, 곧 정신적 존재답게 각오를 갖고 눈을 똑바로 뜨고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 신자답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내게는 멋진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상 사람은 죽음으로써 육체적 구조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전체로서의 세계’에 더욱 가깝고 친밀하게 관계 맺는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뜻하는 죽음은 인간을 이 세상을 떠난 ‘비(非)우주적’인 존재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은 생명을 ‘전(全)우주적’ 상태로 옮겨 놓는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조차도 죽게 되면 그 생명 단자(單子)가 여전히 세계 안에 견고하게 뿌리 내리듯이, 그처럼 인간은 죽음으로써 영혼의 한정된 ‘육체적 구조’를 청산하고 ‘모든 것’을 향하여 자신을 개방하게 되며, 이제 이승에서 이루었던 행적을 통해서 세계 전체에 막힘 없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을 구스타브의 <죽음 뒤의 삶>(1836)이란 책에서는 멋지게 설명해 두었다.

"씨앗이 터질 때가 되면, 식물은 갑자기 낱낱으로 흩어진다. 그 순간 씨앗은 껍질 속에 갇혀 그렇게 오랫동안 좁게 누워 있던 상태가 파괴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새 세상을 얻는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와 탄생의 관계는 우리와 죽음의 관계와 같은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지금까지 삶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조건들이 사라짐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감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빅톨 위고는 산문, 시, 역사 소설, 희곡, 연애 소설, 전설, 풍자와 서정시, 노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자신을 표현하였으면서도, “나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의 거의 천분의 일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느낀다”고 말했다. 무덤에 가면 “하루 일을 끝냈다”고 말하겠지만, “내 생애의 일을 끝냈다”고 말할 수는 없노라 했다. 왜냐하면 무덤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열려 있는 여행길이며 해질녘에 닫혔다가 동이 트면 다시 열리는 법이기 때문이란다.

Helen and Scott Nearing

죽음에도 담백함이 있다

스콧 니어링에게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담백한 의연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죽음이란 종말이 아니라 옮겨감”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삶의 두 영역 사이에 있는 출입구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스콧은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변화이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게, 언제나 다시 또 다른 날로 이어진다. 두 번 다시 같은 날이 오지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온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사람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로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스콧은 불교의 선사나 인디언처럼, 자기 힘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죽고 싶어했다.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죽기를 원했고, 의식이 또렷한 채로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고 싶어했다. 죽음의 과정에 기꺼이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단지 꽝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이 아니라 새롭게 열리는 세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콧은 곳곳에 생명을 연장시키는 약봉지와 도구들로 가득 찬 병원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그는 어떠한 약도 먹지 않으려 했고 의사를 멀리했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몫의 짐을 나를 수 없고 자신을 돌볼 수가 없을 때, 자신이 마침내 돌아갈 곳에 갈 채비를 했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마실 것마저 끊기를 바랐다.

그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어했는데, 그래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없었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며, 자신은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고 여겼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기에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죽음에게도 환영의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례 역시 직업적 장의사나 성직자의 힘을 빌리지 않기를 원했고, 그저 작업복에 입혀진 채 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 상자에 눕히기를 바랐다. 물론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고 유언했다. 스콧은 동물들이 흔히 죽는 방식을 기억해 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기어 들어가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이다.

스콧은 말년에 약간의 주스와 물만 마시다가 불꽃이 사위어 가듯이 평온하게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1983년 8월 24일, 그의 아내 헬렌은 스콧의 임종을 담백하게 지켜보면서 옛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노래를 읊조려 주었다. 이는 스콧에게 불러 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살아 남은 모든 이들을 위해 들려 주는 노래였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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