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와 함석헌의 ‘우리’ 나라, "도대체 이게 나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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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와 함석헌의 ‘우리’ 나라, "도대체 이게 나라입니까!"
  • 유대칠
  • 승인 2017.05.15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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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6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6]

국익(國益). 그들은 항상 국익이란 말을 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할 때도 그들은 국익이라 했다. 오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신 할머님의 아픔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국익이었다. 그래야한다고 했다. 사드(THAAD) 배치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국익이란다. 세월호 때는 어떤가! 그때도 국익이란다.

그 ‘국익’에 많은 이들이 울고 때론 죽고 아파했다. 국익, 즉 국가의 이익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가? 이 나라의 참된 주인이 누군가인가? 국민이다. 과거, 황제가 주권을 가진 대한‘제’국이 아니라, 우리네 민중이 주권을 가진 대한‘민’국이 바로 이 나라다. 그런데 그 주인이 아프고 힘든데 국익이란다. 주인이 싫다는데 국익이란다.

대체 그 ‘국익’이란 말의 ‘국가’는 어디인가? 지금 위안부 합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할머님의 눈물이 저렇게 분명한데 그 국익의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샤드 배치를 반대한다면 작은 시골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힘겹게 경찰과 군인과 마주하고 눈물로 소리치고 있는데 그 국익의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세월호의 그 참혹한 비극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아픔으로 남아있는데, 그 국익의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함석헌 선생

국가의 주체, 국가의 토대, 이 나라의 본질은 바로 우리다. 어느 한 개인이나 일가(一家)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국가의 알맹이다. 알맹이가 아프고 힘든데, 국익이 무슨 수용인가? 함석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권은 무엇입니까? 주체성이야말로 나라의 알맹이가 아닙니까? 그런데 스스로 주체성을 버린 외교가 무슨 외교란 말입니까?”

국가의 알맹이, 그 주체성은 바로 우리다. 바로 우리가 국가의 주체성이다. 그런데 그 주체성의 눈물과 아픔이 무시되는데, 국익을 따른 외교란 무슨 말인가. 웃기는 소리다. 국가의 주권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이 당연한 상식이 무시되고 있었다. 주인 없는 국익, 그 알맹이 없는 이야기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법은 또 어떠한가! 법대로 하면 결국 강자가 이긴다는 슬픈 생각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국가가 추구할 ‘국익’도 국가의 틀이 되는 ‘법’도 국가의 주체성인 바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진정 우리가 주인인 나라인가? 우리가 주인인 것은 맞는가? 아니! 더 근원적으로 과연 이것이 나라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했다. 인간은 폴리스(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존재란 뜻이다. 사회 속에서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넘어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개인만이 행복한 것도 국가만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개인과 국가의 좋음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때 그 사회는 가장 좋은 사회가 된다. 좋은 말이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체적 해법들이 수 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번함 없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정신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가는 한 개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란 어떤 집단이나 개인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만일 국가가 한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혹은 국가의 주인이 바로 한 개인이면, 국익은 당연히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국익은 바로 그 개인 혹은 그 무리를 위한 것이다. 법도 그렇다. 법도 한 개인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국가를 거부한다. 그는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의 상호 연대 가운데 공동의 좋음을 누리는 그러한 정치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한 사회적 연대와 평등을 고민했다. 과연 어떤 정치 제도를 만들어야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고민해야한다. 촛불, 우린 이미 작은 한 개인의 촛불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앞서 가는 횃불이 되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 가운데 참된 상식이 진정한 상식이 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국익. 국익은 국가의 이득이다. 국가에 이로운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그 국익은 국가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행복이 되어야한다. 우리의 아픈 눈물에 고개 돌린 국익은 국익이 아니다. 설사 그 국익으로 우리 가운데 몇 명의 아픔이 있다면, 우리 모두 그 눈물에 함께 해야 한다. 국가의 알맹이는 바로 우리다. 알맹이가 아파 울고 때론 죽는 그러한 국가는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다. 국가의 알맹이이며 주체도 우리다. 우리의 역사적 의지를 무시한 외교도 진정 참된 국익의 외교가 아니다. 웃긴 이야기다.

사드배치로 나라가 혼란스럽다. 권력자는 기억해야한다. 이 나라의 알맹이 그리고 주체는 바로 우리 민중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로도 나락 혼란스럽다. 이 역시 기억해야한다. 이 나라의 알맹이 그리고 주체는 바로 우리이고, 우리 역사와 우리 정체성을 무너뜨리면서 추구해야할 국익이란 없다.

진정한 국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처럼 사회적 연대와 평등 속 공공선을 추구하며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의 생각처럼 개인과 국가의 좋음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한 개인의 행복이 아닌 우리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그러한 사회의 실현을 위한 노력, 그것이 진정한 국익이며 법이 함께 해야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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