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예속과 해방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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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예속과 해방의 신학
  • 한상봉
  • 승인 2017.05.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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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과 은총 1-2강

레오나르도 보프는 “유일무이한 궁극적인 신학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신학은 ‘상황신학’이라는 말인데, 어느 시대에나 교회와 신앙인들이 겪는 새로운 현실과 도전이 있기 마련이고, 여기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신학이 발생한다. 이처럼 신학이란 본디 교회와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완전히 중립적이거나 순수한 신학은 없다. 아울러 신학 역시 역사적 경로를 밟아 왔음이 분명하다.

A print featuring the cardinal prayers and truths of the our Holy Mother the Catholic Church. ”About Jesus Christ and the Church, I simply know they’re just one thing, and we shouldn’t complicate the matter.” Jeanne d’arc. 사진출처=tumblr.com

신앙의 보고(寶庫)에 대한 설명, 신학:교도권 중심

초기교회 이후에 교리가 충분히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단논쟁이 활발했다. 이대 갈등을 없애고 교회를 일치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교도권이었다. 교회권위가 구원의 진리를 열정적으로 변호하고 믿을만한 해석을 내려야 했다. 진리는 교도권에 의해 제안되고, 교리로 정식화 되었다. 고대교회의 아리우스파나 펠라지아니우스뿐 아니라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시대의 모든 도전에 대해 교회는 성경과 전통, 신학적 추리를 통해 응답해 왔다. 여기서 성경은 진리를 증명하고 영감을 주는 ‘진술의 저장소’였다.

이 신학은 도덕적으로 엄격하며, 교회법을 준수한다. 공의회에서 이미 결정된 신앙진리(교리)에 대한 어떠한 이견이나 개혁적 태도에도 적대적인 태도를 지녔다. 교회는 마치 자신이 오류와 진리를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으며, 이미 변할 수 없는 결정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교리들은 실존적이지 못하고, 역사적 기반이 취약하다. 그러나 이미 선취한 진리에 대한 강직함 때문에 이단자나 비판적 견해를 지닌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교 경험의 입문, 신학

경험의 신학은 교회를 교계제도와 동일시하지 않으며, 하느님 백성이나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이해한다. 이들은 성서해석학을 존중하고, 신앙감각(sensus fidelium)을 중시한다. 이 신학은 가톨릭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 현상에 호소력을 갖고 있다. 다만 하느님과 인간의 초월성을 부정하는 고집스런 휴머니스트와 전체주의 체제만을 문제 삼는다. 이런 의미에서 초교파적이다.

이 신학은 인생의 의미를 설명하고, 하느님과 만나는 체험적 신앙을 격려한다.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관계에 주목하며, 집단보다 인간의 가슴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이들은 성경과 교부들의 지혜전통을 따라서 진리에 대한 지적 인식보다는 ‘회개’(metanoia)의 체험이 강조된다.

구원의 신비에 대한 성찰인 신학: 종교신학

하느님 구원의 신비에 집중하는 신학은 종교의 보편적 현상에 주목하며, 인간의 죄악과 거부에 도 불구하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집중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제한하지 않고 타종교 안에 드러나는 위대한 가르침에도 개방되어 있다. 초월적 타자에 상관없이 살아가는 세속주의자들과 신비에 대한 개방성을 지니지 않는 무신론을 배척한다. 즉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종교성’에 관심을 갖는 신학이다.

이 신학은 인간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곧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고, 삶과 역사를 “그리스도와 그분 신비의 그림자”로 보면서 명상적 태도를 갖는다. 그래서 거룩함과 세속,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학은 지나친 낙관주의적 태도 때문에, 현실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악의 세력을 파악하지 못하며, 결국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지배도구가 될 위험이 있다.

초월적 인간학인 신학

초월적 인간학에 기초한 신학은 ‘개인의 초월성’에 주목한다. 인간이란 살아 있는 초월적 존재이며, 이 때문에 인간 의식 속에 존재하는 절대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즉, 인간을 하느님께 무한히 개방되어 있는 존재, 곧 신비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외침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분의 영원한 목소리와 잇닿아 있다고 본다. 인간존재를 그만큼 거룩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 인간적 요소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개인의 초월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사회적 갈등의 역사적 맥락을 놓칠 위험이 있다.

“When I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me a saint. When I ask why the poor have no food, they call me a Communist.” ~ Archbishop Hélder Câmara of Brazil. 사진출처=The New Yorker

시대의 징표인 신학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목헌장>을 통해 교회가 이 세상 안에서 희망과 걱정을 함께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인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야 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사목헌장 1항)

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는 신학은 그동안 비(非)신학적인 주제로 여겨왔던 정치, 사회학, 경제, 해방운동, 과학기술 등을 대화상대로 삼기 시작하면서 정치신학, 세속화신학, 희망의 신학, 과정신학 등을 낳았다. 이는 신학이 교회 내 교리문제를 다루는 학문에 머물지 않고, 교회를 둘러싼 사회의 공공성과 정치적 의미를 묻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교회 역시 세상에서 책임있는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속화는 인간을 마술성에서 해방시켰고, ‘명시적인 종교적 언술’ 없이도 세상에서 책임있는 주체로 서게 하였다. 희망은 세상의 변화와 혁명을 고무시키는 역동적인 인간을 지지한다. 이를 두고 보프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은 우리들 가운데 있는 동안 ‘나는 인습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했던, 그리고 마음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와 모든 피조물을 포괄하는 변화를 시작했던 ‘나자렛 예수의 체제 전복적이고 위험한 생각’을 재발견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시대의 징표에 주목하면서, “교회가 기존 질서의 합법화를 위해 지금가지 천 년의 세월을 소비했다며, 이제는 교회가 세상의 인간화를 위해 변화의 주체가 되고 원동력이 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았다”고 보프는 말했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신학은 여전히 유럽 중심의 학문적 차원에서 진행될 뿐 제3세계의 절박한 현실을 반영하는 실효성 있는 신학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프는 비판한다.

예속과 해방의 신학

Linocut by Robert Hodgell, ca. 1960's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허약한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났다. 해방신학은 오늘날 필요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해방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관찰) 첫단계는 하느님 자녀들이 겪는 가난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은 분명히 이들이 겪는 ‘강요된’ 가난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 가난한 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받는 주님의 종’을 발견한다. 아울러 이들이 겪는 가난의 이유를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한다.

(판단) 분석된 사회현실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복음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평가한다. 여기서 죄악의 길과 은총의 길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천) 완전한 해방의 과정에 동참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 속에서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동반자가 된다.

해방신학은 교회기초공동체와 해방운동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차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신학이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운동과 실천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학은 정치학이 신앙을 대체할 위험이 항상 있다. 신앙은 정치적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때문에 신앙의 풍요로움을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여전히 ‘신비와 예언’의 통합이 요청된다.

그래서 보프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자는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모든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난 뒤에 비로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난한 종이요, 할 바를 다했나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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