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어떤 교회가 교회인가? …민중교회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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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어떤 교회가 교회인가? …민중교회를 향하여
  • 한상봉
  • 승인 2017.05.1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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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과 은총 1강

 

 

레오나르도 보프는 1968년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인 메데인 회의에서 시작되어 1978년 푸에블라 주교회에서 공인된 해방신학의 대표적 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고통받는 민중의 편에서 그들 자신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민중의 교회’를 갈망했던 보프는 1984년 <교회의 권력과 은총>을 저술하고 난 뒤에, 이 책 때문에 교황청의 소환을 받았다.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인 라칭거 추기경은 장시간 심문을 하고나서 보프에게 신학적 견해에 대한 침묵명령을 내렸다.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해방신학의 계급적 당파성과 마르크스주의적 요소에 대한 비판을 담은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을 발표한 직후였다.

물론 1986년 4월 6일 해방신학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 견해를 담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이 나오면서, 보프 신부에 대한 침묵명령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방신학에 대한 교황청의 단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보프 신부는 교회의 간섭에 밀려 1992년 6월 28일 사제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보프는 사제직을 버리면서 “그것은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요 끝내는 몹시 어렵게 된 나의 일을 계속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보프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해방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의 해방력을 되찾고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권력자들의 이익에 묶어 두고 있는 쇠사슬을 깨뜨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권위적인 중앙집권적 교회를 꿈꾸었던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프의 생각은 그에게 가혹한 ‘십자가’를 안겨주었다. <교회의 권력과 은총> 서문에서 보프가 “아담의 후손들에게 지워진 피로와 고통을 지닌 채 따를 수밖에 없는 형극의 길, 바로 지금 우리가 걸어야 할 그 길을 우리보다 앞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바치며 걸어갔다”고 쓴 것을 보면, 이미 예감하였던 고통이었고, 그 안에서만 보프는 복음적 확신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출처=forest007.tumblr.com

하느님 나라-세상-교회

교회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세상의 긴장 속에 현존한다. 예수가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는 “불완전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거룩함으로 충만하여 세상 속에서 실현된 유토피아”이며, 세상은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을 위한 싸움터”라고 보프는 말한다. 여기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 그 자체는 아니며,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서 세상 안에 그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중재자)”이다.

(1) 신국(City of God)인 교회 : 자족적인 완전한 사회

신국인 교회는 자기완결적인 폐쇄적 교회 유형이다. 이런 교회는 성사, 전례, 성서연구를 통해, 그리고 본당활동을 통하여 자기구원을 위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믿는다. 교황과 주교 등 교계제도가 조직적 핵심을 이루는 구조여서, 필연적으로 ‘성직자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어떤 결정도 성직자 없이 내려질 수 없다.

이 교회에서 ‘세상’은 어떤 신학적 가치도 없다. 세상은 다만 교회의 중재를 통해서만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개종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특히 정치의 영역은 ‘오염된’ 공간이기에 기피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되어, 국가처럼 ‘완벽한 사회’로 여겨진다. 이런 교회는 세상의 간섭이나 훈계를 들을 필요가 없이 완전하므로, 교회는 가톨릭신문, 가톨릭대학, 가톨릭신용조합 등 ‘가톨릭’으로 표출되는 이름으로 사업을 벌인다. 그러나 실상 교회의 운영방식은 세상의 운용방식을 복제하면서 자신을 세상에서 격리시킨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평화방송'(PBC)을 최근에 '가톨릭평화방송'(CPBC)로 개칭한 것은 참 역설적이다.  

(2) 어머니와 교사인 교회 : 제국주의적 교회

식민지를 통해 교회를 이식한 대부분의 교회는, 교회의 필요와 안전을 보장해주는 국가와 맺은 계약이나 협정에 의존하는 ‘제국주의적 또는 식민지 교회’가 있다. 교회는 ‘교계제도’와 동일시되며, 교회는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계급과 연대하며, 이 계급을 중심으로 대학, 교회기관, 정당 따위를 세운다.

이 교회는 어머니처럼 상류계급의 자녀들을 교육시켜 이들이 가난한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도록 독려한다. 이들은 부유층의 기부를 통해 방대한 자선사업을 벌이는데, 진정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나 “가난한 사람의 교회”로 가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의 위계 안에서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 중요하며, 성직자들 안에서 예언자적 증언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계제도를 통한 권력의 집중화는 교회가 다른 정치권력과 연대하는 것을 매우 쉽게 만든다. 다만 프랑스대혁명 때처럼,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나 전체주의 때문에 민중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억압을 받을 때만 위기에 봉착한다. 그럴 때마다 신자들은 교계제도로부터 ‘중립을 지키라’는 명령을 듣는다.

이럴 때 교회는 스스로 ‘비정치적’임을 강조하면서 책임을 모면하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의 정통성을 문제 삼지 않고 비교적 편안한 관계를 맺는다. 이런 교회는 교회의 활동범위를 제의실로 축소시키기 때문에 정치권력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3) 구원의 성사인 교회

교회는 보편적 구원의 성사이기 때문에 ‘세상’ 역시 교회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구원의 성사’로서 기능해야 하는 교회는 더욱 정의롭고 우애 있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투신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영감을 부어준다. 교회는 더 이상 국가권력에 직접 호소하지 않고 과학적, 기술적, 정치적 권력을 지닌 민간단체에 호소하기 시작한다.

교회의 언어는 자본주의의 악습과 가난한 이들의 소외문제에 개입하며 예언자적 태도를 지닌다. 그러나 교회는 대안적 전망보다는 여전히 사회의 지배층이 받아들일 만한 ‘체제 내 개혁’을 주장한다.

교회는 세상을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하느님 활동의 장소로 이해한다. 교회는 이 세상과 화해하고 동반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도했던 교회상이며, 예전에 반(反)교회적이었던 지식인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교회는 가진 사람들의 시각에서 가난한 사람을 바라본다.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Old church in San Ysidro, New Mexico. The village has been a farming community since 1699 when Juan Trujillo established a settlement named for San Ysidro, or Saint Isidore the Farmer. 사진출처=jpgmag.com

(4)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민중교회는 해방의 역사적 주체가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보통 성경읽기로 시작된 ‘교회기초공동체’(B.E.C)였다. 처음에는 성사와 전례, 기도를 돕는 신앙 차원에서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서로 삶을 나누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교회이다.

그들은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이 사회적 불의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의를 낳는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일한다. 이 신앙공동체는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장소이다. 한편 정치공동체는 교회기초공동체에서 완벽하게 표현되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신앙과 구원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장소이다.

보프는 이 교회기초공동체의 시작을 ‘교회의 창세기’라고 부르는데, 그만큼 혁신적이기 때문이다. 교회기초공동체는 민중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장소이며, 모든 것이 함께 논의되고 결정되며, 비판적 사고가 고무되는 장소이다. 민중들이 그동안 억압받고 빼앗겼던 발언권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 백성의 친교, 평신도의 봉사직과 예언직에 바탕을 둔 이런 교회의 성장은 1979년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천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목적 지표가 되었다. 교회와 세상을 변혁시키는 하느님 니라 운동에서, 가난한 이들은 이제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된다. 그들은 복음을 가장 잘 알아듣고, 복음대로 살며, 복음적 명령을 실현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존재이다. 이제 교회는 국가나 지배계급을 통하지 않고 직접 그들을 만난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가능해졌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당파적 선택은 교회의 보편적 구원사명과 어긋나지 않는다. 민중교회는 모든 사람을 지향하지만 우선 가난한 이들의 염원과 투쟁을 통해서 보편적 구원으로 가고자 한다. 더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 가난한 이들의 권리인 인권회복,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체적 봉사를 통해 ‘세상’에서 총체적 해방을 얻음으로써 만인이 탐욕과 굴종, 권세와 가난에서 해방된다.

세상은 하느님 나라와 반(反)하느님나라가 공존하는 준(準)하느님나라이다. 교회는 반(반)하느님 나라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통하여 정의와 공평이 실현되고 형제애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는 견인차이며, 제도적인 표지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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