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자유로운 노숙의 노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상태바
[성인] 자유로운 노숙의 노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 한상봉
  • 승인 2017.05.15 1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t Francis of Assisi (1182-1226)

오래된 노숙 "어떤가, 몸이여"

by jotasil

종이 박스를 구할 수 있는 날이면 그래도 행복했으리라. 작은 육신을 누이고 그 주위에 종이박스를 펼쳐서 둘러 세우고 제법 방같이 꾸민 반 평짜리 공간이 그래도 아늑했으리라. 곱게 신발까지 앞에 가지런히 벗어두고 옹이진 발가락을 부끄럽게 두 겹 양말 속에 감추었습니다. 냄새가 고약하지만 따뜻합니다.

사시사철을 그들은 겹겹이 옷을 입고 지냅니다. 속살을 들키고 싶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옷으로 무장을 한 채, 알아볼 수 없는 만큼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마저 가립니다. 그래도 나는 나를 숨길 수 없으므로 내 영혼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아침녘부터 위장에 소주를 붓곤 합니다. 이 안전장치가 없다면 그들은 오래된 노숙(露宿)을 버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도 한때 노숙자였습니다. 이슬을 피할 한 자락 겉옷을 입고 나무 밑에서 제자들과 힘겨운 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낮은 피곤할수록 좋지요. 몸을 부려 정해진 목표도 없이 헤매어야 피곤한 육신이 피부에 스며드는 한기(寒氣)를 이기고 잠들게 해줄 테니까요.

삶이란 참 고단한 투쟁입니다. 삶이란 언제나 예측을 벗어나고, 제 맘대로 궤도를 만들어 도는 유성처럼 잡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간혹 있지요. 나는 지금 어디서 밥을 빌어먹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내게 일감을 맡겨준 그 사람에게서 밥을 빌어먹고 있는가? 아님 하늘과 같은 은혜로 우리를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기대어 밥 한 술 얻어먹는가?

내가 오늘 하룻밤을 위하여 신문쪼가리와 종이상자를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좋으니 아마도 나는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로 일기에 기록될 것입니다. 김사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노숙. 한 생애를 동행하여 준 고마운, 그리고 미안한 육신에게 살살 말을 건네고 있는 거지요.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by Piero_Casentini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역시 자신의 노래를 지어부를 줄 아는 가객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옷감상인이었던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였지요. 프란치스코는 청년기에 사치와 호사와 음악 속에서 동년배들의 탐나는 지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매력적이며 위트가 있고 친절하며 재산을 펑펑 쓰는 호방한 젊은이요 응석받이 아들이었지요.

아더왕의 원탁의 기사처럼, 샤를마뉴 대제의 용사들처럼 살고 싶다는 야망을 품고 아씨시와 페루지아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말에서 떨어져 페루지아 감옥에 갇히고 되고, 몸값을 치르고 석방된 프란치스코는 병상에서 누워지내는 동안에 다시 외로움의 사막에 갇히게 됩니다.

이런 프란치스코가 무너져 가던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에 어떤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네가 보듯 폐허가 되어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해 다오.” 이 말을 듣자 단순하고 호방했던 프란치스코는 주저 없이 아버지의 상점에 돌아가 옷감꾸러미를 훔쳐내서 팔아 버렸습니다. 그 돈을 성 다미아노 성당의 늙은 사제에게 건네주고, 성당을 재건할 돌을 구하러 다시 아씨시로 돌아갑니다.

그는 이제 허름한 옷을 입고 성당 지을 돌을 구걸하며 돌아다녔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청년이 벌이는 거지행각을 사람들은 당연히 비웃고 조롱했겠지요. 분노한 아버지가 창고에 감금시켜 놓기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죠. 아버지는 다시 거리로 나간 아들을 붙잡아 아씨시의 주교 앞에 끌어다 놓고 마침내 재판을 걸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가져간 옷감과 말을 자신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때에 군중들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생애의 가장 극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내 말을 들으시오! 지금까지 나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내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하느님을 섬기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나는 그의 돈뿐 아니라 그에게서 받은 모든 옷도 돌려줍니다. 지금부터 나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내 아버지라 부르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주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었던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건네주고 벌거벗었습니다.

그 후로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문자 그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감명을 받고 모여들기 시작했지요. 첫 번째 추종자였던 베르나르도가 하느님의 종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복음서의 이 구절을 읽어 줍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는 누구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것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수도복조차 내어주어 벌거벗은 채로 남의 조롱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자비심 때문이었답니다. 그는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돌보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음식을 먹이고, 짓무른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제 무리들에게 개인으로나 공동으로나 어떤 종류의 재산이든 소유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노동을 하거나 구걸해서 살아야 했지요. 그들은 돈을 가지거나 심지어 돈에 손을 대는 것조차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탁발승들은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떠돌아다니며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설교를 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늑대와도 이야기를 나누는 프란치스코

한편 프란치스코는 모든 형태의 자연, 그러니까 새와 나무, 동물들뿐 아니라 달과 해, 그리고 바람 등에 대해 보기 드물게 애정을 느꼈습니다. 비온 뒤에는, 길바닥에 나와 있는 지렁이들이 발에 밟히지 않도록 안전한 곳에 옮겨주느라 그의 걸음이 느려지곤 했답니다. 그는 자신의 움집에 살고 있는 쥐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고 먹을 것도 주었습니다. 그가 죽던 날 밤, 종달새들이 그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중에서 구비오의 늑대 이야기가 가장 유명합니다. 구비오 마을에 사나운 늑대가 출현하곤 했지요. 마을에 나타난 프란치스코에게 마을 사람들이 늑대를 주의하라고 귀뜸해주자, 프란치스코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말하며, 몽둥이나 아무런 무기도 없이 없이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이윽고 늑대가 프란치스코에게 달려들자, 십자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말하죠. “늑대 형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네. 나도 다른 누구도 해치지 말게!” 그러자 프란치스코에게 감화를 받은 늑대는 이빨을 감추고, 마치 어린 양처럼 프란치스코 발치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늑대와 이른바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늑대가 사람들을 해치지 않은 대신에 날마다 먹을 것을 주어서 다시는 배고프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마을 사람들에게 “지옥의 불길이 늑대 이빨보다 훨씬 더 위험할 것”이라며, 늑대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라고 설득했습니다. 그후론 마을의 개들조차 늑대를 보고 짖어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연과 소통할 줄 알았으며,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이었지요.

무장해제,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1219년 제5차 십자군 전쟁 때 에집트의 술탄(왕), 말리크-알-카밀을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전쟁은 일상이 되고, 십자군들은 난폭했으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고, 모슬렘(이슬람 교도)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모든 이교도들이 학살당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황에게 ‘신앙의 적’이라고 단죄받은 이들은 그가 설령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를 반대하거나 나와 다른 생각과 신앙을 가진 자는 이미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지요. 그것은 복음서와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초기 300년 동안 교회는 사람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사랑과 용서였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복음이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전쟁’으로 축복했습니다.

이때, 수도생활 13년째에 접어들었던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인의 머리를 잘라오면 비잔틴 황금으로 보상하겠다고 공표한 술탄을 만나러 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동행한 길벗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뢰를 하느님께 둡시다. 복음말씀이 우리를 통해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도중에 이들은 술탄의 병사들에게 붙잡혔는데, 모슬렘 병사들은 그들을 야만적으로 다루며 욕설을 뱉고 매질을 하며 쇠사슬로 묶어서 술탄에게 끌고 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술탄에게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자비와 형제적 사랑으로 시작된 일이라고 밝힙니다. 술탄은 그에게서 감명을 받았는데, 프란치스코에게서 어떠한 적개심도 읽을 수 없었고, 물질재화를 먼지처럼 여기는 태도에 놀란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전쟁 한복판에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적에게로 찾아갔고, 그들을 형제처럼 사랑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규칙은 ‘복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습니다. 복음은 앙갚음을 거절하고 적을 오히려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적을 만나면 맞붙어 싸우거나 달아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사랑합니다.

예수는 폭력 앞에서 말씀과 행동으로 저항하였지만 폭력 사용을 거절합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해방을 선포하셨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원수마저 사랑함으로써 그들을 회심으로 이끌어갑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by Pauline Baynes

차이에 대한 존중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적에 대한 사랑과 비폭력 저항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잔혹한 적에게 우리는 말한다. ‘우리를 감옥에 넣으시오. 그래도 우리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집에 폭탄을 터뜨리고 아이들을 위협해도 우리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두건을 쓴 폭력의 박해자들이 우리를 때리고 반쯤 죽여 놓는다 해도 우리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우리의 힘에 의해 당신을 항복시킬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어느 날 우리는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만을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의 마음과 양심에 호소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당신을 이길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승리는 두 배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모슬렘 문화를 존중했으며, 마호멧을 인정하고 술탄의 종교를 모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슬람종교가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같은 하느님을 숭배하므로 존경심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여행은 일년 쯤 계속되었는데, 돌아와서 쓴 편지에 따르면, 그는 저녁에 전능한 신을 찬미하기 위해 모슬렘들이 엎드려 기도하는 관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술탄이 제의한 보물들을 모두 거절하였지만, 한 가지 선물만은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상아로 된 뿔나팔입니다. 모슬렘들은 하루에 5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리는데, 이 기도 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며 사람들을 모을 때 사용하던 나팔입니다. 이 뿔나팔이 가진 종교적 의미를 가슴에 새겼던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자신이 사람들을 기도에 초대할 때도 이 뿔나팔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존중하는 태도가 차이를 넘어서 다른 이들을 감복시키는 것입니다.

술탄은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겸손한 태도에 감복되어 모슬렘 지역에 있는 동안 프란치스코를 보호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보살펴주고 치료해주고 잘 먹이고 석방시켰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형제적 우정이 술탄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린 것입니다.

투사 없이 겸손하게

우리는 마음속에서 적(敵)을 만들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데 익숙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우리 편과 적으로 갈라놓고, 은연중에 상대방은 우리와 다를 뿐 아니라 위협적이고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가치가 없으며 인간적이지 않다고 미리 단정하고 ‘위험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돕지 않고 무시하고 폭력을 사용하고 희생양으로 만들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교도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아이들이기 때문에, 흑인이거나 제3세계 외국인이기 때문에 형제적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에서 빼버려도 된다는 것이지요.

프란치스코의 시대에는 모슬렘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어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게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그들에 대한 성전(聖戰)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종교와 정치지도자들에게 전쟁을 중지하라고 호소했으며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조차 사랑했습니다.

사실 적을 만드는 뿌리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서지고 일그러진 모습들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사악한 측면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그 모든 죄악을 상대방의 것으로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저 놈이 나쁜 놈이야!”하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섬멸하는 동안 우리 자신의 양심은 ‘의로운 일’로 너무 바빠서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그동안 모든 죄스러운 것을 모슬렘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뒤집어 씌워왔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이 폭력적이라고 하지만, 자본주의의 상품경제 역시 가난한 이들에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말 못하는 자연 생태계는 그렇게 일부 인간의 풍족한 삶을 위해 유린되고 파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자기 안에 있는 인간적 약함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스런 모습을 직면함으로써 충분히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결함과 심지어 자연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었지요.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악마들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더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죄 많은 몸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은총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죄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증오, 분노와 폭력성을 발견하였으나 헤아릴 길 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감싸주었으며, 내가 나를 용서하는 순간에 세상의 모든 적들은 동시에 사라집니다. 돌아보면 그들도 우리처럼 죄와 은총이 더불어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