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세력들, 용서하면 의로운 사람이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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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세력들, 용서하면 의로운 사람이될까?
  • 김경집
  • 승인 2017.05.1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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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장미 선거’가 끝났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며 축제다. 물론 그 축제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시민의 의식과 신념이 올곧을 때만 해당된다. 갑자기 치러진 이번 선거는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몰염치 그리고 반민주주의 행태가 한꺼번에 표출된 국정 농단에서 비롯되었다. 천만 넘는 시민들이 추운 주말마다 모여 촛불을 들었고 마침내 악한 정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그를 추종했던 자들은 반성은커녕 적반하장으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대들었으며 미래의제에 대한 고민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박고 오로지 퇴행적이고 한심한 북풍 타령이나 하면서 극우 수구 세력에만 기댔다. 촛불은 꺼지지 않았는데 횃불로 미래를 밝혀도 모자랄 판에 그 불씨마저 지워내려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악은 부지런하다

좀 더 건강한 보수를 재건하려는 정치인들이 잠깐 그 무리를 뛰쳐나왔지만 곁불 쬐는 데에만 익숙한 자들, 다음 선거에서 자신들을 밀어줄 사람들이 결국 수구 세력임을 확인한 자들은 금세 그 정당을 다시 뛰쳐나와 오물로 덮였다고 비난하던 그 울타리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유권자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바보가 아니다. 서민들을 쥐어짜 소수의 강자들에게만 이익을 몰아주면서 경제를 살린다는 거짓 희망을 뿌려대고 늙었다고 무시하던 이들에게 표를 구걸하는 일에는 능하지만 정작 미래를 살아갈 청년과 청소년을 위한 정책 하나 변변하게 마련하지 못한다. 그래도 찍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이 상존하는 한 미래는 암울하다. 부패와 무능으로 철갑을 두룬 수구 극우 세력들의 놀라운 장점 가운데 하나는 대단히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악은 부지런하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거를 통해 적폐의 청산이냐 화해와 통합이 중요하냐를 놓고 설전이 오갔다. 물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부는 통합을 추구해야 하고 자유로운 소통과 협치를 통해 미래 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그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정의가 만개하도록 해야 한다. 악의 세력에 물들었다 해도 그가 과거를 참회하고 고백하며 미래 가치와 민주주의의 실현에 앞장서겠다면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섣부른 용서는 경계해야 한다.

용서가 면책과 동의어가 될 수는 없다. 용서는 강자의 몫이다. 약자가 강자를 용서하는 게 아니다. 용서는 관용이다. 그러므로 너그러움은 강자의 요건이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세력은 관용을 실천해야 한다. 하지만 그 관용이 무분별한 타협이거나 무조건적 사면이어서는 안 된다.

by Brian Kavanagh

용서보다 의화

진정한 용서는 상대를 의화(義化)하는 것이다. 지난 시절 저지른 패악에 대해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서약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 ‘죄와 용서’는 성서 전체의 핵심 주제다.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문에서 용서보다 이 의화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했다. 갈라디아서를 거쳐 로마서에서 그 독특한(?) 용어가 핵심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무시하거나 간과한 것이 아니다. 물론 바오로가 유다교의 빈약한 형태인 디아스포라 유다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는 구원론과 선교 신학의 토대는 바로 의화라는 핵심 개념이다.

<용서보다는 의화>라는 저서에서 김영희 수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그의 구원론과 선교 신학의 토대를 탐색하면서 바오로가 ‘용서’보다는 ‘의화’라는 용어를 선택하게 되는 구원론적, 선교적 의도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해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바오로에게 의화라는 개념은 용서를 대신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의 새롭고도 종말론적 차원을 표현하는 데에 용서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가 통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것은 복음의 보편적 차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

분명 박근혜 정권이 저지른 패악은 경악할 수준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 아닌데도 그 일부만으로도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한심하고 무능하며 무책임한 비정상적 정치 행위가 만연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시스템이 붕괴하고 약자는 구조적으로 억압 착취되었으며 그러한 틀은 고착화되었다. 다행히 그 패악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결국 탄핵되었다.

그러나 박근혜는 반성은커녕 동의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무고한 희생자로 고스프레하고 그녀의 이미지와 권력에 의존했던 자들도 반성은커녕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몰두할 뿐 자신들이 가담자나 방조자였음을 고백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을 비판하고 탈당했던 자들조차 다시 그 당으로 기어 들어가면서도 아무런 대의 천명도 하지 못하는 것을 태연하게 드러냈다.

과연 이러한 자들이 의화의 대상일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도 그리고 그 자들을 추종하고 선택한 사람들도 모두 ‘동료 시민들’이다. 그들을 제거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일부라도 의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계도나 달램이 아니다. 스스로 깨닫는 게 이미 난망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릇된 신념이 빚어낸 허물을 제 눈으로 직시하고 그것을 반성하며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고 자신을 더 나은 민주시민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포용과 용서가 능사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온전하게 눈을 떠야 한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로카 6, 39)

나 또한 눈 먼 자 아니었을까

물론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망가뜨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도 그 방관자였음을 먼저 부끄러워해야 한다. 촛불집회에 모여 규탄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고 해서 그 방관의 허물이 면제되는 건 아니다. 나 또한 ‘눈먼 이’였음을 겸허하게 반성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음이 되풀이 되지 않고 청년들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갖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으며 미래가치를 실현함으로써 미래의 삶을 행복하게 누릴 수 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막론하고(특히 개신교의 주요 단체에서 노골적으로 그랬지만)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반시대적이고 퇴행적인 어리석은 행태를 주저 없이 드러낸 것에 대해 교회와 신자들은 냉정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와 정의의 실현, 미래의제의 인식, 청년 세대에 대한 공감 따위는 조금도 없이 오로지 시대착오적 안보관을 응원하며 그것이 마치 교회를 지키는 것인 양 착각하거나 그런 수구세력들에 기대어 자신들의 교회 내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만 혈안인 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생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 48)

선거는 끝났다. 물론 여전히 도처에 악의 그림자들이 드리웠다. 그들은 언제든 악의 고개를 쳐들 것이다. 이번 선거는 바로 그것을 증명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화합과 통합이 필요한 시기다. 용서와 화해가 요청되는 때다.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설픈 용서와 가짜 화해가 아니라 서로를 의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 사람과 삶의 가치를 민주주의와 정의의 영역에서 실현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안게 되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그 의화에 달렸다. 이제 새로운 시대는 교회도 사회도 그 의화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맞아야 한다. 단테가 <신곡>에서 경고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처음부터 영혼이 이 의지를 품으나
그 전에 죄를 좇던 그대로 이제는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책벌을 구하는 바람이 이 의지를 거스르느니라.”(연옥편 제21곡 64장)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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