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힘은 강력하다 …그 가련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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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힘은 강력하다 …그 가련한 사람
  • 최충언
  • 승인 2017.05.09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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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언 칼럼] 

사진의 힘은 강력하다. 단 한 장의 사진은 현실을 분석한 글이나 말보다도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기도 한다. 1985년에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있는 중증복합장애아들이 사랑으로 모여 사는 <천사들의 집>에 원장으로 계시던 최기식 베네딕도 신부님을 찾아간 적이 있다. 복역을 마치고 의대에 복학을 했다가 급성 간염으로 1학기 말에 휴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최 신부님은 사회복지일 때문에 바빴다. 기다리며 보라고 최민식(1928-2013)의 <인간> 시리즈 사진집을 건네주었다. 모두 열권이었나? 많은 인간의 얼굴을 보았다.

사진=최민식

사진 속에는 가난해서 웃는 사람, 가난해도 웃는 사람, 웃어서 가난해진 사람들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게꾼들의 이야기꽃, 망치를 어깨에 올린 막노동자의 고단한 응시, 국수를 말아 올리는 길가의 아이들, 동냥하는 늙은 거지 등 남루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때의 놀라움과 짜릿한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의 사진은 휴머니즘이며, 리얼리즘 사진작가로서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사진 곳곳에 진실을 담아내고 있었다.

“사진의 생명력은 논리 이전의 감동에서 오는 것이다. 때문에 내 사진은 언제나 휴머니즘에 입각해 있다. 우리의 삶이 전하는 진실한 이야기를 민중들에게 전하는 책임과 사명이 내 사진의 모든 것이다.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소외의 현장을 담은 내 사진은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가난하고 누추한 삶의 진실을 사랑하는 나는 호화주택에서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졸부들에 비해 가난한 서민의 진실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가를 잘 알고 있다. 나의 사진 작업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나는 이 세상 끝까지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 살다가 죽을 것이다.”

대충 이런 내용을 작가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딱 한번 노숙 아닌 노숙을 한 적이 있다. 친구가 다니던 대학가에 놀러 갔다가 밤이 늦어 버스를 놓쳤다. 호주머니는 비었고, 걸어서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어느 교회 안에 긴 나무의자가 눈에 띄었다. 늦가을이라 한밤중에 바람은 매서웠고 날은 추웠다. 우리 다섯 명은 뒤에서 껴안는 자세로 번갈아가며 날을 샜다. 일종의 기차놀이인 셈이었다. 그 날 얼마나 떨었는지 여명이 밝아오자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서로의 체온으로 온기를 나누었다. 하룻밤의 노숙 경험만으로 힘이 드는데, 그것이 일상이 된다면 어찌 견딜까?

두어 달 전, <인간> 시리즈의 사진만큼이나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사진을 보았다. 페이스북에 올린 페친의 담벼락에서다. 노숙자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성 보니파시오 성당(St. Boniface Catholic church) 내부의 장궤에서 잠을 자고 있는 노숙자들의 사진이다. 세어보니, 서른다섯 명은 족히 넘었다. 바로 이거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의 본래 모습을 봤다. 주일 미사 이외에는 별 용도가 없는 성전이 이렇게 집 없는 사람들에게 유용할 수 있구나.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교회의 이런 모습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모범을 보이고 있다. 남부유럽에 유례가 드문 혹한이 찾아왔을 때였다. 로마 트라스테베레 지역에 위치한 성 갈리스토 성당을 노숙자들을 위한 숙소로 제공했으며, 서른 명의 노숙자가 이곳에서 따뜻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또한, 교황청 소유의 승용차와 승합차를 야간에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 인근에 주차해 노숙자들이 추위를 피하는 용도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한 바도 있다. 추운 날씨에 얼어 죽는 노숙자가 생각 밖으로 많다. 아웃리치를 다녀보면, 동절기에는 동사 유무 확인이 주요 관심사가 된다.

사진=최민식

요즈음 나의 관심은 노숙자 복지문제다. 아웃리치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답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아웃리치 활동 중에 매번 느끼는 것은 의자 가운데에 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눈에 거슬리고 화가 나기도 한다. 굳이 칸을 질러 노숙자들이 그나마 몸이라도 웅크리지 않고 바로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무슨 놀부의 심보란 말인가? 의자에 몸을 누이려면 칼잠을 자듯이 웅크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잠이라도 반듯하게 잘 수 있도록 칸을 치울 일이다. 노숙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까?

노숙자 복지 대책 중에 ‘주거우선’ 전략이라는 게 있다. 샘 쳄버리스가 제안한 이 전략은 안정적 주거가 확보된 뒤에만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대처를 시작한다는 이론에서 출발한다. 노숙자에게 일을 하라거나, 생활태도를 바꾸라거나, 단체생활을 하라는 등의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 곳을 제공하는 실험을 했다. 캐나다의 인구 6만 3천명의 작은 도시인 메디신햇은 노숙자 해결책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노숙자라면 알코올중독, 정신질환을 따지지 않고 주거를 제공했다. 보통 방 한 칸의 깔끔한 아파트가 제공되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주거만 제공하는 비용이 노숙자들에게 긴급 의료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용보다 저렴했고, 근본적인 효과가 있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마태오 복음서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신약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본문으로 꼽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애용하는 성서 구절이기도 하다.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를 영접하는 지 아닌 지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지 아닌 지에 달려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서 예수를 발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놀라운 특징 아닌가?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고단함에 지친 막노동꾼들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포장마차, 지나가는 손님들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려고 온 몸을 흔들며 목청을 높이는 재래시장, 불구가 된 다리를 엎드려 끌며 부는 하모니카 소리가 나는 남포동 거리, 남루한 옷을 입고 희망을 잃어버린 노숙자들이 누워있는 지하도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세상, 바로 이런 곳이 예수가 찾아가고자 하는 장소가 아닐까?

"이 세상의 재화는 원래부터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사유재산권은 유효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이 이 원칙의 가치를 없애지 못한다. 사실상 재산의 사유는 ‘사회적 저당권’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며, 이 말은 사유 재산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갖는 것이며, 재화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원리에 기반을 두고서, 또 그 원리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임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을 배려함에 있어서 특수한 형태의 가난, 즉 기본 인권이 결여된 가난, 특히나 종교 자유의 권리와 경제적 창의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빈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은 당연히 저 무수하게 많은 굶주린 사람들, 곤궁한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현실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저 ‘부자’가 거지 라자로가 자기 집 문간에 누워 있음을 모르는 체하는 바와 다를 것 없다." (사회적 관심, 42항)

집이 없어 거리를 떠돌며 한 몸 누일 공간조차 없는 노숙자들이 반듯한 집 한 채를 가지는 꿈을 꿔본다. 가난하게 태어나고,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하게 죽었으며 또한 가난한 이들을 찾아갔던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우리는 그분의 제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최충언 플라치도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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