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피오레의 요아킴 …성령으로, 그대만이 품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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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피오레의 요아킴 …성령으로, 그대만이 품은 자유
  • 한상봉
  • 승인 2017.05.0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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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chim of Fiore (1132-1202)

인연의 그물망

내 젊음이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난 몇몇 소중한 인연들이 있습니다. 삼십대를 통틀어 노상 만나던 사람들은 대개 가톨릭신자였지요. 신자라 해서 모두가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살면서 똑똑하게 배웠습니다만, 그마저도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을 새로 배우고 있답니다.

저마다 제가끔 생애가 가르쳐준 소중한 이야기 한 자락씩 품고 사는 법이고, 그 이야기가 다른 노래를 부른다고 한들 어쩌겠습니까? 이 역시 순전히 자기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주고 또는 받아온 결과일 것입니다. 예전에 제 주변에선 이런 말이 유행했죠. “선배 잘못 만나서 이 모양”이라고. 어떤 신부님, 수녀님, 선생님, 부모와 친구의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길이 갈리고 사는 꼴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 법이지요.

예전에 <공동선>이라는 잡지사 생활을 할 때는 이른바 ‘지성인’의 범주에 들 만한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더군요. 아무래도 필자들을 고르다 보니, 비교적 진보적 성향을 가진 글쟁이들과 사귀게 되고, 이들에게서 비교적 고루한 교회 안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참신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세상과 인간을 성찰하는 새로운 시각은 내 정신을 맑게 무장시킵니다. 종교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람을 그저 사람인 채로 보게 되고, 교회 밖에서 오히려 투명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린 뒤에야 순결한 몸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산골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럽게 마주 친 사람들은 이승을 접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세상의 흐름에 반응하기보다는 제 마음의 흐름을 타고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바닥을 ‘도(道)판’이라고도 하고, 이런 사람들을 ‘마음공부파(派)’라고도 부르더군요. 사뭇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중엔 이제 더 이상 입을 기회도 요량도 없다면서 양복을 걸쳐 입고 밭으로 일하러 가는 이도 있었습니다. 지게 질 때 편하다나요. 구식 양복 어깨죽지엔 뽕이 들어있어 두툼했거든요.

언젠가 모악산 정상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어 더불어 도(道)를 닦는 이들을 만나본 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는 않았을 텐데, 세상이 정한 규칙과 상관없이 부부의 연을 맺고 금산사 부근의 농가를 얻어 소금을 구워 생계를 도왔습니다. 모악산에 파묻혀 있는 쓰레기를 들어내고 샘을 파서 양동이 하나만큼의 물을 얻어와 하루 동안 이 물만으로 밥하고 세수하고 밭에 버립니다. 구운 소금을 쌀로 바꾸어 먹으면서도 돈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전깃불도 끊어버리고 촛불아래서 함께 밥을 먹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둑신한 방안에서 자근자근 나누던 그이들의 낮은 음성이 귀에 아련합니다. 지난 날 노동운동을 하였다는데, 그는 성성한 수행자로 살면서 그렇게 이승에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실제적인 영성은 교회보다 저자거리에서 더 유행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대가 품은 자유

이 마당에 각별한 인연의 그늘아래 들어온 개신교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지금은 교회를 두고 목회를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임의진 목사이고, 또 한 사람은 김민해 목사이지요. 임의진 목사는 나보다 몇 살 아래인데, 귀농하기 전, 그러니까 벌써 8년 전입니다. 서울 상계동에서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갑자기 광주로 내려가 ‘남녁교회’ 목회자가 되더니, 전라도 강진에서 목회하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강진 남녁교회를 맡아서 시무했었죠.

그때 참 재미지고 신명난 교회가 시골에 들어선 셈인데요, 임 목사의 활달한 끼와 신명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던 한 시절이었습니다. 징을 치고 막걸리 먹으며 예배하고 잔치를 벌일 때 나도 몇 차례 내려가서 잘 놀다 왔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교회를 다른 이에게 맡겨두고 다른 길로 떠났습니다. 본래 동화를 쓰던 임목사는 음유시인이 되고 가객(歌客)이 되고 환쟁이가 되고, 그의 말마따나 떠돌이별 지구의 ‘여행자’가 되었지요.

그가 떠나간 남녁교회를 맡아서 시무했던 분이 김민해 목사입니다. 이 분은 저보다 몇 살 많으신 형님인데, 광주 시내에서 책방을 하면서 <풍경소리>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었죠. 그 덕분에 이현주 목사님이 시작하신 드림교회 첫 예배를 강진에서 함께 드리는 영광을 입기도 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퍽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지요. 이분들과 만날 때는 ‘사모(思慕)한다’는 표현이 같은 남자끼리도 가능하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김민해 목사 덕분에 사월 초파일에 강진 백련사에서 주지스님께 백련차(白蓮茶)도 대접받고 그랬는데요, 나중엔 남녁교회마저 버리고 ‘더불어드림교회’를 했더랬습니다. 교회건물을 버리고 사람들에게로 마을로 찾아가는 교회입니다. 공원이나 길에서 예배하고 여느 집에서도 예배하고, 초대받고 마음 닿는 곳 어디서나 사람들 사이에서 그저 교회를 사는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성령이 함께 하시면 그곳에서 교회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말하는 에클레시아(Ecclesia,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성령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던 성인이 있지요. 피오레의 요아킴입니다.

성령의 빛 아래, 피오레의 요아킴

Joachim of Fiore in a 15th c. woodcut, holding a book titled Apocalypsis Jesu Christi. Source: theologyandapocalyptic.files.wordpress.com

요아킴은 시토회 수도원 원장이면서 신비주의자이고 신학자이며 역사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폴리왕국의 첼리코에서 태어난 요아킴은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하다가 엄청난 재난을 목격하고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사순시기 동안 타보르산에서 묵상하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요아킴은 곧 시토회에 입회하였는데, 처음엔 수도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을 입은 채 설교하여 주위의 비난을 사기도 하였는데, 1168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성경의 숨겨진 뜻에 찾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나중에 수도원장 선출되지만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곧 사임하고 설교와 글쓰기에 전념하다가 마침내 칼라브리아 산속의 피오레에 수도원을 세우고 시토회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살다가 1202년 3월 30일에 이승을 떠났습니다.

요아킴은 세권의 유명한 책을 썼는데, <신약성서와 구역성서의 조화에 관한 책>과 <요한의 묵시록 설명>과 <10개의 줄이 달린 현악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들에 담긴 주제는 성경의 예언을 과거 역사와 미래와 관련지어 해석하자는 것인데, ‘영원한 복음’이라는 독특한 신비주의 사상을 내놓았습니다. 요아킴은 인간 역사가 삼위일체 세 위격에 해당하는 세단계로 진행된다고 보았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성부(聖父)가 구약성경의 질서에 따라서 권능과 위엄으로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노예제도가 사회를 유지시켰던 율법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선한 일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동안 감추어졌던 지혜가 성자(聖子)를 통해서 계시된 시대인데, 신약성경과 가톨릭교회가 세상을 관장하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는 율법을 대신해서 성직자가 하느님의 현존을 지탱하고 있던 교회 중심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선 선한 일보다 신앙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단계에는 성령의 시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새 질서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문자의 족쇄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적 왕국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며,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그로부터 ‘영원한 복음’이 세상 끝날 때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국가의 권위에도, 교회의 권위에도 매이지 않고 모두가 관상생활을 하며, 율법에 대한 복종이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을 넘어서 성령이 주시는 사랑만을 따라서 살 것입니다.

 

다시 생생한 초기교회로

요아킴의 생각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그 주장의 일부가 1215년의 제4차 라테란공의회에서 단죄 받았으며 중세기의 교부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나 보나벤투라에 의해 비판받았으나 13-14세기의 프란치스코회 엄격주의자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요아킴의 주장이 예수님의 복음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던 원시교회의 모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요아킴이 살았던 11-12세기는 교회가 황제의 권력을 제압하고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교회가 하나의 제국처럼 운영되고, 교황이 황제처럼 군림하며 완강하게 세속화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흐름에 저항하며 요아킴은 콘스탄티노 황제 이전의 초기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이러한 세속화에 맞서 복음적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막의 성자 안토니오처럼, 흔히 권력화되기 쉬운 제도적 리더십보다 성령의 자유를 믿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아킴은 줄기차게 초기교회처럼 사도적 단순함, 청빈에 대한 이상,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교회로 권력화된 가톨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가 어느 시대 역사에나 현존하지만, 지금 시대는 특별히 성령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어떤 권위보다 사랑이, 문자와 교리를 넘어서는 성령이 세상을 하나로 묶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비록 요아킴은 당시 교황청의 단죄와 비판을 받았지만 수도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았으며, 죽은 뒤에도 그의 무덤가에는 공경과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을 철저히 거절했으나 단테(A. Dante, 1265-1321)는 요아킴을 ‘예언자의 정신을 타고난’ 사람이었다고 칭송했습니다.

지금은 길바닥 영성이 빛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대입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갇혀 지내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불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십니다. 특정한 공간과 특수한 신분에 매이지 않고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당신의 백성들과 머무십니다. 그곳에서 사랑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요한 23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자 신선한 공기가 교회 안에 흘러들어 왔듯이, 성령의 생생한 기운이 교회의 장벽을 넘나들면서 활동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머무는 곳에 ‘영원한 복음’을 알리는 성령의 바람이 쉴 사이 없이 불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합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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