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예수님은 우리 운명의 밑그림이다
상태바
[성경공부] 예수님은 우리 운명의 밑그림이다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5.09 11: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6
사진출처=fineartamerica.com

하느님의 첫번째 행위인 창조행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재창조 행위도 완전히 자유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완전히 자유스러운 사랑의 행위이다.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이다. 어둠을 극복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빛의 행위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자유가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전에, 인간의 힘에만 의지할 때에는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힘을 통하여 그 일이 가능해 졌다. 한번 일어난 것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오로지 자유롭게만 일어날 수 있다.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자유로운 선택이란 강요 될 수 없다: 단지 초대 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그 초대가 우리에게까지,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넓혀지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아빠로 삼을 것인지, 또 우리가 그분을 믿어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갈 것인지를 묻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 대신, 그분이 결정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로운 결정을 함으로써만 예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신 순간에, 무엇인가가 변화되었다, 되돌이킬 수 없이 변화되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내어 주셨고 그들을 자신의 살과 피로 포용하시고, 모든 인류의 형제가 될 것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어드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그분의 형제 자매를 당신과 똑같은 관계로 끌어 들이셨다.

우리 형제 중의 하나가 완전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겠다고 응답함으로써 이제 하느님은 아주 독특하게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하느님에 대한 보편적인 아버지라는 개념이 이제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났다. 예수님 안에서 그 개념이 하나의 구체적인 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이렇게 인간적으로 육화 되었다.

예수님을 높이 세운 것은 하느님이 이 관계를 확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과 같이 하느님을 아빠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약속이자 보장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완전히 믿는다면 예수님은 우리 운명의 밑그림이다. 우리가 그분처럼 살다가 죽기로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승리의 모형이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자기의 믿음을 둔 사람들이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루가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그들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시고 그분 오른편에 앉히셨다고 말한다(사도행전 2,32. 4,10. 7,55). 사도 바오로의 서간문에서도 부활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한다(로마서 8,11; 고린토 후서 13,4; 갈라디아서 1,2).

그러나 요한 복음과 다른 서간문에서는 예수님이 하느님 능력으로 세워졌다고 하지 않고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한다(요한 2,19-22, 골로사이 1,18). (우리는 똑같은 출처로부터 예수님 탄생 전에 그분을 말씀 혹은 주님으로, 선재(先在)하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모습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서 다른 묘사를 하고, 그분의 신비스런 실재를 묘사하기 위해서 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거의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인들이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을 단 하나의 표현방식으로 포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서는 부활사건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완전히 믿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분은 아버지의 부활을 기다리며, 모든 인간적인 바램을 거슬러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에 희망을 걸고 공허함을 견디어내는 많은 형제 자매들 가운데 최초의 분이시다(로마서 8,11; 고린토 후서 4,14; 골로사이 1,18).

모든 삶에는 성 금요일이 불가피하게 있기 마련이다. 종종 그 날은 금방 끝나지 않고 성토요일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부활주일이 올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것은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온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하다. 그것은 사도들이 경험한 부활만큼 확실하다. 그것은 우리가 성서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배운다면,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어떻게 죽음을 벗어나 부활에 이르기까지 사는 지를 배운다면, 우리 자신의 삶에서 발견하는 빠스카 신비처럼 아주 확실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런일이 일어나도록 두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일이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길(항상 죽음같이 느껴지는)에서 우리자신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우리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게 되는데 이런 자유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다. 움켜쥐든, 내놓든 우리 것이었던 그 자유를 일단 포기하고 나서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유이다. 이런 자유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시어 영광을 주실 때에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참여했던 자유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제한적인 현존에서 완전한 현존으로, 개인적인 존재에서 무한하고 공유할 수 있는 존재로 바뀌셨다. 똑같은 성령의 힘을 통해서 우리도 인간 한계의 구속을 받을 수 없는 영의 자유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 빠스카 신비 속의 아버지께 온전히 승복 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아시는 것을 조금이나마 경험한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