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수도원은 사랑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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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수도원은 사랑의 학교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5.01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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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19

우리의 소명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길인
더 뛰어난 길을 간직하는 것이다.
날마다 이 일들 안에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이 일들 안에서 견디는 것이다.

베르나르드가 알프스의 성 요한 대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쓴 한 편지에서 나온 이 말은 시토회 영성의 중심에 자리한 것에 대하여 완벽한 요약을 하고 있다. 삶의 목적은 사랑이다. 그것은 그처럼 단순하다. 시토회 기본 문서인 <자비의 헌장>은 이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이 오늘날 시토회의 소명을 따르는 수도승에게 적용되고 있듯이, ‘전적으로 사랑으로 인도되고... 우리의 성장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어떤 열렬함으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합적으로 회칙을 따르도록 시도하면서 초기의 시토회 교부들은 사랑에 대한 베네딕도의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이해를 회복하고자 원하였다. 사랑 안에 하느님과의 신비한 일치는 그들이 이해하였듯이 수도생활의 목적이었다. 회칙은 끝이 없다: 회칙의 마지막 장은 회칙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베네딕도는 수도원을 사랑의 학교라고 불렀는데, 그곳에서 수련자는 각자를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신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그런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아에 대하여 참되게 인식하고 깊은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점차 수련자는 강하고, 온화하고 겸손한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베네딕도는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했다:

수도승은 그의 영적 아버지,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인 수도원장을 겸손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방문 수도승은 ‘사랑의 겸손’으로 어떤 논평을 하도록 기대된다.

겸손함의 열두 단계인 회칙 제7장은 베네딕도회 수행의 심장과 중심으로 항상 간주되어 왔다. 베네딕도가 제시한 겸손함의 핵심은 수도승이 참된 자아에 관한 지식 속에 묻혀 있는 존재의 실체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앙드레 루프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겸손은 참되고 동시에 바닥에 가까운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와 가장 깊은 감정들의 가장 깊은 바닥에 닿은 사람만이 자연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진실할 수 있고, 참되게 겸손할 수 있다.’

위의 글은 시토회의 소명의 의미에 관한 베르나르드의 통찰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래서 베르나르드의 첫 번째 논문이 겸손을 다루고 있으며, 이 논문 역시 그가 베네딕도의 길에 접근했을 때에도 역시 겸손의 정신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사다리의 전체 가치가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가져다 주는 능력에 있다고 본다.

<겸손의 계단>을 썼을 때 베르나르드는 약 10년 동안 대수도원장이었는데, 급성장하는 공동체를 돌보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겸손의 계단들을 세우기 전에 그는 우리에게 계단들이 이를 수 있는 높이를 보여주면서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높이는 진리이다. 단순히 어떤 도덕 의식이나 마음의 특성이 아니라, 육화된 말씀이신 하느님이 알려지고 관상되는 것이다.

베르나르드에게는 겸손, 사랑, 그리고 관상이라는 겸손의 세 단계 또는 차원이 있다. 이 단계들은 자신 속의 진리, 이웃 속의 진리, 그리고 진리 그 자체라는 진리인식의 세 단계와 부합한다. 그는 외적으로 갈구하는 겸손과, 그에게는 진리인 마음의 겸손을 구분한다. 베네딕도의 12계단 사다리의 마지만 계단은 세리의 기도나 시편의 말씀처럼, 수도승을 ‘나는 모든 면에서 허리 굽혀 절하고 낮춥니다’(회칙 7.65-6)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 준다.

세리는 자신의 약함이 있는 마지막 자리에 내려가 있다. 그는 이 약함을 알고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그것을 달게 받기까지 하였다- 비록 동시에 가슴 깊은 속에서 하느님께 울부짖기도 하지만. 그는 가장 밑바닥, 그의 존재의 기반, 자신의 가장 깊은 느낌들에까지 닿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고도 깊게 진실되고, 참되게 겸손하다.

바리사이에게서 우리는 비교됨을 본다: 선의를 가졌지만 완전함을 향한 순수히 인간적인 애씀. 산 정상으로 오르는 수많은 이미지들과 함께 하면서 어떤 영웅적인 시도로 이어지는 완전함의 이상은 아마도 젊은 수련자가 공동체 속으로 가져 왔을 것이고, 마치 그것은 우리 대부분이 성취의 기대를 걸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성공 지향적인 세계에 의해 고무되는 것과도 같다. 이 성공에 대한 압력, 자아를 이상으로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나 안전에 대한 요구에서 오든지, 또는 권위의 인물로서 항구히 현존하는 아버지에게서 오든지 간에 우리의 무의식에 뿌리를 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출처=romualdica.blogspot.kr

완전함의 어떤 이상으로부터 사는 것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강요된 것이든지, 혹은 형식주의적인 신심에 종속되던지 간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위험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주 두려움 없이 사는 것 또는 두려움이 주입된 행동양식과 의무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결국 두려움, 긴장, 자유의 상실 이외에 그 어떤 몫도 지불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의 필요를 인정할 때만 비로소 나는 밑으로 향하며 올라가는 이 비정상적인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0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자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종류의 위기, 상실 혹은 모든 다양한 형태의 사별(죽음도 그 중의 한 가지 형태일 뿐인데 때때로 꽤 갑작스레 곧장 일어나는 사별이다) 속에서만 우리는 가장 깊은 느낌들, 필요들과 문제들이 표면에 떠오르도록 그리고 그것들을 올바른 자리에 놓이게 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럴 때에 비로소, 모든 발판이 흔들리면서 나는 얼마나 많이 내가 구원될 필요가 있는지 인정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벽들과 성벽들이 허물어지고 인간적인 완전함을 위한 내 계획을 포기한 다음에야 어떤 일이 가능할 것이다. 앙드레 루프는 “이 모든 것이 내 한계를 넘어선다!”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모세 원장의 말처럼, “하느님은 그분의 기적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다”라고 말한다.

내가 온전히 나의 비참한 처지를 깨달을 때에야 나는 바뀌기를 희망할 수 있고,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얻기를 희망할 수 있다. 이처럼 겸손과 희망은 함께 돌아오는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왜냐하면 베르나르드는 인간 본성의 존엄성, ‘위대함을 향한 역량을 갖고 있는 고귀한 창조물’로서의 인간존재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머튼이 말한대로, 베르나르드는 ‘모든 철학자나 신학자에 의해 사용되어온 것과 똑같은 강력함으로’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선함을 옹호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렇게 우리는 갈라졌고, 한 절반은 이렇게 위대하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능력으로. <단순함의 정신>이라는 저술에서 ‘겸손은 진리’라는 제목아래 머튼은 이 사실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대문자로 적어 넣고 있다!

"성 베르나르드는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무(無)에 대한 무지와 똑같이 위험스러운 또 다른 무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대함(OUR OWN GREATNESS)에 관한 무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충분히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위대함이 그분에게서 온 것이고, 혼자 힘으로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신뢰하려고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고,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의존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신 것만큼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무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며, 베르나르드가 경고한 것처럼 ‘우리 고유의 영광’을 경시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똑같이 우리는 그 반대의 오류를 분명히 조정해야 하는데, 그 잘못은 사실 우리가 가진 것 이상을 우리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위대함이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잊어버릴 때 하느님이 주신 선물들을 마치 우리자신의 것처럼 간주할 때 저지르는 잘못인 것이다. 우리자신을 비하시키는 첫 번째 잘못의 경우 우리는 우리자신의 영광을 잃으며, 두 번째는 우리의 것이 아닌 것에 근거하여 우리자신들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되는 잘못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 사랑과 겸손의 연결은 사랑의 표현이 외적이어야 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앙드레 루프는 우리에게 수도전통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킨다.

‘오직 약함 속에서만 참된 사랑이 만져질 수 있다.’

이것은 타인에게 열려있고, 받아들이며, 귀를 기울이고 온유하며, 타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용하고, 우리가 타인이 필요함을 인식하는 가난을 받아들이는 그런 의미의 사랑이다. ‘참된 사랑과 우정은 겸손 없이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질식시키는 사랑이다.’

그러나 또한 더 나아가는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겸손, 사랑과 지식사이의 연결로서 시토 수도회의 전통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준다. 겸손은 우리의 참된 자리,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이다. 기만과 이중성, 환상에 의해 눈이 멀었어도, 우리는 겸손이 자아-인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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