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의 불만과 아퀴나스의 선한 사람 "당연한 불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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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의 불만과 아퀴나스의 선한 사람 "당연한 불행은 없다"
  • 유대칠
  • 승인 2017.05.0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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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5]

자주 접하게 되는 참으로 무서운 상식이 있다. ‘일등’이면 당연히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거다. 더 많이 가지니 더 많이 누릴 수 있음이 분명하다. 더 많이 누리기에 더 많이 기쁜 것이 틀림없다. 일등의 웃음은 당연하고, 그의 행복도 더 많은 소유도 당연하다. ‘꼴찌’는 다르다. ‘꼴찌’라면 당연히 덜 가져야한다. 덜 가지기에 덜 누릴 수밖에 없어야 한다. 덜 누리기에 덜 기쁠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일등에 비해 덜 가지고 덜 누리는 꼴찌가 웃으면 그게 ‘바보’다. 덜 가지고 덜 누려도 웃으니 그것에 진짜 바보다. 더 가져야 한다. 더 가진 이의 웃음만이 마땅한 웃음, 당연한 웃음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그러니 바보처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똑똑하게 행복하기 위해 ‘일등’이 되어야 한다. 남을 이겨야한다. 남을 이기고 일등이 되어 보란 듯이 당당하게 웃어야 한다. 남보다 시험도 더 잘치고 책도 더 많이 읽어야 한다.

무조건 일등이 되어야 한다니 

공부를 하는 것도 독서를 하는 것도 일등이 되기 위해서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지식을 가져, ‘지식 일등’이 되어야 한다. 더 노력해서 남이 가지지 못한 땅을 가진 ‘땅 일등’이 되어야 하고, 남이 가지지 못한 주식을 더 가져 ‘주식 일등’이 되어야한다. 일등이 되어야한다. 그래야 당연한 웃음을 당당하게 보일 수 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두고 장일순은 참 슬프다 한다. 왜 일등만 웃어야하는지 슬프다한다. 왜 일등의 웃음만이 당연하고 꼴지의 웃음은 당연한 것이 아닌지 슬프다 한다.

“오늘날 세상은 온통 경쟁으로 가득 차 있네. 너나없이 남보다 한발 앞서서 남을 밟고 이겨야 산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진 채 살고 있어. 그렇지만 삶이란 건 일등부터 꼴지까지 다 저마다 할 일을 하며, 함께 도우며 사는 거야. 이 이치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사람만이 아니고 자연과 더불어 이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는 모두가 서로 존귀하게 여기며 서로 돕고 살아야한다 이 말이야. 그게 함다운 공생의 삶인 거지.”

참말로 이 세상은 다툼으로 가득하다. 어딜 가나 다툼이 있다. 특히 학생은 전투사가 되어야한다. 공부도 결국은 일등이 되기 위한 공간, 남을 이기기 위한 다툼의 공간일 뿐이다. 언론의 공고를 보면 참 겁이 난다. 영양제도 조금 더 공부하기 위해 먹어야 한다. 남을 이기기 위해 영양제를 먹는다.

책도 논술을 위해 읽는다. 책에 담긴 여러 고민에 공간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이기는 다툼을 대비하며 읽는다. 남을 이기기 위해 읽는다. 심지어 사도세자를 죽인 ‘뒤주’를 닮은 위아래사방이 막힌 독서 책상에 들어가 공부를 해야 한다. 일등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 말이다. 참 힘들게 산다.

공부도 독서도 결국은 일등이 되겠다는 전투 훈련이다. 남을 이기겠다는 훈련이다. 그리고 일등이 되면 너무나 당연히 진 사람을 밟고 간다. 너무나 당연히 말이다. 수능을 친 이후에도 다툼은 쉬지 않는다. 이 무거운 사회는 대학조차도 잔인하게 나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일등대학과 꼴찌대학으로 나눈다. 다시 일등대학의 웃음은 당연하고 꼴찌대학의 웃음은 이상한 것이 된다. 참 슬프고 무서운 세상이다. 그런데 이 무서운 모습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린다. 장일순의 생각처럼 결국은 모두가 서로 돕고 살아야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인데 말이다.

일등이 된다는 것은 남을 무시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등이 된다는 것은 자기 분야에서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음을 뜻한다. 법으로 일등인 사람은 법으로 그 사회적 몫을 수행해야한다. 법으로 일등이니 법으로 남을 지배하고, 이기고, 이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장사로 일등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기쁨만 생각하여 부당하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라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일등의 의미다. 농사와 청소 그리고 고기잡이와 예술로 일등인 이들은 각자 자신이 일등인 부분에서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일등만 누리는 기쁨을 원하지 않는다

중세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홀로 일등이 되어야 살아가는 이를 두고 선한 사람이라 보지 않았다. 홀로 일등이 되어 남을 지배하는 그 무서운 지배욕만으로 여럿 없이 그저 홀로 행복함을 누릴 수도 없다. 그런 이기심으론 온전한 행복이라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악이 될지 모른다. 많은 이들의 힘들고 슬픈 눈물이 단 한 사람의 기쁨을 위한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 단 한 사람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 단 한 사람의 행복만을 위해 다른 많은 이들의 눈물을 허락하신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의 행복과 기쁨을 원한다. 그들 모두를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 그런 하느님의 뜻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은 모든 인간들의 지복을 위하여 창조하셨다”(<진리에 대하여> 23, 2)라고 설명한다. 하느님은 일등인 그 한 사람의 기쁨만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자와 같은 이들의 거짓되고 잘못된 욕심이 더 많은 다수의 아픔이 되기에 그것이야 말로 최악이라 경계한다.(<신학대전> II-I, 2, 4 ad 2)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공의 이익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 선한 사람이 아니다.”
(신학대전 II-I, 92, 1 ad 3)

참 쉬우면서 어려운 말이다. 선한 사람은 모두를 위한 좋음에 익숙한 사람이다. 홀로 자신의 좋음만을 생각하면 일등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이는 선한 사람이 아니다. 모두를 위한 사람이어야 한다. 모두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이가 선한 사람이다.

누군가 일등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 꼴찌가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꼴찌의 불행이 당연하지 않았으면 한다. 일등이 된다는 것은 누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많은 사회적 책임을 가진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연한 불행이 없는 사회를 위한 사회적 책임 말이다. 더 이상 꼴찌의 웃음이 바보가 아닌 세상을 위해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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