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그리워라, 뜨거운 님의 입술
상태바
[시토회] 그리워라, 뜨거운 님의 입술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4.17 1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17

<왕의 아들의 이야기>는 현재 베르나르드의 확실한 저작으로 생각되는 여덟 편의 우화 시리즈 중의 첫 번째 편이다. 우화들은 가장 즐겁고, 상상력이 가득하고 재미있는 독서가 되게 하는데, 때때로 나는 번얀의 <천로역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 주님의 군대 전사인 불굴의 정신이 나타났다. 그는 기쁨인 칼을 휘두르며, 대담함의 전쟁터를 뚫고 밀어 들어간다. ‘동요하지 마라.’ 그가 외친다. ‘그들보다 우리가 더 많다.’ 그러나 천국 법정의 경험 많은 상담자인 분별력이 대답한다: ‘주의하라... 신중하게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

마지막 구절에서 베르나르드는 그의 목적을 드러낸다.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자유를 되찾는 소년에 대해 언급된 네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경솔하고 생각 없는 도피’의 의미를 설명하거나, 혹은 ‘무섭고 두려운 전쟁’은 모두가 통과해야 하는 단계들이라는 것이다. 이 우화들을 번역하고 우리가 이용할 수 있게 만든, 마이클 캐이시는 이 우화들이 ‘수도승들이 그들의 창조된 목적인 자유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묘사이며 여기서 우리는 성장의 현상학’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왕의 아들을 보는데, 처음에는 약하고 어리석고, 그런 다음 점점 나아지면서 당황하고 경솔해진다; 어려움이 올 때에는 침착함을 잃고 두려움이 자라지만, 그러나 마침내, ‘애덕의 나라에 도달될 때에는 멀리 보고, 경험을 하고, 완전해진다.’

전쟁에 관한 묘사는 저작의 뛰어난 부분이다: 적이 모든 방향에서 압박하여 두려움과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보이지 않는 적의 공격으로 도시는 멸망하고, 벽들은 허물어지고, 매복이 계획되고 횃불이 던져진다. 이 절망적인 궁지에서 하느님이 마침내 행동하신다.

아마도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기사 신분을 그만 두었던 젊은 사람들에게 설교했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을 전쟁이라는 이미지로 설명한 베르나르드의 선택과, 하늘로 향하는 진보가 지속적인 투쟁이라는 메시지는 잘 선택된 것이다. 마이클 캐이시는 논평한다: “베르나르드는 아마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던 젊은 수도승들이 그들에게 닥칠 투쟁에 놀라는 것을 보고 이를 경고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승리가 주어지기 전에 직면할 많은 패배들이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artplastoc.blogspot.fr

내가 시토 수도회 저작들에서 발견한 매력들 중의 하나는 그것들이 영적인 진보에 있어 단 하나의 이정표로 출발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여러 단계들을 어떻게든 제시해 주거나, 혹은 그것들을 나의 여정에 대한 길잡이나 지시자로서 더 생각하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저작들은 항상 독특하고 성령의 재량대로 인도되고 있으므로 실제 여정 그 자체에 대한 묘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성장 단계들을 생각할 때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해 묘사된 세 단계들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정화하고, 비추고, 결합시키는 단계들.

시토 수도회의 교부들에게서 우리는 수많은 구분들을 발견한다: 사랑의 네 단계들; 사랑의 충만함 속에서 그 정점을 이루는 은총의 일곱진보 단계; 단계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기 위한 모델로서의 진복팔단; 겸손의 열 두 발전단계들이 있다.

셋이라는 숫자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용된다. 베르나르드는 신부의 세 가지 기름, 즉 통회, 헌신과 경건함이라는 세가지 묘약들을 말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발, 머리, 그리고 온 몸에 적용되어 올라가는 순서로 보여진다.

그러나 또한 세 가지 입맞춤들이 있다: 발의 예비 입맞춤(통회의 준비)과 손의 입맞춤(선행의 실천) 바로 뒤에 영혼은 입의 입맞춤 혹은 직접 만남의 준비가 된다. 이것은 아가서에 관한 첫 번째의 열두 강론들에서 형성되는데, 아가서에서, 중세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영혼과 하느님사이의 관계에 관한 전통적인 신비적 해석의 원천을 찾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침실, 입맞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욕망으로서의 사랑이라는 단어들을 보게 된다.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 사이의 시적인 대화이며, 그것은 두 단계의 구원의 드라마와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부는 교회와 또한 영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구원의 드라마는 대화 가운데에서 시작한다: ‘그리워라, 뜨거운 님의 입술’. 말하는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숨을 쉬는 신부이다. 그리움은 영혼을 ‘임금님의 포옹 속에 비밀스럽게 쉬는’ 곳인 임금님의 방으로 계속 인도한다. 이 방에 있는 동안 영혼은 인간의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말로 반복할 수 없는 신비들을 듣는다...’

물론 그 길은 어렵고 험난할 것이고, 지루함과 무거움과 쇠약함의 시간들이 될 것이다. 모든 시토 수도회의 교부들은 그것에 대해 매우 솔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시야와 생각들을 지평선에 고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베르나르드는 천국의 본향을 향해 기쁨으로 서둘러 가는 그의 수도승들을 ‘기쁨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성인들처럼, 그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의 얼굴’이었다고 초기 시토 수도자들이 말하고 있다.

O quam felix(오, 얼마나 행복한가), 12세기 이그니의 대수도원장인 피에르는 이 말을 자주 반복해서 했다고 한다: ‘하느님과 함께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고 O felix는 호이랜드의 길버트의 거의 모든 강론에 있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었다.

베르나르드의 동생이 죽음의 병상에 있을 때 수도승들이 놀라 외치며, 한밤중에 급히 베르나르드를 급히 찾았다. ‘그가 떠나가고 있어요.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어요.’ 베르나르드는 제라르가 얼굴이 기쁨으로 넘쳐 흘러 빛나면서, 시편 148장의 마지막 절을 끝마치는 것을 보려고 제 때에 도착했고, 핏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속에서도 그는 본향의 집으로 가는 제라르의 기쁨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베르나르드는 이승에서의 여정의 주제를, 우리가 여행하며 가고 향하고 있는, 우리의 바램들이 채워질 장소인 천국의 예루살렘, 하느님의 도시, 본향을 바라보는 것과 늘 연관시켰다:

천국 본향의 큰 행복은,
우리 지상의 행로가 한숨으로 계속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의식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이해도 초월한다...
기쁨의 장소,
올바른 사람이 기쁨의 강물에서 물을 마시는 곳.
광휘의 장소,
올바른 사람이 밤하늘의 모든 광채로 앞을 비추는 곳.
행복의 장소,
영원한 즐거움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곳.
풍부의 장소,
그분을 찾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곳.
달콤함의 장소,
주님이 그분의 현존을 달콤하게 모든 이에게 알리시는 곳.
비젼의 장소,
원대한 시야가 보이는 곳.

여기에 베르나르드는 온화하고 시적이며, 빛의 감각으로 불어넣은 천국에 관한 그의 가장 아름다운 단언들 중의 하나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오 진정한 정오의 낮
따뜻함과 빛이 그 절정이고
그리고 태양이 그 정점이고
그리고 아무런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을 때;
그때엔 고여 있는 물이 말라버리고
그 악취가 사라져버린다.
오 결코 최고점은 끝나지 않는다
낮이 영원히 계속될 때에.
오 정오의 빛,
봄의 온화함으로 젖어든,
여름의 대담한 아름다움으로 새겨진,
가을의 열매로 풍성해진,
그리고 (만일 잊어버린 것 같지 않다면)
노고로부터 겨울의 휴식으로 고요한.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