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그럴듯한 장신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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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그럴듯한 장신구가 아니다
  • 교종 프란치스코
  • 승인 2017.04.1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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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4월4일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4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며 소속의 상징일 뿐 아니라, 사랑 때문에 스스로 죄인이 되신 하느님에 대한 기억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십자가를 단지 소속의 상징인 ‘하나의 식별’로 달고 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신 하느님을 바라보듯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전례에 나오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닫혔고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그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 속에서 죽는 것은 아주 보기 흉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다음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렇게 상기시키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1독서에서 들려주었던 광야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여정을 견딜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불뱀들을 보내셨고 그것들이 백성들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주님께 하소연하자 주님께서는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린 자는 누구든지 구리 뱀을 쳐다봤고, 구리 뱀을 쳐다본 자는 살아났습니다. 

뱀은 ‘악마의 상징’, ‘거짓말의 아비’, ‘인류를 죄짓게 만들었던, 죄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내가 높이 들어 올려졌을 때 모두 나에게로 올 것이다.”라고 상기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구리 뱀은 상처를 낫게 했지만 두 가지의 표지였습니다. 곧, 뱀이 저지른 죄, 뱀의 유혹, 뱀의 술책의 표지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식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예언인 셈입니다.

사진출처=rorate-caeli.stfi.re


 
이같이 십자가는 소속의 상징일 뿐 아니라, 사랑 때문에 스스로 죄인이 되신 하느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 되셨고, 인류의 온갖 더러움을 짊어지셨고, 죄로 인해 상처 입은 모든 사람이 그분을 바라보도록 높이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높이 들어 올려진 그분 안에서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죄인이 되신 하느님의 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자기 죄 안에서 죽을 것입니다.

구원은 오로지 십자가로부터 오지만 이 십자가는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관념 안에는 구원이 없고, 좋은 뜻 안에 좋은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의지 안에도 구원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 안에 구원은 없습니다. 유일한 구원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구리 뱀이 의미하는 것처럼 죄의 모든 독성을 빨아들일 수 있고 우리를 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성호를 긋지만 항상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대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몇몇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소속을 나타내는 표식이 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신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지니고 다닙니다. 이런 것도 좋습니다만 십자가는 마치 한 팀이라는 것을 나타내듯이 한 팀의 표식일 뿐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 되신 분에 대한 기억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하나의 장신구처럼 매달고, 어떤 사람들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보석으로 치장된 십자가를 달고 다닙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적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자는 자기 죄 안에 죽을 것이고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어떻게 짊어질지 자문해 봅시다. 오늘날 교회는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서 스스로 죄인이 되신 이 십자가의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 한 가지 대화를 제안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나는 십자가를 어떻게 짊어지는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십자성호를 그을 때 내가 행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가? 나는 십자가를 어떻게 지니고 다니는가? 어떤 종교단체에 속하는 상징으로만 사용하는가? 십자가를 어떻게 지니는가? 장신구처럼 사용하는가? 아주 희귀한 보석들, 금으로 장식된 귀금속인가? 나는 아픈 어깨 위에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배웠는가? 

우리 각자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가 우리의 죄 안에 죽지 않도록 스스로 죄인이 되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제가 여러분에게 제시했던 질문들에 대답해 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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