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비는 경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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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는 경계가 없다
  • 한상봉
  • 승인 2017.04.11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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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유산>, 마인라트 림베크, 분도출판사, 2017

[Book Review] Meinrad Limbeck, Abchild vom Opfertod, Das Christenum neu denken

<예수의 유산>, 마인라트 림베크, 분도출판사, 2017

세상에 종교도 많지만, 아직 젊은 나이에 예수님만큼 ‘사형수’로 비참하게 죽은 분을 구원자로, 깨달은 자로 여기는 종교는 들어보지 못했다. 도대체 예수님의 삶에 무슨 문제라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굳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해명할 필요를 간절히 느꼈을 것이다.

마인라트 림베크는 <예수의 유산>에서,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세상에 왔는가?” 아니면 “기쁜 소식을 인간에게 전하려고 왔는가?” 묻는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4-15)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분에겐 ‘나쁜 소식’이라 불러야 할까.

군중들에게 언제나 깊은 감명을 주었던 예수님이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과 조금 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면, 십자가에서 살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폭력적인 권력도 현자들을 쉽지 처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운명을 자기 운명으로 알고, 그분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주님과 운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혹스런 결말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이 죽음이 부활에 잇닿아 있다고, 그러니 희망을 가지라고 설득하지만, 당장에 겪어야 할 고통과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림베크는 체코 민주화의 주인공이었던 바클라프 하벨 대통령의 이야기를 빌어 “희망이란 어떤 것이 좋게 끝난다는 확신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끝나든 상관없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의 죽음에는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럼 왜, 예수님은 죽었을까?

by Sister Mary Grace

하느님은 누구의 고통도 바라지 않는다

교회전통에는 ‘대속신앙’이란 게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켰다는 교리이다. 인간을 죄에서 속량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제물로 바쳐질 ‘어린양’으로 인간에게 제공했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그분의 자비가 느껴지지만, 굳이 이런 희생을 통해서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율법적’이다. 어떤 형태로든 죄에는 반드시 처벌이 따라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여기서 하느님은 ‘심판관’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압바’라고 불렀던 하느님은 다른 분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았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예수님은 그 사랑이 ‘법치’(法治)라고 여기지 않았다.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를 치료해 주셨고(루카 13,10-14), 굳이 안식일에 수종을 앓던 이를 고쳐주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어떤 청원기도도 하지 못했다. 하느님도 쉬셔야 하니, 이날만은 침묵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의 자비가 거부되는 일은 없다고 예수님은 믿었다.

예수님은 줄곧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어울렸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에게 회개하여 피해를 보상하고, 합당한 속죄 제물을 바치라고 권면하면서 어울렸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은 조건을 달지 않고 죄인들과 어울렸다. 예수님이 받아들인 하느님은 잘잘못을 따지면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느님은 인간을 차고 넘치게 사랑하기에 그분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예수님은 하느님을 심판자로 체험하지 않았다. 그런 분은 대속자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느님은 다짜고짜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했다. 단서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달리 단식하지 않는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혼인잔치의 손님들이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르 2,19)고 했다. 여기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신랑이었고, 이분이 지금 현존하고 계시므로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할 이유가 없다. 그분은 백성들을 “정의와 공정으로써 사랑과 자비로써 아내로 삼았다.”(호세 2,21-22)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혼인잔치는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용서를 보장 받을만한 성전예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생애의 마지막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을 때에도 속죄의 물을 끼얹는 정화예식을 하지 않았고, 침수대에서 몸도 씻지 않고 그냥 성전 앞뜰로 들어가 둘러보고 나오셨다.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보았고, 공식적인 성전예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분이 성전을 본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한 이유는 따로 있다. 성전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속죄 제물을 바치고 빚을 청산하고 나오는 곳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 희망과 원의를 털어놓고 그분을 만나는 장소였다. 예수님이 성전세력을 못마땅하게 여기신 것은 그들이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워 죄인과 의인을 갈라놓고 하느님의 포도밭인 가난한 백성들을 갈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y Sister Mary Grace

바오로의 대속신앙,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

성전세력에게 독점되어 돈벌이 수단이 되었던 속죄 예식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먼저 도전받았다. 이제 세례만 받으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없이도 하느님은 즉각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죄인을 용서하신다고 했다. 시종일관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루카 15,11-32), 착한 목자(루카 15,3-7), 선한 포도밭 주인(마태 20,1-16)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가톨릭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바오로 사도는 여전히 하느님의 진노를 포기할 수 없었고,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 3,13)

바오로 사도에게 십자가는 복음과 신학의 중심이다. 그 결과 바오로는 나자렛 예수의 삶과 복음, 행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생전의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는 ‘하느님 순종’의 결과였기 때문에,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요한의 편지에도 계승되어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1요한 2,1-2)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보내 주신 것”(4,10)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죄의 보편성’에 주목하느라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구체적인 세력이 누구인지 잊게 만들 위험이 있다. 실상 예수님은 하느님께 온전히 헌신했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한 첫 번째 인물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남녀 제자들도 의인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던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벌써 수백 년 전부터 이 물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모델로 제자들에게 여겨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

나자렛 예수 때문에 하느님 자비를 신뢰하고

예수님의 죽음은 특별한 것도 하느님의 뜻도 아니었다. 많은 의인과 예언자들이 예수님처럼 고초를 겪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확신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당도한 복음을 끝까지 선포했으며, 그 결과 복음을 흉음으로 여기던 성전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이 ‘예언자’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이미 와 있다”고 선언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오늘 당장 참여하는 가운데 실현된다. 이 과정에서 온갖 불가피한 시련이 있다 해도,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 섬김의 삶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런 공동체 한가운데서 하느님 나라가 생겨난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이제 내 죄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과거와 다르게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자렛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힘을 확고히 신뢰하는 가운데 깨어 있는 감각으로, 온갖 상상을 동원해서, 모든 능력을 사용해서, 구원으로 충만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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