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너 자신을 혁명하라, 암브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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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너 자신을 혁명하라, 암브로시오
  • 가톨릭일꾼
  • 승인 2017.04.1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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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Ambrosius of Milan(340-397년)

제 삶을 그대에게 맡길까요?
아니요, 그대가 나라고요.
그대가 되어야 하는 게 나라고요.
그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맑아져
유리탁자 위에 떨어진 물방울 같이
그대가 제 안에 흥건하군요.
주님, 그리고 그대

너 자신을 혁명하라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서 내 인생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스승이 있었나, 잠시 생각해 봅니다. 누구였을까요?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함석헌 선생입니다. 지금은 그분의 책이 어디 간지 잘 모르고 있지만, 어디서 먼지를 쓰고 있는지 모르지만, 언제라도 더 깊이 더 바닥에서 생각을 모을라치면 불쑥 떠오르는 이름입니다. 최근에 사다 놓고 아직 겉장도 열어보지 못한 책이 있습니다. 왜 이리 사는 게 번잡한지 모르겠습니다. 선생의 <너 자신을 혁명하라>. 제목만 보아도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책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마음이 주인인줄 아는 사람은 마음을 맑히기를 힘쓰고 마음이 맑아서 보면 참이 보인다. 어떤 것이 맑음이요 어떤 것이 흐림인가? 전체의 참을 볼 수 있는 눈이 맑은 눈이요, 전체를 모르고 부분만 보는 눈은 흐린 눈이다. 나만 아니라 남을 아는, 이제만 아니라 영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보면 역사는 결코 사납고 강한 자의 것이 아니고 착하고 부드러운 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경에게 빛을 말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자에게 정신의 세계를 말할 수 없다.”

잠깐 마음을 추스르게 됩니다. 잠시 고요 안에 머물고 싶습니다. 거기서 다시 뭐든 시작해야 한다는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늘 하늘을 보라, 고 하셨던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났던 것은 그분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을 통해서였지요. 고등학생 시절인데, 도서부를 맡고 계셨던 선생님께서 권해주신 책 가운데 한 권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인천 제물포역 근처엔 당시엔 꽤 큰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서너 차례 그 책을 사려고 찾아간 기억이 납니다. 책방 주인은 그 책이 “없다!”고 했지요. 그런데 몇 차례나 방문하던 나를 보더니 “정말 그 책이 필요하냐?”고 묻더군요. 책방 다락에서 꺼내다준 책은 양장본의 겉표지가 이미 누렇게 변색된 책이었습니다. 꽤 비싼 돈을 주고 산 것이기에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으쓱 이며 그 책을 가져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역사와 민중’이라는 세상을 보는 열쇠 말을 거기서 배웠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요즘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라는 인터넷신문에서 편집국장이라는 그럴듯한 직함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초기부터 여러 사람들과 언론을 준비하면서 프로필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세상과 교회의 복음적 소통을 위한 공간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세상의 평화를 자비 안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자리이며, 사회적 쟁점에 대한 복음적 시선을 나누고, 바람직한 교회공동체의 상을 그려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해방하시는 주님 안에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양육적 태도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우리는 성서와 전통을 통하여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새로운 길을 열어갑니다.”

아마 이러한 시각을 얻어 누리는 데는 은연중에 함석헌 선생의 가르침이 스며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상에서 영원까지 걸어가는 순례의 길에서 교회 안에서 길벗들을 만나 함께 걸어가자는 것이고, 서로 생각을 나누어 가지자는 제안입니다. 그 가운데 요즘 인터넷상에 많이 떠도는 그분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처럼 그런 동무를 만나고자 하는지도 모릅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고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명상과 저항’이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 그분 생각에 자꾸 부끄러워지고, 세상을 향해 그 한 사람이 되어주지 못함에 마음이 아립니다. 정말 좋은 깨달음은 언제나 한 발 늦게 찾아온다는 말이 저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 말 잊지 않고 새기고 있으니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현실 안에서 지리멸렬하고 무르고 맥 빠진 교회를 바라볼 때, 예수를 따라 걷는 길벗들의 가슴 아픈 한숨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너 자신을 혁명하라”는 말이 새삼 새록 크게 가슴을 울립니다. 나부터 그 한 사람이 되어한다는 각성, 나부터 먼저 혁명하여야 한다는 절박함이 말발굽소리처럼 울립니다. 아직 제가 교회를 사랑하고, 아직 교회 안에 복음을 살려는 신앙동지들이 남아있는 까닭이겠지요.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큰 어른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참에 방황하던 아구스티노 성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암브로시오 성인이 떠오릅니다.

st. Ambrosius of Milan

뜻하지 않은 부르심, 암브로시오 주교

암브로시오 성인은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의 지방 장관으로 재직한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트리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상류층의 관습대로 철학, 수사학, 문학 수업을 받고 갈리아 지방의 최고사법전권을 위임받은 황제의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서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로 일하는 등 처음엔 성직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370년경에 밀라노에 황제파견 행정관으로 가게 되면서 새로운 운명에 접하게 됩니다.

당시 교회는 아리우스파와 니체아파로 나뉘어 다투고 있었는데, 마침 아리우스파였던 밀라노의 주교가 죽으면서 주교 선거를 둘러싸고 대립과 혼란으로 들끓었습니다. 공공질서를 수습해야할 책임을 갖고 있던 암브로시오가 논쟁을 중재하기 위해 대성당에 갔을 때, 한 아이가 갑자기 “암브로시오 주교!”라고 외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따라서 암브로시오를 주교를 삼아야 한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교회분열을 막고 ‘놀랍고 믿을 수 없는 일치’를 이루는 데 암브로시오가 적격이라는 판단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두루두루 존경받고 능력 있고 황제의 파견행정관으로 신임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주교직을 맡는데 주저했습니다. 본인은 주교직을 열망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관리로서 사목적 신학적 경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당시 관습처럼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누군들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암브로시오는 황제 발렌티니아노 1세의 승인아래 밀라노 교회 공동체의 뜻을 받아들여 세례도 받고, 374년 정식으로 주교로 서임되었습니다.

나중에 암브로시오가 쓴 <성직론>에 따르면, 자신은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결국 주교가 되고 나서, 신학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르치기 위해서”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공부인데, 그가 얼마나 열심히 자기 백성들을 위해 공부하였는지 모르지만 성서, 신학, 신비주의 연구에 몰두하여 책을 썼는데, 실천적이며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유익한 교훈적인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뛰어난 설교가이기도 했던 암브로시오는 라틴 박사 네 분 가운데 한 분으로 꼽히며,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 기도로 활용하게 만들어 ‘암브로시오 전례’ 및 성가 집대성자로 기억되었으니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참 놀라운 것이지요. 그리고 그분은 당대의 또 다른 대학자가 되었던 아구스티노에게 감화를 주어 입교시킨 성인으로 유명한데,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호소할 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런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사진출처=The Met

아주 특별하고 고유한 길

암브로시오는 책상물림이 아니었으며, 교회에 대한 사랑과 복음적 열정으로 황제 권력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밀라노의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과 권한이 따르는 지위였으며, 그곳은 로마제국 서부 지역의 중심지였기에 정치적 영향 또한 막강하였습니다. 정력적이며 인내심이 강하고 합리적이며 체계적 사고력을 지녔던 암브로시오는 교회의 성직자로서 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황제의 권력과 간섭으로부터 교회를 독립시킨 것입니다.

당시 어린 황제를 대신해서 권력을 쥐었던 유스티나 황후가 아리우스파에 대한 관용과 집회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공포하고 암브로시오가 관리하던 교구 안에 있던 두 개의 대성당을 아리우스파에게 주려고 군대를 보내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을 때, 암브로시오는 신도들과 황제의 군대에 맞섰지요. 이러한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그분은 자극적인 동방의 가락에 맞춘 새로운 찬미가를 지어 신자들을 매혹시켰으며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였다는데, 황제의 군대조차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무력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황실은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또한 말년에는 황제와의 논쟁에서 "황제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여 황제의 참회를 이끌어 내기도 했지요. 390년 일리리아 지방의 군사령관이 테살로니카 원형경기장에서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맞아죽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테오도시오 황제가 격분하여 경기장에 있던 주민 7천명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복수한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 소식에 접한 암브로시오는 대단히 놀라 즉시 서한을 황제께 보내어 통회와 보속과 고행을 권유하며 아울러 당분간 성당출입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아첨하는 신하의 말을 듣고 황제는 주교의 명령을 엄중히 지킬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성당으로 행차했지요. 그러나 주교는 성당입구를 가로막고 서서 “폐하께서는 아직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위중함을 충분히 못 깨닫고 계시는 것 같사오니, 청컨대 이 길로 궁으로 돌아가셔서 그런 대죄에 또다시 죄악을 거듭치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여서 황제는 아무 말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결국 황제는 성탄절 미사에 참석하려고 왔다가 거절당하고나서, 공동체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기 죄를 고백한 뒤에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졌답니다. 이것은 종교적 우위를 뜻하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황제와 주교가 신앙 안에서 친밀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표징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한편 암브로시오는 날마다 거룩한 미사를 드렸으며, 낮에는 오늘날의 성무일도(聖務日禱, Officium Divinum) 형식처럼 찬가와 독서로 이루어진 말씀의 전례를 하고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사목활동에서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 죄수들을 돌보고 올바른 판결을 하도록 영향을 미쳤으며,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사면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대성당의 산 비토레 경당에 있는 5세기의 모자이크로 된 그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그분은 머리가 짧고 수염이 덥수룩하며 팔 없는 긴 옷과 수수한 외투를 걸친 마르고 근엄한 금욕가의 모습이었답니다. 바실리오 성인처럼 암브로시오도 주교가 된 뒤에 자신의 재산을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주일과 대축일을 빼고는 하루에 한 끼만 밥을 먹어서 “가벼운 행장을 한 가난한 군인처럼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다”(<생애>38)고 합니다. 그는 397년 성토요일(4월 4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스로 길이 되어 걸어감으로써,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삶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사람들은 흔하지는 않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상처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세상에 봉헌된 존재로 살아갔으며, 그분들을 바라볼 눈이 있는 사람들 역시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서 그분들에게로 다가갑니다. 그들은 모두 영적 동지이며 친밀한 동무들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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